[민변의 활동] ‘살아있는 과거사, 유신 긴급조치를 고발하다’ 토론회 후기
‘살아있는 과거사, 유신 긴급조치를 고발하다’ 토론회 후기
; 비상의 정상화로 나아가는 길
글_ 9기 인턴 전민규
지난 10월 24일,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민변과 포럼 진실과정의가 주관하고 민주행동과 역사정의가 주최한 ‘살아있는 과거사, 유신·긴급조치를 고발하다’라는 이름의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토론회는 한승헌 변호사님의 여는 말과 백기완 선생님의 피해자 증언, 그리고 관련 영상을 관람하는 것을 1부로, 한홍구 교수님, 이명춘 변호사님, 조영선 변호사님의 발제와 권혜령 박사님, 김학민 대표님의 패널토론을 2부로 유신·긴급조치의 시대적 증언부터 역사적, 법적 검토까지 이루어졌습니다.
1부에서 한승헌 변호사님이 그들을 변호하면서 무죄임을 확신하는 동시에 유죄를 받을 것 또한 확신했다는 모순된 감정에 관해 이야기하실 때 그 고뇌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문에 의한 자백, 쪽지재판이 일상적이었던 당시 사법부의 법정에서 변호인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을 수 밖에 없는 무력감과, 그럼에도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변호해야 하는 그 상황 자체가 ‘시대가 법률가에게 내려준 업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 백기완 선생님의 피해자 증언을 들을 땐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모순이 쩌렁쩌렁하게 마음에 울려 퍼졌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진술거부라는 옥중에서 말로 지은 시를 들려주실 때엔 그 안에 선생님의 삶이 꾹꾹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내 증언이 어설퍼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시며 증언을 끝맺으실 때 저뿐만 아니라 토론회에 참여한 모든 분들의 가슴이 찡하고 울렸으리라 생각합니다.
2부에서는 한홍구 교수님의 발제로 시작되었습니다. 유신은 70년대 그 당시에도 시대착오적인 기획이었으며, 그 시기는 박정희 개인이 행복해지기 위해 만인이 불행해졌던 시기였다는 이야기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집권시기의 태반이 비상의 시기였으며, 정상적인 국민의 동의를 받아 나라를 이끌지 못했던 대통령 박정희, 그 스스로가 비정상적인 대통령이 아니었을까요. 이어 이명춘 변호사님과 조영선 변호사님께서 유신과 긴급조치 발동의 역사적 배경과 절차적 위헌성에 대해 짚어주셨습니다. 당시의 법률가들도 충분히 유신과 긴급조치의 위헌성에 대해 알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박정희를 군형법 상 내란죄로 기소해서 사형을 내려야 했지만, 철저히 입을 다물고 시대와 역사를 외면했었습니다.
권혜령 박사님이 발표하신 당시 긴급조치 피해사례 상의 ‘보통 사람들’, 막걸리 마시다가 나라님 욕이 툭 튀어나온 동네 아저씨, 유신과 긴급조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던 학원 선생님, 잘못된 법 고쳐야 한다고 말하는 지식인, 그들을 기소하고 10년이 넘는 징역과 자격정지를 내린 건 이 나라의 사법부였습니다. 민주행동 김학민 대표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시대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발제 및 토론이 끝나기에 앞서 이명춘 변호사님께서 검찰총장의 ‘비상상고권’이라는 유신 및 긴급조치 과거사 청산의 단초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입법적이 아닌 사법적 해결이란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수는 남이 씻겨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겁니다.
올 한 해, 그 시절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불거져 나왔습니다. 인혁당 사건, 정수장학회을 비롯해 그 시절의 아픔이 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까지 우리에게 회자되는 것일까요? 이와 같은 논란이 박근혜 후보의 대선 출마 때문만은 아니라고 믿고 싶습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이 문제의식은 대선이 끝나고 나면 흐지부지되고 말 것이니까요. 그러나 한 가지 흥미로운 건 박근혜 후보가 ‘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집권 내내 ‘비상’을 외쳤던 자신의 아버지와 똑같이 ‘비상’ 대책을 내놓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더욱 흥미로운 건 70년대에나 먹힐 법했던 비상 선언이 2012년의 대한민국에도 여전히 유효했다는 것입니다. 언제쯤 우리나라는 ‘정상’이 될 수 있을까요?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당시의 잘못된 ‘비상’ 조치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그 시대의 아픔을 씻어주는 것에서부터 정상적인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난 9월, 민청학련과 관련하여 박형규 목사님 재심 사건 공판에서 있었던 임은정 검사의 구술 논고문 전문으로 글을 맺을까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살아있는 과거사를 해결하는 노력에서부터 비상을 외쳐야만 했던 그 시대의 아물지 않은 상흔을 회복하고, 더 이상 비상이 일상적이지 않은 우리나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린다고 믿습니다.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하여 권력의 채찍을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몸을 불살라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분들의 가슴에 날인하였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모진 비바람 속에서 온몸으로 민주주의의 싹을 지켜낸 우리 시대의 거인에게서 그 어두웠던 시대의 상흔을 씻어내며 역사의 한 장을 함께 넘기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위반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는 헌법에 위반되어 무효인 법령이므로 무죄이고, 내란선동죄는 관련 사건들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관련 증거는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정권교체를 넘어 국헌문란의 목적으로 한 폭동을 선동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