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의 이별연습
글_ 정연순 민변 사무총장
이달로 친정어머니가 병원에 들어가신 지 만 2년이 넘었다.
가난한 살림에 평생 고생만 하셨던 어머니는 그나마 이제 좀 편해지는가 했던 70대가 되어서 찾아온, 늘그막을 괴롭히는 통증으로 허리를 펴지 못하시고, 고통 속에 지내야 했다. 3년 전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1년은 그래도 마음을 편히 가질 정도는 되었는데, 거기서 조금 더 욕심을 냈던 것이 큰 화근을 불러일으킬 줄이야 정녕 아무도 몰랐다.
2년 전 이맘 때 그 참을성 좋은 분이 통증이 너무 심해 견디다 못해 막내인 내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하였다. 한시도 참기 어렵다는 말씀에 놀란 형제들은 척추 전문 병원에 모시고 갔는데, 척추협착증이라는, 눌린 신경만 풀어드리면 끝이라는 의사의 말에 덜컥 다음날 수술을 시도했던 것이 큰 불효로 이어졌다.
수술은 성공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좋았던 시간은 퇴원 후 집으로 돌아와 요양하던 일주일뿐이었다. 수술주위가 채 아물지 않았던 것을 의사도 몰랐다. 고름이 터져 흘러나올 때에서야 응급실로 실려가 재수술, 이어진 항생제 투여과정에서 신장이 항생제의 독성을 이기지 못하고 망가졌다. 수술 부위는 겨우 아물었지만, 신장투석과 부종으로 생사를 넘나들었다. 의사는 신장을 살리지 못한다고 했다. 그랬던 신장이 6개월 만에 기적같이 회복되었으나, 그때는 이미 오랜 투병생활로 인해 걷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다시 재활치료, 결국은 가정형 요양시설로, 그곳에서 여덟 달 가까이를 지내다가 이번에는 치매와 파킨슨 약의 부작용으로 인한 발작 증세를 보이시기 시작했다. 올 3월, 어머니의 발작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을 호소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에 눈물을 터뜨려 보기는 해도 자식은 참으로 못난 것이라 무엇 하나 대신해드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뵙고 올 때만 그럴 뿐, 하루하루 돌아가는 일상은 그마저도 잊게 하는 무서운 힘을 가진 것이었다. 결국 다시 병원으로 옮겨져 약을 끊고 의사의 관찰을 받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의 후유증인지 그 강한 정신력을 가지셨던 분이 치매가 아주 깊어지셨다.
더 많은 것을 잊으시기 전에 어머니와, 엄마와 함께 하고자 4월부터 형제들이 하루씩 찾아 가기로 한다. 나는 일요일 오후 당번이다. 다행히도 일몰 무렵 찾아오는 발작 증세는 거의 없어졌다한다. 그 대신 깊어진 치매에 대해, 의사는 엄마가 아주 천천히 태어날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정신 뿐 아니라 몸조차도 점점 아기의 모습으로 굽어질 것이라 말한다. 처음에는 ‘네가 바쁜데.. ’하던 엄마가 그런 말조차 잊었다.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던 빵을 달라 한다. 어느 한 주제에 집중하면 계속 그 이야기만을 한다. 졸려, 안 졸려, 나 눕고 싶어, 앉고 싶어. 나 저거 태워줘, 소변 보고 싶어, 똥 마려워를 반복하고 끝없이 간병인을 괴롭힌다.
밤에도 안자고 계속 이러시니 병원의 골칫덩이가 되었다. 간호사들이 흉보는 엄마를, 열 번도 좋다 하고 휠체어에 앉혔다 다시 침대로 갔다 다시 화장실로 갔다를 반복한다. 작아지고 굽어진 몸을 문질러주고 긁어드린다. 엄마 옆에 앉아 젓가락으로 반찬을 떠 넣어 드리고 얼마 안남은 이를 닦아드린다. 이제 저녁이다. 헤어져야 한다.
헤어지기 싫어 엄마는 아기처럼 보챈다. 가지 말아, 나 자면 갈 거지. 나 안 자. 보채는 엄마를 달래느라, 어쩔 수 없이, 강수를 쓴다.
‘엄마, 나 돈 벌어 올께’ 하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신다’
아주 오래전,
생활고로 돈을 벌러 나갈 수밖에 없었던 엄마와 헤어지기 싫어 우는 막내에게,
젊은 엄마가 그러셨던 것처럼.
그리고 이마에 깊이, 입맞춤을 해드린다.
귓가에 ‘엄마, 사랑해, 엄마도 나 사랑하지’ 하면
작게 ‘으응’ 하신다.
아기가 되어, 고된 생의 끝자락에서 태어나기 전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엄마와
긴 이별 연습을, 감사하게도, 일주일마다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