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의인터뷰] 늘 연애하는 남자 – 송호창 변호사 인터뷰

2011-11-30 332

 

[민변의 인터뷰]


늘 연애하는 남자 – 송호창 변호사 인터뷰



 


인터뷰_이재정 변호사
글_7기 인턴 박진형
사진_정영미 간사, 류나라 인턴

 


2008년 쇠고기 파동 당시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차분한 토론 실력과 훈훈한 외모로 화제가 되었던 변호사가 있다. 당시 ‘민변 사무차장’이라는 직함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송호창 변호사. 송 변호사는 미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이후, 2011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에는 박원순 캠프의 대변인으로 활약하며 미디어를 장식했다. 민변 출판홍보팀이 강남역에 위치한 송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근황과 변호사로서의 삶, 그리고 향후 계획에 대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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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 박원순 시장 당선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어떻게 선거 캠프에 가시게 된 건지.


송호창 변호사 (이하 ‘송’) : 미국에 머무르는 중에 목 디스크가 생겼어요. 치료차 귀국해서 8월 한 달 동안 하루에 세 번씩 병원을 다녔지요. 좀 낫는다 싶던 때, 한 변호사 선배에게 박 시장님의 출마소식을 들었습니다. ‘도와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선배의 권유로 선거 캠프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당시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던 박 시장님이 일정을 모두 마치고 산을 내려온 다음 날, 바로 캠프 첫 번째 모임을 가졌지요. 그때부터 눈코 뜰 새 없을 만큼 정신없이 일하다가 이제야 겨우 한숨 돌리고 있습니다.




민변 : 선거 당시 박원순 캠프의 대변인직을 수락했던 이유는?


송 : 박 시장님과는 2000년 참여연대 활동을 하면서부터 같이 일을 했었어요. 또한 시장님이 민변 창립멤버이기도 하고요. 박 시장님의 출마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서울시장으로서 박원순 변호사보다 더 그 역할에 적합한 사람은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였어요. 그리고 시민운동가로서 활동해오다가 드디어 마음을 먹고 전면에 나서겠다는 각오를 하셨으니, 두 팔 걷고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공교롭게도 저 또한 귀국한 직후여서 약간 시간적 여유가 있기도 했고요. 이래저래 타이밍이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 기사에는 박 시장님이 이미 구상을 끝낸 후 저를 불러들였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웃음) 그런 건 아니었고, 선거를 도울 사람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대변인으로 추천되었던 거예요. 대변인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 외에도 온갖 조율이나 정무적인 일이 많았어요. 그런 역할들을 했었죠.




민변 : 결과적으로 박원순 캠프가 이기긴 했지만 대변인의 역할이 다소 아쉬웠다는 평가도 있었다.


송 : 민변의 사무차장으로서 대언론 역할을 할 때와 선거 캠프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것이 많이 달랐어요. 게다가 초기 캠프에 선거 경험을 가진 사람이 한명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언론 대응에 조금 미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 시장님도 2000년대 초반부터는 어떠한 쟁점이나 사회 이슈를 두고 논쟁하는 역할을 맡기보다 강연이나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 등의 일에 주로 매진했어요. 그러다 보니 토론이나 질문에 대응하는 ‘감’이 좀 부족한 부분이 있었지요. 한 마디로 후보도 캠프도 촉박한 선거 기간의 언론대응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미숙한 점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변 : 아쉬움도 있었지만 진정성에 대해서는 다들 공감했으니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 선거가 끝난 이후에 송 변호사가 박 시장님의 곁에서 계속 일 할 것이라는 예측도 많았는데, 함께 하지 않은 이유는?


송 : 인사에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직책을 맡을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해당 직책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런 사람이 저 말고도 많구요. (웃음) 선거에서 당선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선 후 시민들에게 ‘시민사회 대표주자가 서울시장을 맡으니 서울시가 제대로 바뀌더라’ 하는 평가를 받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역할을 맡아야 하겠지요. 또한 선거에서 함께 승리했다고 해서 일도 같이 해야 하는 게 아니라, 가까운 사람일수록 당선이 되고 나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것이 시장의 운신의 폭을 넓히는 데 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선거 후 제일 측근에 있던 사람들이 뒤로 빠졌던 것은 그래서였지요. 다소 의외라는 평가를 받는 서울시 대변인직 인사도 많은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서 하신 선택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박원순 서울시장의 훌륭한 면을 계속 보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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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 2년간 미국에 가 계셨던 이야기를 해 보자. 민변 사무차장 직을 그만두면서 바로 떠났는데.


송 : 부인이 코넬대 노사관계대학원에서 석사를 하게 됐었습니다. 저는 휴식 겸, 아내를 도울 겸 따라갔었죠. 처음 1년은 집에 있으면서 부인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했어요. 밥 하고 설거지하고 아이들 학교에서 돌아오는 거 기다리고. 사실 요리책도 사 갔었어요. (웃음) 그러다가 후반부 1년은 저 역시 코넬대에서 방문연구원으로 공부했습니다.




민변 : 활발하게 해 왔던 변호사 활동, 민변 활동들을 정리하면서 다른 모색을 하고 싶던 때였는지?


송 : 아무래도 그렇죠. 제가 민변 사무처 일을 4년 동안 했습니다. 그동안 상근변호사 제도도 만들고, 공부모임도 만들고 하면서 민변의 활동범위나 역할이 상당히 커졌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1990년대부터 10년 동안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을 했었고, 또 2000년부터 10년 동안은 변호사로서 활동했으니 거의 10년 주기로 역할이 바뀐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저에게도 새로운 역할이 필요하고 또 민변 사무처에도 새로운 인물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시기들이 잘 맞아떨어져서 미국으로 가게 된 거지요. 돌아와서 어떤 일을 할지 구상하려는 마음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휴식이 먼저다 보니 생각을 미루게 되더라고요. 귀국해서 생각하자 싶었지만, 갑자기 선거가 생겨서 또 바쁘게 일하게 되고. (웃음) 이제는 정말로 어떤 일을 할지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요.




민변 : 송호창 변호사의 10년이 궁금하다. 변호사로서 10년을 거치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사건은 무엇인지?


송 : 아무래도 송두율 교수 사건이 제일 힘들었어요. 사건 기록이 2~3만 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방대했고, 제가 주심 변호사 중 한 명이었는데 독일에서 송 교수가 돌아온 날부터 7~8개월 정도를 쉬어 본 기억이 없어요. 당시 어금니가 안 좋은 상태였는데 치과에 갈 시간이 없어서 미루다가 1심 끝나고 2심 때 갔더니 뽑으라고 하더군요. 제 어금니와 맞바꾼 사건입니다. (웃음)


어떻게 보면 여러 사람에게 삶의 전환점을 준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송 교수는 ‘조선노동당 고위간부’에서 평범한 시민이 됐고, 자유롭게 한국으로 입국할 수 있게 되었지요.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 과정에서 송 교수가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대책 없고 근거 없는 비난과 색깔공세 덕분에 언론에 대해서 소송한 것만 해도 부지기수였지요. 대책위원회 등을 통해 도와준 분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책임은 변호사들이 져야 하는 것이었어요. 당시 날 선 언론과 여론 심판을 몇몇 변호인들이 다 감당해야 했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해방 이후, 혹은 분단 이후 한국 현대사를 전반적으로 다 공부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냉전시대에서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도 폭넓게 고민할 수 있었고요. 당시 그러한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향해 가는 과정에서 민간 차원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송 교수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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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 민변 변호사로서 활동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


송 : 대학 다닐 때 했던 학생운동 등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저의 경우 이념적으로 격렬했던 85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때부터 학생운동을 시작했어요. 87년도 민주화 운동 때는 3학년이었는데, 당시 3학년들이 학생시위를 주도했어요. 저도 학생들 제일 앞에 나서서 메가폰 들고 시위를 이끌곤 했죠. 졸업을 할 때쯤에는 노동현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고요. 변호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것도 제 영역을 찾아서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민변으로 오게 된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어요. 연수원 시절부터 민변 활동을 했었죠.




민변 : ‘훈남 변호사’, ‘꽃미남 변호사’ 등으로 불리고 있다. 언론에 많이 노출되면서 여대생들에게는 아이돌처럼 호응을 얻기도 하는데.


송 :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잘 모르겠어요. 제가 제 사진을 보면 보기 민망할 정도로 주름이 많던데요. (웃음) 게다가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살이 많이 빠졌어요. 그래서 더 쭈글쭈글(?)해 보이는 것 같은데……. 아무리 먹어도 다시 살이 오르지 않아서 고민입니다.




민변 : 송 변호사님이 그간 쌓아 오신 대언론, 혹은 대중을 설득하는 능력을 발현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을 것 같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향후를 고민하는 부분들이 있는지.


송 : 아무래도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어떤 활동을 통해 기여를 해 나가느냐가 제게는 가장 큰 고민입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를 치르면서 거리에 나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경험한 것은,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국민들이 너무도 답답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내년 대선을 통해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절대적인 과제가 됐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어요. 그러니 일단 내년 대선에서 모든 개인과 의식 있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진보적인 단체들, 그룹들이 힘을 합해 제대로 된 대통령 후보가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부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으면 해야지요. 이번 서울시장 선거도 야권의 정치적 견해가 다른 여러 그룹들이 연합을 이뤄내며 ‘승리’라는 의미 있는 경험을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아직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이러한 중요한 경험들을 공유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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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 그러한 경험들로부터 민변의 홍보 전략, 미디어 전략에 조언을 한다면?


송 : 이번 선거를 치르며 ‘정치는 연애다’라고 느꼈습니다. 여기서의 정치는 단지 기성 정치를 의미하는 것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이를 통해 국민의 마음을 얻는 모든 과정을 뜻합니다. 50일이라는 서울 시장 선거기간 동안 저 역시 진한 열애를 하고 나온 기분입니다. 유권자라는 상대방과 연애를 하는 것이지요. 내가 마음을 얻지 못하면 유권자는 다른 후보에게로 마음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유권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이성과 이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부분, 즉 이미지나 태도 등 모든 총체적인 요소들을 완벽한 하나로 구성해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이 가진 생각과 고통에 교감하고, 또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구에 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까지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요. 그야말로 종합적인 능력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정치를 종합예술이라고들 하는 것 같습니다.


홍보라는 것도 결국 그러한 문제입니다. ‘나’를 어떠한 방식으로 보여주느냐가 중요하지요. 보여주는 것은 결국 마음을 얻기 위한 행위입니다. 이성과 감성,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 표정, 옷차림 등 모든 것을 보고 상대방은 나를 섬세하게 판단합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홍보에 접근했을 때 답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법조인이라는 직업 자체가 전문영역으로만 매몰되기 쉬운 일이기 때문에, 시야가 좁아지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합니다. 전혀 다른, 테두리 바깥의 이질적인 사람들을 만나서 교감하고 눈과 귀를 열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 또한 민변의 홍보 활동에 하나의 답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역시도 선거 과정을 통해 경험한 부분들이니, 앞으로는 언론에 메시지를 전달할 때 훨씬 설득력 있게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민변 : ‘정치는 연애다’라니, 인상 깊은 표현이다. 연애를 많이 해 보셨는지.


송 : 안타깝게도 한 번밖에 해보지 못했어요. 집안에 여자들이 없기도 했고, 이성과의 교제를 어색해 하는 편이었지요.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도 미흡한 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웃음) 제가 대학을 다녔던 80년대는 엄혹한 시절이라 연애를 많이 하지 않았어요. 물론 하는 사람들은 했겠지만. (웃음)




민변 : 향후 계획은? 외부에서 이런저런 요구가 많을 텐데.


송 : 주위에서 그럴 것이라고들 하지만 직접 요청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웃음) 일단 2년 동안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 중요하고, 또 변호사 일을 다시 시작했으니 열심히 해야지요. 그리고 내년 초에 책을 낼 예정입니다. 미국에서 생활했던 경험을 담은 글인데 일단 <아름다운 이타카 사람들>이라는 가제를 지어 두었어요. 미국 가서 노동관계공부도 했지만 무엇보다 지역 사람들의 공동체, NGO 활동이 눈에 띄었어요. 그들이 얼마나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지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죠. 그 경험을 한국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어서 글을 쓰게 됐어요. 현재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mhdn)에 연재중인데, 연재가 끝나면 나머지 이야기들과 함께 책으로 발간할 듯합니다.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경험했던 것, 시민 참여본부에서 활동하면서 배웠던 것들 중에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이야기들도 곧 책으로 나올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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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 마지막으로 이 글을 보고 계실 모든 분들께 한 마디.


송 : 정치는 ‘여의도 섬’에 있는 정치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지요. 시장 선거 때 캠프에서 ‘내 삶을 바꾸는 첫 번째 시장’이라는 슬로건을 걸었던 것도 그때문이었어요. 실제로 새로운 서울시장이 당선된 후 서울시민들의 삶도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년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삶이 바뀔 수 있는 해가 될 것입니다. 정치는 멀고 먼 다른 나라 얘기가 아니라 우리 밥상 위의 문제고 우리 생활의 문제입니다. 그러니 이기적인 욕망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비전에, 국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사람에게 투표를 합시다.




인터뷰는 시종일관 밝은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송 변호사는 미국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할 때는 즐거운 표정을 지었고 본인이 ‘훈남 변호사’로 불린다는 이야기에는 쑥스러워 했지만, 이번 서울시장 선거나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차분하고 강한 어조로 본인의 의견을 펼쳤다.


향후 송 변호사가 어떤 길을 걷게 될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디에서 활약하든 그간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부디 ‘성공적인 연애’를 해 내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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