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부소식] 부산지부의 3차 희망버스 이야기
[지부소식]
희망버스가 나에게 남긴 에피소드들
내가 희망버스 행사를 현실에서 처음 접한 것은 영장실질심사를 통해서다. 1차 희망버스 행사 당시 한진중공업 담 바캍에서 사다리로 담을 넘어가는 참가자를 응원했던 분들에 대해서 영장이 청구된 것이었다. 공안검사가 심사 과정에서 “이 사람들은 시위대 중에서 가장 극렬하게 행동했던 사람들이고 채증을 통해 가담 정도가 가장 중한 사람들만을 체포해 온 것”이라고 주장하여 내가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면 됩니까. 옆에서 얼쩡거리는 사람들 잡아와 놓고는…”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검사는 울그락 불그락 했으나 당연히 더 이상의 주장을 제출하지는 못했다. 당연히 이 분들은 구속되지 않았다. 이 검사와의 악연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한진중공업 해고자 중 재물손괴 혐의로 영장청구된 2명에 대한 재판… 경찰국가 운운의 내 주장을 기가 막히다는 듯이 들으며 나를 노려보는 검사가 눈에 들어왔었다. 법정을 나오면서 이 검사가 나를 존경한단다. 속으로 웃기고 있네라고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나와 같은 노씨 성이었다. 기각되었다. ‘비정규직없는 세상만들기’ 카페 운영자에 대한 실질심사에서는 검찰이 주장하는 공공성이란게 도대체 이 나라에 있느냐고 앂어댔다. 가서 강도나 잡으라고 하자 판사가 제지하기에 이르렀다. 기각 …이 검새 열 좀 받았을 거 같다.
2차 희망 버스는 직접 참가했다. 나는 조금은 걱정도 되었지만 오랜 만에 일상의 묵은 때와 나태한 정신에 파격을 주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중앙로를 걸어갈 때는 오랜만의 해방감 마저도 느껴졌다. 20년이 지난 아스팔트 위의 기억들도 되살아났다. 도시의 모든 공간이 돈 버는 공간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이렇게 인간다움을 쟁취하기위해 도로 위를 행진하는 것은 이 공간들을 정화하는 행위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도 막지 않는 도로위의 자유는 이내 심각한 대치로 이어졌고 , 옆에 있던 권영국 변호사가 앞에서 밀어보자고 하여 같이 따라갔다가 어마어마한 물대포와 최루액의 위력을 접하게 되었다. 정신을 못차리고 거의 기다시피 도망오다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옆을 흘낏 봤더니 경찰검거조가 바로 옆에서 다른 참가자를 검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냅다 튀었다. 이 번에는 내가 영장실질심사를 당할 뻔 했다.
3차 희망버스 행사 날…
영도대교를 막을 거 같아 일찍 출발했다. 활동량이 많아 등산복이 적당할 거 같아 등산복을 입고 건너는데 동네 아저씨로 보였는지 검문하던 경찰도 별 말이 없었다. 나중에 서울에서 온 변호사 분이 서울에서는 등산복이 시위복으로 통한다는 말을 듣고 둘이서 킥킥대며 신나게 웃었다. 한진중공업 정문 앞의 신도브래뉴 아파트 도로에서 미사, 법회에 참가했다. 왠 할아버지 한 명이 온갖 시비를 해대어 순간 열받을 뻔 했으나 어찌어찌 옆에서 말리고 하여 다행스럽게도 큰 마찰은 없었다. 성격 죽여야지…경찰은 아예 통행 자체를 할 수 없도록 앞 보도와 횡단보도를 막고 있었다. 실랑이가 있었다. 온갖 법적 주장들이 서로 오고갔다. 심지어 공정력 운운의 주장도 하더라. 무식하기만한 경찰인 줄 알았더니 요즈음은 이론 무장도 꽤 하는 모양이다. 이론적 순발력이 필요하다. ㅎㅎ
청학성당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서 85호크레인에 손을 흔들자 저쪽에서 실루엣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수변공원 앞에서 연좌 했다. 평소 잘 만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 단체에서 일하는 분들, 서울에 있어 자주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났다. 서울에서 내려온 변호사분들과 퍼질러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참가자 5명 정도가 골목을 통해 오려다가 경찰1개 중대에 체포되었단다. 골목 입구에 도달하니 전경 두명이 정찰조로 나와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려니 막아선다. 뛰어들어가니 전경 한 뭉텅이가 있다. 여기 누가 체포되었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없다. 여러 변호사들과 함께 변호사등록증을 내밀어도 마찬가지다. 피의자 접견 운운은 우습다는 눈치다. 실랑이가 이어졌다. 방패를 밀면서 경찰 대오 안으로 밀고 들어가려했으나 방패에 막혔다. 집회장에서 사람들을 데려오려고 몇몇이 다시 수변 공원쪽으로 가자 이 눈치를 챈 경찰들이 드디어 협상을 요청했고 무사히 풀려났다. 새벽이 되어 체포된 사람들을 만나러 경찰서로 갔다. 그 분들을 만나면서 나의 20대가 오버랩됐다.
희망버스는 나에게 희망을 품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했던 조금은 불안했지만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조금이라도 있어 더더욱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