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랑 고시랑]
봄볕에 벤 기억
글_이재정 변호사
봄볕에 눈이 시렸다.
가을하늘 푸른빛에만 눈을 베는 줄 알았다. 겨울 새벽, 그 시린 공기에만 맘이 갈라진다고 생각했다. 따사로운 것이 나를 벨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의외의 배신이다.
문득 사랑하는 이들과 일상을 부대끼다 생채기 나던 일이 겹쳐 떠올랐다.
‘학우’와 ‘민중’을 기꺼워하며 외쳐대다, 큰 벽을 마주하고 그들을 원망하던 기억이 겹쳐 떠올랐다.
내 맘 같지 않던 그이들을 원망하며 아파하던 순간의 기억이 오늘 문득 내 맘에 겹친다.
민변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보면, 소위 ‘무료공익변론사건’을 감당(?)해야 할 경우가 왕왕 있다. 물론 ‘실비’라는 명목으로 약간의 금전을 제공받는 경우도 있지만, 이 역시 ‘시장가격(?)’에 못 미치는 소액인 경우가 많다. 거래계의 대가로는 부족하나 그 이상의 보상이 있다. 누군가에게 베풀어 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면 모두 느낀 적 있을 그 만족감, 거기에다 법리적 연구가 치열한 사안일 경우 법률가로서 갖게 되는 성취감도 있다.
여기까지는 바람직한 모습. 이제부터 현실이다.
직업적 활동가가 아닌 이상. 내가 하는 다른 사건, 다른 일상들과는 늘 충돌이다. ‘공익사건’들은 대개 참조할 기록 양도 녹록치 않다. 법원에서 기록을 복사해오는 경비도 만만치 않다. 그뿐인가, 재판 자체가 ‘투쟁의 현장’이라, 신청하는 증인도 많고 어떤 사건은 밤 열두시를 넘기기도 한다. 그래도 견딜 만 하다.
치명상은 그들, 바로 나의 숭고한 민중들에게서 온다.
냉정한 법률적 조언에 ‘운동성’이 부족하다고 서운해 하기도 한다.
결과가 기대와 다를 때 ‘유명 로펌’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판사와 같은 학교가 아님을 책망하기도 하고,
전관이 아니라는 점을 아쉬워하던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민변’에 진정(?)도 한다. –물론 나는 이런 경험까지는 없다–
수인(囚人)이 되어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있던, ‘한승헌 변호사님’같은 인권변호사의 모습을 기대하면서도, 유수 로펌의 세련된 경력의 잘나가는 변호사를 선망한다.
공익사건 의뢰인의 이율배반성에 맘 다친 기억은 민변 회원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단 한 번도 그 탓하며 가던 길 멈춘 이를 본적은 없다.
오늘 난 그런 기억을 하나 더 보탰다.
온몸에 힘이 빠져 어질한 한 때를 견디고, 다시 기록 챙겨 들고 법정으로 나선다.
문득 자문해본다.
꾸역꾸역 구겨 삼키며 현실을 버티게 하는 힘은 도대체가……
도대체…
도대체…
오늘도
봄이 한창이다. 볕이, 참… 따사롭다.
◎ 금번 호 ‘고시랑 고시랑’ 기고 예정 원고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불발되면서, 뉴스레터 기획팀의 팀장인 제가 이른 바, 땜방(?) 원고를 쓰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일상의 작은 소요에 넋두리가 필요했던가 봅니다. 채다 마무리하지 못한 이야기에는 술로 답해주시고 따스한 위로로 함께 채워주시면 멋진 마무리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