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의인터뷰] 한 손엔 법전, 한 손엔 횃불을 들고 – 이광철 변호사 인터뷰

2011-10-31 243

[민변의 인터뷰]


 


한 손엔 법전, 한 손엔 횃불을 들고


– 민변 이광철 변호사 인터뷰 –


 


 


인터뷰_이재정 변호사


정리_출판홍보팀 7기 인턴 윤다정


사진_정영미 간사


 


 


2008년 촛불시위 이후 3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난 9월, 기쁜 소식이 민변 사무실에 전해졌다. 민변 회원인 이광철 변호사가 중앙일보와 세계일보를 상대로 승소하여 ‘쇠파이프 변호사’라는 터무니없는 오명을 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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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일, 중앙일보에서는 이광철 변호사님이 법정에서 폭력시위를 옹호했다는 식의 기사를 내보냈다. 진실 공방은 3년 뒤인 지난 9월 9일, 중앙일보와 세계일보가 각각 2,500만원, 1,500만원을 이광철 변호사님과 민변에 지급하고 정정보도문을 게재하라는 판결이 내려지면서 마무리되었다.


 


 


승소 소식이 전해지고 한 달 뒤쯤, 이광철 변호사를 민변 사무실에서 만났다. 앞뒤로 빼곡한 일정 안에서 겨우 뺀 짧은 시간이었던 탓에 맘 바쁜 인터뷰였지만, 그의 너털웃음은 시종일관 여유롭고 넉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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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대학 시절 총학생회장이었고, 총련 의장까지 했다고 들었다. 그런 경험이 민변 활동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학생 시절의 이광철 변호사는.


 


(이광철, 이하 “이”) 어떻게 저의 총학생회장 경력이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민변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면 조금 부담스러워요. 전 변호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은데, 사람과의 관계에서 제 자신이 운동권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혹은 운동 진영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다는 식으로만 규정되는 것 같아요. 총학생회장 출신 정치인과 같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태에 비판할 만한 부분도 많고요. 물론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차라리 알려지지 않았으면 부담이 덜했으리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고3때 입시에 낙방하고 재수를 했는데, 가고 싶은 학교에는 못 갔어요. 막연히 대입시험을 준비할 때와 막상 학교를 다닐 때의 느낌이 많이 달라서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삼수를 할까 말까 하는 고민도 했는데, 삼수한다는 것 자체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선택에 책임을 지고 싶었어요. 한국 사회의 사다리로 치면 소위 ‘지방대’는 맨 밑에 위치하는데, 단지 그 위치의 비주류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문제의식을 느끼고 한국사회의 구조를 바꿔 나갈 것인지 고민하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시작한 게 학생운동이었습니다.


군대에 다녀오고 95년도에 복학하고 나서는 조용히 고시공부를 하려고 했죠. 같이 활동하던 동기들 중 남학생들은 다 군대에 있고, 여학생들은 졸업을 한 상황이어서 후배들과는 서먹했어요. 90년대 초반과 학생운동 분위기도 많이 달랐고요. 그런데 마침 95년도 9월에 ‘5.18 싸움’이 굉장히 대중적으로 이루어졌잖아요. 그걸 계기로 총학생회 선거에 나가게 됐죠.


제가 총학생회 회장을 했던 96년에 ‘연대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때 연대에서 탈출해서 넉 달 정도 수배생활을 했었어요. 그래서 96년도 12월 20일에 체포되어서 감옥살이를 했죠. 당초에는 1년 6개월 실형을 받아서 97년 8월에 상고를 했죠. 직접 항소이유서를 쓰면서 개별적인 공소 사실의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제 공소사실 중 이런 게 있었어요. “96년 4월 30일에 5.3 총궐기를 했다. 그리고 밤 10시에 시내로 진출을 시도하다가 경찰이 막으니까 화염병 400여 개를 던졌다.” 그런데 5.3 총궐기는 5월 3일에 하면 되지, 4월 30일에 집회하면서 시도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리고 춘천 시내는 밤 열시가 되면 조용합니다. 교문박치기를 해서 나갈 이유가 없어요. 나가면 시민들한테 혼나거든요. 대법원 상고심에서 이게 받아들여져서 파기환송되었어요. 파기환송심에서 제가 그랬죠. “형기의 1/3을 다 살았는데 이제 집행유예로 풀어 주십시오.”(웃음) 그래서 집행유예를 받아서 97년 11월 18일에 출소했습니다. 총 11개월 정도 형기를 살았고, 그 안에서 국가보안법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지요.


 


(민변) ‘국가보안법 전문 변호사’로 유명하신데, 한국의 전반적인 대북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 국가보안법에 대해 스스로 서면도 쓰다 보니 생각할 게 많아요. 지금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점이, 과연 근본적으로 북한을 적으로 봐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되는지에 관한 것이에요.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96년도에도 그런 논란이 많았습니다만, 정부의 주장대로 북한에서 대량 탈북자가 발생한다고 하면, 현실적으로 그 탈북자의 대부분은 남한이 소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에 유고가 발생했을 때 대한민국이 과연 북한을 받아 들일 수 있을까요? 그건 안 된다는 거죠. 미국과 중국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요. 평소부터 주변국과 외교력을 통해 길러 가야 북한에 대한 발언권을 얻을 수 있고, 나아가 북한에 유고가 발생했을 경우 남한이 북한과 하나되어 통일 한국을 이룩할 수 있는데, 그런 준비는 전혀 안 하고 미국 바짓가랑이나 붙들고 늘어지면서 현실적으로 북한에서 발생한 부담은 다 남한이 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입니다. 발언권은 행사하지 못하면서 뒤치다꺼리는 다 해야 하는 건 너무 멍청하지 않습니까.


북한과의 평화통일을 이야기할 때, 북한이 현실적으로 갖고 있는 무력과 그들이 휴전선에 배치한 병력을 무시하자는 건 아니에요. 그건 그것대로 경계하지만, 근본적으로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바꿔 보자는 말입니다. 우리가 통일 한국을 이룩하는 당위에 접근할 수 있을까. 북한을 적으로 돌리고 한미안보동맹에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주장대로 북한에 유고가 발생하고 탈북자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온다면 과연 남한이 북한에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가. 그런 문제의식은 지금도 사실 해명이 잘 안 됩니다. 너무 한심하고 답답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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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민변에서 대외협력팀이 제일 업무가 많아 보인다. 민변의 사무차장으로 대외협력팀을 담당하느라, 강북과 강남을 오가며 일정을 소화하면서 사건도 진행하는데, 사무실 살림을 어떻게 꾸려 나가는지 염려하는 분들도 있다고.(웃음) 많은 업무를 어떻게 감당하고 계신지.


 


(이) 변호사들이 흔히 하는 표현으로, 사무실을 ‘근근이’ 유지할 만한 사건은 수임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맹자가 그런 말을 했다지 않습니까. “항산에 항심 있다.”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 갖춰져야 사람이 사람답게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지요. 물론 민변 활동을 포함해서, 제가 중요시하는 가치를 위해서 열심히 뛰고 싶어요. 그런데 그건 기본적으로 먹고 살 수 있을 때 가능한 겁니다. 사무실을 유지할 수도 없으면서 뜻만 높게 세운다면 오래 일할 수 없겠지요.


일이 많기는 해요. 그래서 사무실 달력에 가위표를 치지요. 내년 5월 총회까지 며칠 남았다, 이렇게 세고 있습니다.(웃음)


 


 


(민변) 외부 단체 활동가들의 전언에 의하면, 단체에서 요구하는 일들을 받아오는 일 만이 아니라,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서 먼저 단체들에 제안하고, 그 단체들의 역량을 끌어내 일까지 하신다고.


 


(이) 누군가와 어떤 일을 할 때, 이메일이나 전화, 화상통화를 주고받을 때, 그리고 만나서 이야기할 때의 느낌이 다 다릅니다. 전화나 이메일은 사무적인 도구지요. 부탁받은 일을 지금은 도저히 못 하겠다 싶으면 못 한다고 말하고, 할 수 있으면 한다고 말하고요. 반면 만나서 이야기하면 공적인 일을 떠나서 사람 간에 정도 생기고, 그 사람의 표현 이면에 담긴 맥락을 쉽게 이해할 수 있잖아요. 내가 여력이 안 되더라도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서 해 봐야겠다는 필요성이 체감이 되요.


제가 대외협력팀 일을 하며 만나는 대부분의 단체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공적인 가치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죠. 그런 모습을 보면 그 분들의 요구를 가급적 들어 드리고 민변도 거기에 발을 맞추는 방향으로 일을 하고 싶어지는데, 한 가지 고민이 생겨요. 제 생각과 민변에서 저를 통해 이야기를 들으시는 분들 사이에 괴리가 있거든요. 이메일과 전화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그 분들은 저를 통해 들어간 이야기를 사무적으로 받아들이시거든요. 그래서 민변에서 안 되면 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일의 하중이 더 쌓이기도 해요.


 


(민변) 촛불집회 쇠파이프 사건! 하면 다른 사람들이 축하한다는 인사를 제일 먼저 하는데, 고생 많으셨다는 이야기를 먼저하고 싶다. 정말 당연한 결과이지만, 승소까지의 과정에서 남들이 쉽사리 공감 못할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은데.


 


(이) 처음에는 “올 것이 왔구나! 드디어 중앙일보가 날 알아보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많이 황당하기도 했지요. 제가 한 변론의 내용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고, 특출한 변론 능력을 발휘하거나 정치적 신념을 공공연히 노출하지도 않았거든요.


피고인 윤모 씨는 노숙자였어요. 노숙자의 삶이라는 건 몹시 무미건조하잖아요. 밤마다 어딘가에서 자다가 쫓겨나기도 하고, 오늘은 어디에서 잘 지를 고민하는. 하늘만 봐도 눈물이 날 것 같은데, 그러던 와중에 서울시내 전체에서 밤마다 축제가 벌어졌어요. 사람이 북적거리고 바글바글 한데다가, 촛불집회와 같은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팍팍해지지 않고 연대의 마음이 한껏 샘솟잖아요. 공동체가 광장에 나와서, 개인의 사적인 이익이 아닌 공적인 가치를 위해 목소리를 낸다는 마음이 발현되는 시점이에요. 남들의 어려움에 조금 더 관대해지지요. 그러니까 노숙자가 와서 술이나 돈을 달라고 하면 토 달지 않고 주는 게 그 분 입장에서는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피고인은 시위대가 왜 전경버스에 올라가서 줄을 당기는지도 모르고, 남들이 당기니까 자기도 같이 당기다가 현장에서 체포가 됐어요.


재판이 열렸는데 증거 기록이 500쪽이고, 단 100쪽만이 이 분이 했던 일이에요. 나머지 400쪽은 전부 쇠파이프 얘기로 채워져 있었어요. 그런데 이 분이 체포된 뒤 2시간 23분가량이 지나고 나서 쇠파이프가 촛불집회에 최초로 등장했거든요. 증거 의견을 밝힐 때 “왜 증거기록에 쇠파이프 얘기가 들어가 있느냐”,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지 않느냐”라고 말했지요. 검사는 “실제로는 관련이 없지만 양형 자료다”라고 주장하더라고요. 옥신각신하다가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피고인이 광우병대책회의 집행부의 간부를 맡고 있다거나, 2008년 촛불집회에서 전체적인 책임을 질 만한 지휘에 있다면 모를까, 단순한 노숙자에 불과하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체포되고 난 다음 출현한 쇠파이프에 대해 책임져야 하느냐? 법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다. 또한 2008년 촛불집회의 특징이 특별한 지휘부 없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건데, 그건 촛불집회를 부정하는 쪽에서도 인정하지 않느냐? 대다수의 시민들은 촛불집회가 평화적으로 시민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일부는 평화적인 목소리로 더 이상 무엇을 전달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고 쇠파이프를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분은 쇠파이프를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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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씀드렸듯 제가 한 얘기는 당연한 변호사로서의 변론 내용이었습니다. 근데 그걸 중앙일보 기자가 방청석에 앉아 있다가 “정부 정책에 반대하다 보면 쇠파이프를 들 수도 있어”라고 헤드라인을 따 버리고, 변론의 전체적인 내용을 자기가 알지도 못하면서 기사를 쓴 상황이었어요.


정말 화가 났던 게 뭐냐 하면, 소송 자료를 준비하다가 댓글을 봤어요. “북한에나 가라”, “민변은 좌빨이냐”, 이런 건 상관없어요. 그런데 “밤중에 길조심해라”, “네 마누라랑 자식들 쇠파이프로 뒤통수 까버린다”, 이런 식으로 인터넷의 익명성 뒤에 숨은 사람들의 언어폭력을 당해 보니 움츠러들게 되더라고요. 직원에게 들었는데 사무실에 항의전화도 왔다고 하더라고요. 거짓말쟁이로까지 매도되는 상황이었고요.


정작 소송에 들어가서는 크게 힘든 일이 없었어요. 제가 재판 당사자이긴 했지만, 재판 말고도 다른 일들이 꾸역꾸역 밀려드니까 일상에 파묻히는 감이 있었지요. 한동안은 재판도 열리지 않았어요. 재판에서 당시의 제 변론이 녹음된 테이프를 공개하느냐 마느냐 하는 게 쟁점이었는데, 대법원이 정보 공개를 했을 경우에 사건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고 비공개 결정을 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잊고 살았어요.


중간에 재판부가 한 번 바뀌고, 우여곡절 끝에 테이프가 공개되었습니다. 테이프 듣고 나니까 분위기가 싹 정리되었지요. 중앙일보 측 대리인도 “기사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라고 하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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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소 판결이 난 이후, 중앙일보에서는 10월 11일치 24면 하단에 정정보도문을 조그맣게 실었다.


 


 


(민변) 사실과 기사를 비교하니, 그 기자는 법조적 상식이 아니라 언어적 이해력이 부족해 보인다. 이해가 되고도 그런 식으로 조작된 것이라면 더더욱 기자로서의 자질이 의심되는 상황일테고.


 


(이) 그 기자는 법조출입기자로서의 기초 지식도 전혀 없는, 형편없는 기사를 썼어요. 최소한의 법률적 형사소송 절차만 알았더라도 그런 기사를 쓸 수 없거든요. 더 문제인 것은 사회부 데스크에서 데스킹이 전혀 안 된 것이고요.


법정에서 변호사가 하는 말에 깔린 기본적 전제는, 그게 ‘변호사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변호사는 누군가의 스피커지요. 물론 제가 피고인이라면 피고인석에 서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평화적으로 얘기해도 정부에서 안 듣기에 불가피하게 쇠파이프를 들었다. 그 쇠파이프로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재산을 침해한 것이 아니다. 쇠파이프를 든 것은 의사표시 수단이고 정당하다.” 그런데 중앙일보에서는 스피커를 주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정치적 목적과 효과를 계산한 의도가 명백히 앞선 나머지 사실관계를 부풀렸어요. 촛불집회에 ‘붉은 칠’을 하고, 촛불집회를 악의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다가 헛발질을 했지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해서 민변과 제게 큰 축복과 은혜를 주었지만요.(웃음)


 


 


(민변) 승소 이후에 본인 통장은 물론 민변 재정에 큰 도움을 주셨다.(웃음) 현실적으로 통장에 입금된 돈을 마주한 느낌은.


 


(이) 제 처가 좋아했죠.(웃음) 승소 판결 후 통장에 돈이 입금된 걸 보고 이런 생각도 했어요. “중앙일보가 내 인생에 이런 ‘토스’도 해 주는구나! 전생에 중앙일보와 내가 어떤 인연을 쌓았을까?”(일동 웃음)


 


 


(민변) 씁쓸한 이야기이지만, 당시 중앙일보는 기사를 통해 의도한 바를 충분히 누리기도 했다고 본다. 이번 사건을 겪으며 직접 느낀 한국 언론의 문제점은.


 


도대체 무죄추정의 원칙이 언론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충격을 주었다’, ‘드러났다’, ‘밝혀졌다’ 같은 어휘를 쓰면서 뭐든지 단정하고 들어가잖아요. 그래놓고 장자연 리스트에 조선일보 사주 방상훈이 있더라, 하는 것처럼 기득권층과 관련된 일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금과옥조처럼 여겨요. 그런데 일반 시민들과 관련된 사건에서는 그런 원칙을 헌신짝처럼 버려도 되는 겁니까?


언론 보도를 할 때 단정적 표현을 쓰지 않고, 최종적으로 사법부의 결정이 남아있음을 행간에 깔아서 기사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을 꼭 주문하고 싶어요. 정치적으로 선별된 소재를 가지고 몰아가니까 한국 언론이 개판인 거예요. 언론은 중립적이고 객관적 관찰자여야 하는데, 그렇질 못하니까 한국 사회가 너무 강퍅해지는 것 같습니다.


 


 


(민변) 민변 활동하다가 ‘쇠파이프 사건’으로 소송까지 겪는 모습을 보고 가족들(특히, 아내)이 속상해하지 않는지 ‘조국의 미래’ 이상으로 ‘가족의 미래(?)’에 신경 써 달라는 주문은 없는지.


 


(이) 제 처는 저의 가장 큰 지지자이고 든든한 후원자지요. 하지만, 민변 활동을 ‘총론적으로 지지’하더라도 때때로 ‘각론적으로는 이견’이 있습니다. 개별적인 일정을 짤 때 많이 다투었는데, 가족들과 보낼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은 빼 달라는 게 제 처의 요구예요. 사실 싸움이라고 할 수도 없죠. 틀린 말이 아니니까요. 지금은 일정을 선택할 때 가족들이 후순위로 밀리는 상황에 많이 적응한 것 같아요. 일주일에 5일 중 최소한 하루, 바라기로는 이틀 정도 가족들과 같이 저녁밥을 먹었으면 좋겠고, 주말 중 하루는 같이 종일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고 말하곤 하지요. 너무나 소박한 요구인데도 들어주지 못하고 있으니, 참 부족한 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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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개인적으로 어떤 변호사로서의 모습을 꿈꾸는지.


 


(이) 첫째로 변호사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열정을 끊임없이 품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누군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제가 가진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음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변호사라는 전문직에 걸맞은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연수원에 있을 때 공부했던 것들이 머리에서 숭숭 빠져나가는 것만 같아서, 충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민변) 대부분의 뉴스레터 독자들이 2008년 촛불집회부터 민변에 관심을 가져 주시는 분들이다. 당시 이광철 변호사의 활약상이 정말 남달랐는데, 그런 인연이 있는 바로 그 시민들 누구보다 이번 판결소식을 반가워 할 것이다. 그런 우리 독자 분들께 한 말씀.


 


(이) 건방진 것 같지만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현대에는 옛날처럼 광장에서 직접 민주주의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불가피하게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랬을 때 대의민주주의의 성패는 두 가지에서 판가름 납니다. 대의 기관을 민주적 정당성을 가지고 선출하는 문제가 그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대의 기관을 선출한 뒤, 대의 기관의 추정적 의사와 주권자인 국민들의 의사 사이의 괴리감을 좁히는 문제이지요.


민주적 정당성의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 과제인데, 결국 참여를 통해 해소할 수밖에 없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도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주권자의 의사를 대의 기관에 끊임없이 전달하면서 상호 인풋-아웃풋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게 만들고 통제하는 것이 국민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중간 중간 양념처럼 들어간 칭찬의 말에 “여기 분위기가 참 좋네요. 이렇게 비행기도 다 태워 주고……”라고 쑥스럽게 웃으시던 이광철 변호사. 옥살이를 하면서 스스로 항소이유서를 쓰는 등의 사건을 겪으며, 학생 시절부터 반쯤은 법조인으로서 냉철함을 발휘하던 경험이 지금의 그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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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과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이광철 변호사의 성정은 ‘쇠파이프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다시금 드러났다. 피고인 윤모 씨에게 억울하게 죄목이 덧붙여진 부분에서 그의 목소리는 절로 높아졌다. 마치 피고인을 변론하던 재판정으로 돌아간 듯.


 


그런 그에게서, 법정에서 억울한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데 대한 변호사로서의 신념과 불의를 참아 넘기지 않는 정의로운 열정, 당사자의 아픔에 스스로를 일치시키는 공감 능력 그 모두를 느낀다. 인터뷰의 모든 순간에, 냉철함과 뜨거움이 동시에 묻어났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맹활약을 펼치셨던 이광철 변호사의 근황을 이번 인터뷰를 통해 전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더불어 혹시라도 이광철 변호사님이 재판에서 실수를 하였다고 오해하던 독자들이 이 글을 읽고 진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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