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랑 고시랑>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
-영화 ‘타인의 삶’을 통해 본 인간다움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
글_이혜정 변호사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영화 속 악으로 대변되는 문화부장관의 확신에 가득 찬 대사이다. 그러나 영화는 사람이 타인의 삶을 통해, 예술과 사랑에 의해 변할 수 있음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영화 속 배경은 1984년 통일되기 전 동독. 온통 우울한 회색과 잿빛을 덫칠한 도시, 웃음을 잃은 사람들 속에서 암울한 시대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당시 동독은 10만여 명의 비밀요원이 보이지 않게 활동하면서 시민들을 감시하고 억압하였다. 만연한 도청과 미행, 수많은 밀고는 삶을 옥죄였고, 노출되는 일상의 두려움에 스스로를 검열하며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간다움은 이미 공허하고 낯설은 단어일 뿐, 말 그대로 당시 독일은 브레히트가 그토록 울분하며 토해내던 ‘서정시가 어려운 시대’였다.
그러한 감시의 눈을 대신하는 비밀경찰을 독일에서는 슈타찌라고 불렀다. 경찰대학 교수이자 냉혹한 고문관인 비즐러는 어느 날 극작가이자 시인인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 크리스티나를 감시하게 된다. 체제나 신념에 대한 충성이 전부였던 비즐러는 여태 그랬듯이 그들의 일상을 철저하게 감시하던 중 시나브로 인간적인 그들의 삶에 공감하고 동화되어 버린다. 영화는 시종일관 드라이만의 집과 비즐러의 집을 번갈아 비추면서 그들의 삶을 대조한다. 아늑하고 포근한 드라이만의 사람 냄새 가득한 집과 온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최소한의 생활 용품만 구비된 딱딱하고 차가운 기숙사 같은 비즐러의 집을 보여주며 같은 인간이지만 살아가는 삶은 이렇게 다르다고 영화는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영화 ‘타인의 삶’은 인간의 감정은 체제에 우선하지 않다고 믿으며, 체제에 충실하고 평생을 그 신념에 따라 결핍되어진 자신의 삶은 인식하지 못한 채 기계적인 삶을 살아온 한 인간이 비인간적이었던 자신의 일을 하던 중에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특히 비즐러가 도청을 하다 드라이만의 집에서 훔쳐 온 브레이트의 시집을 읽어 내려가는 눈빛은 마치 호기심 어린 사춘기 소년만큼이나 순수하고 지극히 감수성 푸른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이다. 게다가 당시 상황을 못 이겨 자살한 드라이만의 멘토가 생전에 드라이만의 생일에 건네 준 악보인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를 드라이만이 슬픔을 억누르며 연주하자 도청을 하던 비즐러는 그 피아노 선율에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드라이만의 감정에 공감하고 슬픔을 함께하는 장면에서 냉혈한이었던 차디찬 얼음 같은 비즐러는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세밀한 영혼의 창작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일지 모른다. 그러기에 감독은 극단의 감정을 가진 예술가와 비밀경찰을 대조시키면서 인간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음을, 그러한 믿음을, 희망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매개로서 연극과 시, 음악을 사용하면서 말이다. 드라이만 외에 크리스티나의 고뇌와 비즐러와의 관계, 언론의 자유를 억압당한 채 양심을 묻어두어야 했던 작가들의 고통과 번민을 영화는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비즐러가 평생을 충성하며 믿어왔던 신념이 한 순간에 흔들린 것은 이념보다 결국 인간이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을 타인의 삶을 통해 우연히 깨닫게 된 것에서 시작된다. 또한 비즐러의 영혼이 아름다웠던 것은 그가 타인의 삶에 동화된 이후에 스스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는 지켜주고 싶었던 아름다운 타인의 삶을 살려내면서 비로소 그동안 인간다움이 결핍되어진 자신의 삶을 일상의 윤회로서 회복했으며, 마침내 인생을 걸고서 한 선택이 결국은 옳았다는 것을 위로 받는 순간 비즐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적이고 평온해 보였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타인의 삶에 영향을 받으며 때로는 온전한 자신의 삶이 아닌 타인에 의해 규정되어지고 보여 지는 삶을 살기도 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나만의 감정이 아닌 함께 공유하고 공감하고픈 속내가 있음을 솔직히 감출 수 없다. 하지만 미뤄두었던 글쓰기를 앞당긴 것은 나 역시 타인의 고통어린 삶에 게으른 핑계와 애써 외면하려만 했던 무심한 감정의 파도를 더 이상 밀어낼 수 없었음을… 그래서 이렇게 어설픈 몸짓이라도 해야 스스로에게 위안이 됨을 고백한다.
지난 7일 기무사에 의해 사찰을 당했던 한 시민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고인은 아내의 일상까지도 사찰한 것을 알고 행여 지인에게까지 피해가 갈까봐 노심초사하며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다 극단의 선택을 한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감시당하는 가족과 지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죽음으로 속죄한다’라는 짤막한 유서로 대신하며 고단했던 삶을 내려놓은 채 그간의 고통을 안고 서러운 죽음을 택한 것이다.
무고한 시민이 눈물을 흘리고 죽음으로 내몰림에도 이유를 묻지 않고 진실은 어둠의 침묵 저 편에 묻으려만 하는 사회를 무어라 정의 할 수 있을까. 타인의 고통에 무뎌지고 부조리하고 부정의한 현실이 아무렇지 않은 듯 평범해지는 악에 익숙해질까 두렵다. 사유하는 능력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없었고, 그런 능력이 없는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기에 인류역사에 길이 남을 대학살을 저지른 나치전범인 아이히만이 우리 사회에도 있는 것은 아닌지…그래서 다시 서정시가 어려운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고 무기력하기까지 하다. 영화 속 등장하는 시인 브레이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을 달래며 선한 영혼이었던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친다.
–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