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 인터뷰] 진실을 넘어 평화를 외치다 – 해적 아라이 국선 변호인 권혁근 변호사

2011-06-29 254



진실을 넘어 평화를 외치다
– 해적 아라이 국선 변호인 권혁근 변호사 인터뷰

 

인터뷰: 이지연 변호사


정리: 민변 6기 인턴 권미홍


사진: 민변 6기 인턴 유재선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삼호쥬얼리호를 납치한 소말리아 해적들의 생포. 당분간 9시 뉴스의 첫 소식은 청해부대의 작전수행, 석해균 선장의 건강상태, 소말리아 해적들에 관한 이야기로 장식되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의 쟁점은 누가 석선장을 쏘았는가에 있었다. 그 용의자로 지목된 것이 바로 소말리아 해적 마호메드 아라이였다. 석선장의 몸에서 나온 총알 중 2개는 해군의 것으로 밝혀졌고,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1개의 총알이 아라이가 쏜 것이라는 얘기이다. 이러한 언론 보도에 온 국민들이 아라이에 대한 분노를 키워가고 있을 때, 그의 국선 변호인 권혁근 변호사는 혐의를 부인했다. 결국 1심 판결에서는 유죄가 인정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현재 이 사건의 항소심을 준비 중인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민변: 전국민적인 관심을 받았던 사건이라 변호를 맡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사건을 맡게 된 계기가 있나요?



권혁근 변호사 (이하 권): 처음에는 법원에서 지방변호사회에 요청을 해 국선변호를 담당할 변호사들의 신청을 받았는데 신청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방변호사회 집행부에 추천을 의뢰했는데, 저 같은 경우는 지방변호사회 이주법률지원단 단장을 맡고 있고 이주민 노동자와 관련된 사건을 많이 다뤘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차적으로는 외국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추천대상이 되었고.


또, 이 사건에 대해 법원에서 국민참여재판으로 가는 것을 검토했던 것 같은데, 마침 제가 이 재판 담당부에 국민참여재판 국선변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두가지 사정이 맞물리면서 추천되었는데 제가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어서 맡게 되었습니다.



민변: 해적들의 재판을 국내에서 진행할 것인가, 소말리아 본국이나 이웃나라에서 진행할 것인가 말이 많았었습니다. 결국 국내에서 집행하게 되면서, 이번이 ‘국내에서 행해진 첫 해적재판’이 되었죠. 어느 것이든 시작이 어려운 법인데 준비과정과 진행과정 상의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권: 제일 큰 어려움은 아무래도 언어였습니다. 이들이 영어는 전혀 못하고 국내에 소말리아 언어를 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국내에 있는 소말리아 난민과 호주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소말리아 사람이 와서 통역을 담당했습니다. 통역을 두 단계를 거쳐서 진행하다 보니까 피고인과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접견을 두 번 했는데 다른 해적들의 변호사들과 다같이 하루에 함께 가서 3시간씩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통역을 통하다 보니 피고인이 직접 대화할 때보다 마음에 있는 소리를 잘 하지 못했고, 저도 마음껏 물어보지 못했다는 그런 언어상의 제약이 제일 컸고..



그리고 국민참여재판으로 가면서 결국 배심원들의 판단을 받게 되는데, 배심원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일방적으로 알려진 내용을 그대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생각을 깨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저는 사건을 한 번 읽어보고 언론 보도 내용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잘못 알려진 부분에 대해 진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언론을 통해 가지게 된 생각을 굳힌 분들이 많아 재판 과정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민변: 사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한 것이 의외였습니다. 국민들의 정서상 예상되는 결과가 나올 것 같았는데. 그렇게 진행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먼저 법원 쪽에서 국민참여재판으로 가려는 의향이 있지 않았나 합니다. 이를 통해 국민참여재판을 활성화하고 국민들에게 알리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법원의 의향이 그렇다 하더라도 안 할 수 있지만 제가 이 사건을 국민참여재판으로 하려고 했던 이유는, 이 사건의 범행사실이 8가지가 전부 똑같이 5명의 피고인이 공범으로 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개별적인 행위의 차이나 가담 정도를 묻지 않고 전부 공동정범이 되어 있는데, 제 생각으로는 이럴 때 우리나라 법리에서는 공모공동정범을 적용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사건의 일부 범죄에 대해서는 개별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석선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아라이가 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해적들 중 누군가가 총을 쐈다는 사실만 인정되면 공모공동정범으로 책임이 인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반 형사재판에서는 이를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개별적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직업 법관들보다는 일반 배심원들이 이 이론에 대해 비판적일 것이라 생각해서 참여재판을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웃음) 제가 생각했던 의도와는 다르게 진행됐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법률가로서 기록을 통해 사건의 증거에 대한 판단을 했을 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충분히 얘기하면 배심원들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언론은 검찰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뿐이기 때문에… 이전에 참여재판을 해보니 증거조사를 통해 생각이 바뀌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건들과 이 사건이 다른 점은, 다른 사건들은 일단 증거를 보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다가 다른 증거를 보고 생각이 바뀐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증거를 보기도 전에 이미 언론을 통해 생각이 굳어져서 그걸 바꾸기 힘들었습니다. 검찰이 유력한 증거로 제출한 것 중에 하나가 압수한 총의 멜빵에서 DNA를 체취 했더니, 유독 아라이의 DNA만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아라이가 경계하면서 총을 항상 메고 다녔기 때문이지, 그게 총을 쏜 증거는 아닌데 배심원들이 보기엔 유독 아라이의 것이 나왔다는 것이 불리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민변: 재판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권: 짧은 시간 안에 재판을 끝내야 한다는 한계에서 시작했습니다. 증거조사절차도 제한적이었고. 예를 들어, 실질적으로 재판할 수 있는 날짜는 5일이었고, 이 중 증인신문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이틀 정도였습니다. 이틀 동안 신문할 수 있는 증인의 수는 5-6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일반적으로 증거 조사를 하게 되면 피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증언을 하면 증거에 대해 부동의하고 전부 법정으로 불러서 신문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이 사건은 가장 불리한, 핵심적인 증인 6명만 불러서 증인신문이 가능하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는 재판을 하기 바로 직전에 검찰에서 아주 중요한 증거서류를 제출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충분한 증거 조사를 거치지 못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증인신문과 증거에 대해서 5일 동안 증인신문을 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이것도 결과적으로 시간자체가 부족하다보니까 충분히 심리를 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고, 증인이나 증거의 신빙성에 대해 배심원들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결과가 됐습니다.



민변: 현재 아라이의 상태는 어떤가요?



권: 처음 1심 판결 선고 후에는 무기징역을 받고 나서 굉장히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소말리아에서는 1심으로 끝나기 때문에 재판 기회가 다시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근데 구치소에 들어가서 교도관에게 3심 기회가 있다는 설명을 듣고, 또 무기징역이 선고되더라도 20년 복역한 이후에 가석방 기회가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희망을 갖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변: 해적에 대한 이전의 생각은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만나기 전 생각과 직접 만나본 “해적 아라이”의 모습은 어땠나요?



권: 저도 언론에 나온 아라이 사진이나 상황을 볼 때는 굉장히 과격하고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만나보니까 그렇지 않아요. 이 사람들도 결국은 생존, 생계의 수단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나이 또래의 청년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말이나 행동을 봐도 해적 행위에 대한 심각성을 우리가 느끼는 중대한 범죄로서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냥 납치하면 그것으로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돈을 받게 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민변: 해적 행위를 하면서 인명피해는 피하지 못할텐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생계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요?



권: 사실 해적들이 위협은 굉장히 많이 가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고, 실제로 죽이려고 한 적도 없습니다. 선원들이 다치게 된 것은 우리 해군이 접근했을 때 그들에게 총을 쏴서 다치게 된 건데. 그 과정도 보면 해군이 접근할 때 그 자체가 자기들은 해군들이 항복하려고 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해적들은 선원들을 윙브릿지에 내보내서 다가오지 말라고 손을 흔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해군들은 항복한다는 의미에서 손을 흔들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건 선원들의 증언과 해군들의 증언을 보면 차이가 나는 점입니다. 오지 말라고 했는데 오니까 해적들이 위협을 느끼게 된 것이고 (해군들에게) 총도 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헬기가 해적들을 위협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해군들도 처음에는 위협사격만 합니다. 우리 선원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으니까. 해적들도 거기에 막 총을 쏘긴 하는데 맞추지는 않아요. 결국 서로 위협만 했던 상태이지, 서로 살상을 하려는 모습은 안 보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그렇게 되긴 했지만… 어쨌든 해적들은 선원들을 어떻게든 살려서 포로로 데려가서 돈을 받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들은 살상 계획은 없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민변: 아라이가 석선장에서 총을 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면, 그럼 누가 쐈다고 생각하나요?



권: 증거부터 우선 말씀 드리자면, 6군데 총상이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 2개는 해군의 것, 1개는 해적 총탄의 파편입니다. 탄알이 아니라 탄피의 파편. 그게 유일한 총알인 것 같다고 하는데 오른쪽 둔부 쪽에 한 개 있는데 어떻게 박히게 됐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직접 가격했다면 그런 식이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석선장에게 총격을 가했다고 볼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누군가가 쏜 총탄이 어떤 경위에 의해서 박히게 됐다는 정도이지.



그리고 당시 상황에 비추어 아라이의 행적을 보면, 아라이가 총을 쏜 이후에 바로 조타실이 있던 아래층으로 도망가서 총을 버리고 선실에 들어가 숨어 있습니다. 총을 버리고 숨어있었다는 것은 생포되기만을 바라고 들어간 것이죠. 그런데 총을 쏘고 나서 잡히면 문제가 될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과연 그랬을까요.



석선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진압 초기에 캡틴이라고 부르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부른 이유는 인간 방패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런것 같다고 합니다. 윙브릿지로 나가려고 했다는 것이고 그 뒤에는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다고 합니다. 총을 쏘기 직전에 자기를 찾아 다녔다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고. 석선장은 총격 당시 상황에서 아라이의 말과 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총소리가 아무리 시끄럽고 그랬더라도 증인이 하는 이야기와는 너무 다릅니다. 증인의 말은 석선장 옆에 있던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선장이 아닌 걸 보고는 그냥 두었고, 옆에 있던 석선장을 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진행됐다면 이걸 모를 수가 없죠.



그리고 석선장은 엎드려 있는 상황에서 총을 맞았다고 하는데, 증인의 증언을 들어보면 아라이가 총을 쏜 각도는 위에서 30도 정도입니다. 그런데 석선장의 총상은 모두 복부에 있습니다. 복부 전면에서 등쪽으로 관통했다는 흔적도 있구요. 위에서 쏘면 이렇게 될 수가 없겠죠. 그런 증거에 비추어 보더라도 아라이가 쏜 것이라고 보기 어렵죠.



민변: 그렇다면 이 사건을 맡으면서 ‘해적을 변호한다’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신념 사이의 갈등이나 이런 것은 없었나요?



권: 만약 기록을 보고도 아라이가 쐈다고 생각이 됐으면 그런 부분들에 대한 갈등은 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핵심적 공소사실에 대해 아라이가 말한 것과 기록을 보면서 느낀 것이 일치했기 때문에 그런 갈등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라이가 쐈다는 사실이 인정되지 않았더라도 해적 행위에 대한 처벌만으로도 중형이 예상됐기 때문에 일정 형량이 주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아라이가 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서도 증거나 사실 없이 인정되면 너무 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변: 사실 인터넷을 보면, 변호사님이 변호를 해야 된다는 의무 때문에 유죄라고 생각하더라도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심하면 매국노 취급도… 그러한 부정적인 여론에 대해 부담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



권: 인터넷 잘 안 봅니다. (웃음) 사실 재판하고 나오면서 방청하신 분들과 같이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어서 좀 충격적이었는데 그분들은 사형 선고를 안 했다는 것이 분노하시더고요. 그러면 우리가 평생 입혀주고 먹여줘야 하는 거냐고 하셨는데… 언론의 힘이 참 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흑인, 해적이라는 선입견이 겹쳐져서 더욱더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변: 이 사건을 통해 개인적으로 느낀 점이 있다면.



권: 사실 저는 이 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아라이가 무죄를 주장하는 부분에 대해서 무죄를 밝히는 것이 첫째 목표였지만, 이 과정을 통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두 가지 더 있습니다.



먼저, 해적들에 대해 이번에 청해부대를 파견해서 진압을 시도했는데, 예방활동은 물론 필요하지만 과연 이런 진압작전이 타당한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엔 운이 좋아서 다행히 사상자가 없었지만, 이번 작전의 무모함을 보면 사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군인은 기본적으로 적을 사상하고 내가 사는 것을 기본 생각으로 작전에 임하기 때문에 어떤 희생을 치르는지에 대한 고려가 별로 없습니다. 이런 진압 작전들에 대한 무모함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서 향후 이런 작전이 또 있게 된다면 안전수칙이라든지, 우리 선원들뿐만 아니라 해적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작전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보다 세밀한 계획에 따라 작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했습니다.



또 하나는, 군대를 파견해서 무력으로 진압하는 방식으로 해적을 소탕하고, 이들을 잡아와서 중형이나 극형을 선고하는 위압효과보다는 소말리아에서 해적들이 생겨나는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해적 행위의 대가의 90퍼센트가 윗선으로 가고 이 사람들은 최소한의 돈을 받습니다. 즉, 최소한의 돈을 위해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한 유혹에서 이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예를 들면 이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고용허가제 방식으로 와서 일한다거나 이주노동자로 와서 일하는 식으로 교육받을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한다든지 등…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근절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게 좋지 않겠나. 청해 부대를 유지할 비용이면, 이런 것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혹시라도 해적 행위가 이루어졌을 때에도 좀 더 우호적이고 덜 위협적인 행동이 나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첫 번째 목표인 무죄로 만드는 게 실패하니까 이런 것들도 안 되고 (웃음).


재판에서도 사실 모두진술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했었는데 첫날에는 언론의 기자들도 많이 왔기 때문에, 이걸 들었다면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주길 바랬는데 그런 건 전혀 없이 아라이가 무죄를 주장한다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그래서 아쉬웠고 앞으로의 진행 재판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민변: 앞으로의 상황은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 예측 하시는지.



권: 참고로 저는 항소심 변호사로 선임은 되어 있는데, 제가 7월 달에 미국에 가기 때문에
최성주 변호사님(민변 부산지부 회장)이 맡아서 항소심을 계속 하게 되실 겁니다. 사실 이 재판이 진짜 제대로 되려면 항소심에 가서 그 상황에 대한 감정을 신청할 필요도 있는데,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아서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민변: 재판 이후의 상황을 어떻게 될까요.



권: 대개는 법원에서도 일정기간 복역하게 한 다음에 추방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본인들은 한국에 있고 싶어하고, 심지어 법정에서도 가족들을 데리고 올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살기 어려우니까.



민변: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주노동자를 위한 일도 많이 하시고, 그런 부분에 관심을 갖고 계신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민변에 가입하게 된 이유나 계기가 궁금합니다.



권: 사실 제가 민변 활동을 성실하게 하지 못해서 사실 어려운 질문인데.(^^;) 처음 계기는 사무실에 있는 분들이 민변을 활발하게 하시는 분들이라 그분들 권유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민변 활동이 제가 처음 가입할 때만 하더라도 운동권 학생들의 변론이나 그런 걸 많이 했습니다. 저도 386세대인데 그 당시에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 못했었습니다. 그에 대한 마음의 빚 같은 것을 민변을 통해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웃음)



민변: 사실 민변 지부 회원분들 중 처음으로 인터뷰를 하는 것입니다. 부산지부는 어떤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권혁근 변호사는 법무법인 부산 소속으로, 민변 부산지부 회원이다)



권: 쟁쟁하신 분들이 많긴 한데. 사실 지금은 종전 1세대, 즉 독재타도,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뜻을 같이 했던 분들의 동일한 목적의식이 실제로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조금 옅어지지 않았나. 그러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하는데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습니다. 제가 가입하고 나서 저보다 뒤에 들어온 변호사가 6년 뒤에 가입하기도 했고. 그리고 부산에서는 변호사 자체가 많이 늘어나지 않고, 젊은 변호사들이 적고, 민변 활동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변호사들은 더 적고. 상당기간 정체성을 찾기 위한 과정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이나 환경문제, 시민참여연대 활동들에 개별적으로 변호사들이 참여해서 활동하는 형태입니다. 민변 변호사들이 변호사로서 주력하는 사업은 법률구조 사업.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에 많이 소속되어 인권위에서 법률구조 사업을 할 때 민변 변호사들이 주도적으로 하는 형태입니다.



민변: 마지막으로, 권혁근에게 민변이란?



권: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할까. 강하게 느낀 것이 노대통령 돌아가셨을 때. 그때 정말 제가 느끼는 분노와 제가 보는 시각을 공유할 수 있는 변호사들이 전국적으로 많이 있다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조직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유지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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