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인권모니터링]
‘우리’들의 힘으로 ‘국제연대’를!
글_국제연대위원회 6기 인턴 김다운
1. 계속 진행 중인 노동자들의 이야기
아시아인권모니터링 공간을 통해, 한진 중공업 영도조선소 노동자들의 파업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를 실었다.(http://minbyun.org/blog/i#_post_632) 지난 4월, 민변 노동위원회 권영국 변호사님, 전명훈 간사님, 그리고 인턴들이 함께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 중인 한진 중공업 노동자분들을 지지하는 의미로 농성장 방문을 하고 온 후였다. 한진 중공업 노동자들은 회사의 일방적인 정리해고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해왔고, 그 과정에서, 부산 영도조선소 대신, 수주를 받고 있는 필리핀 수빅조선소의 노동자들과 연대하기도 했다. (수빅조선소는, 한진 중공업이 필리핀 수빅만에 건설한 조선소이다.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와 수빅조선소로 수주물량을 돌린 배경 등에 대한 자세한 기사http://bit/ly/ieXMda) 필리핀 수빅조선소에서는 ‘다단계 하도급‘구조로 인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인권침해를 당하고, 심지어 산재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는 등의 문제가 심각하다고 알려졌다. 즉, 부산 영도조선소에서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회사 측으로부터 일방적인 대규모 정리해고를 통보받은 것이고, 필리핀 수빅조선소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인하여 업무에 관한 교육, 관리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인권 침해 및 산재를 겪고 있는 것이다. 국내의 노동자들이나, 외국 노동자들이나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사회적 살인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정리해고철회를 요구하는 영도조선소 노동자들은 필리핀 수빅조선소에서의 노동자 인권침해를 규탄하며 그들과 공동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부산 영도조선소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 되었다. 특히, 부산 영도조선소 타워크레인 85호에 홀로 올라 6개월이 넘게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김진숙 위원(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의 이야기는 소셜 미디어 트위터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한겨레, 경향 등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2. 트위터를 통해 세상에 알리다.
180일이 넘게 고공농성을 해 온 김진숙 씨가 올라가 있는 85호 크레인은 2003년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의 조합원이자 지회장이었던 41세의 김주익 씨가 올랐던 곳이다. 회사를 상대로 부당한 구조조정 철회와 노동조합에 대한 손배가압류 철회를 요구하며 그는 35미터 고공에서 129일을 싸웠고, 결국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그리고 8년이 지나서도, 똑같이,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또 한명의 노동자가 그 크레인위로 오르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고공농성에는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모였다. 김진숙 씨는 트위터를 통해 활발하게 자신의 고공농성 상황에 대하여 알리고, 온라인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싸워나갔다. 그 과정에서 놀라운 연대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트위터를 통해 한진 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이야기를 알게 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 영도조선소로 향한 것이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 주부, 아이들, 학생, 시인, 정치인, 배우 등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는 노동자를 위하여 모인, 실로 놀라운 만남이었다. 이러한 자발적인 시민들의 연대는 국내연대로 그치지 않았다. 트위터를 통해 몇몇 개인들은 한진 중공업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외국어로 번역하여 적극적으로 외신에 알렸다. 그것이 성과를 맺어,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에 한진과 김진숙 씨의 이야기가 특집기사로 실리기도 했고, CNN, 알자지라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 트위터라는 소셜미디어, 외국어, 그리고 그 소식을 알리고자 하는 개인들의 노력과 정성이 모여 한국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대한 국제적 관심과 연대를 호소한 것이다. 이들이 싹트게 한 국제연대야 말로 더 넓은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 이 연대는 크레인 위의 김진숙 한 사람에 대한 지지가 아니며, 한진 중공업 노동자들에 대한 지지만이 아니다. 필리핀 수빅 조선소의 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환경과 부당한 인권침해를 알릴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으며, 국내외 시민들이 노동자들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자본의 불합리한 모습을 목격하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광경은, 국제연대의 주체는 관심과 의지가 있는 개인들로부터 언제든지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시작은 개인에게서 비롯되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면서 더 큰 집단의 움직임과 연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도 볼 수 있다.
출처: 다음까페_비정규직없는 세상만들기,
3. 인권을 짓밟는 힘에 대한 감시, 누가, 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시아인권모니터링이라는 공간에서 두 번이나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마음이 아프다. ‘아시아 인권모니터링’이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부터가 조심스럽다. 인권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이토록 인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까. 인권이라는 것은 순수하고 보편적인 바탕위에 누구나 당연하게 그 권리를 안고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혹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당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인권은 뺏기고 박탈당하고 너무나 쉽게 무시되기에, 그런 부당한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것이 ‘인권에 대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 사실 ‘물음’자체에, 그 물음을 표현해내는 언어 자체에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난다. 누군가는 왜 그토록 비참한 삶을 살면서 최소한의 권리도 제대로 누리지 못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현실에 불만인 자들이 사회에 대하여 가지는 반(反)감으로 들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에 대해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누구나가 평등해질 수 있는 그런 환상은 버려’라는 냉소를 뚫고, 그 냉소가 가리고 있는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부당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평등해지는 사회에 ‘도달’하기 위한 상상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미래의 평등을 어떤 종착역으로써 상상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현재의 불평등과 부당을 고발함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현재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또한 현실의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현상들 속에 더 강하게 뿌리박고 있는 본질을 직시하고자 한다.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는 부산 영도조선소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다른 직업을 구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필리핀 수빅조선소 노동자들이 다단계하도급 구조 속에서 최저임금을 겨우 받으며 안전교육도 받지 못한 채 산재를 겪고 인권침해를 겪는 것이 과연 그들과 우리가 침묵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일까. 철거민들은 대형 건설사의 재개발 사업을 위해 몇 십년간 일한 그들의 일터를 하루아침에 적은 보상금을 받고(혹은 보상금도 받지 못한 채) 잃어야 하는가. 무시무시하게 높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시급을 받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들은 당연히 그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일까. 청소노동자들은 쉬는 시간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낮은 임금으로 일해야 하는 것일까. 이주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 인종적 차별을 감수해야만 하는 사람들일까.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사랑을 당당하게 공개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결국 인권은, 우리 사회에서 법, 제도, 사람들의 인식, 그리고 무의식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편견과 습관이 차별하고 억압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물음이다. 왜 그들은 그토록 차별받고 억압받아야 하는지. 이제, 물음을 시작하면서 ‘누구나가 평등해질 수 있는 환상’이라는 냉소에 대해 이렇게 대답해주도록 하자.
‘평등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출발점이다. 모든 정황 속에서 유지해야 할 하나의 가정이다.’(최정우, 『사유의 악보』중)
4. 지금,
2011년 6월 27일. 부산지법은 영도조선소 공장을 점거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강제 퇴거시키라는 강제집행 결정을 내리고 집행관들은 강제집행을 단행했다. 저항하던 노동자들은 강제로 연행되고, 몇몇 노동자들은 크레인에 자신들의 몸을 묶어 농성을 계속할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몇 시간 동안이나 전기가 차단된 채, 크레인 위에 김진숙 씨가 있다. 용역, 집행관들이 물리적 폭력을 사용해가며 노동자들을 끌어낼 때, 정리해고 철회를 위해 오랜 시간 힘겹게 싸워 온 노동자들이 크레인에 자신의 몸을 묶을 때, 과연 누가 ‘강성’이고 누가 폭력적인지 묻고 싶다.
힘든 싸움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준 사람들의 연대는 역사적이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희망버스를 타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지지해주었고, 트위터를 통해 국제적 관심을 호소하며 외신과 해외사이트에 이 이야기들을 알리며 국제연대의 다리역할을 자임했다. 한진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필리핀 수빅조선소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어느 특수한 집단의 특수한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희망 버스를 타고 그들을 지지하기 위해 함께 힘을 모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이 ‘특수한’ 일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알더라도 그저 하나의 뉴스 정도로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특수한 일들이 결코 특수한 사건에만 지나지 않음을 이미 많은 사람들은 느끼고 있는 듯 보인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이 사회에서, 이미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싸움과 죽음들을 보고 있다. 용산의 철거민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 배달노동자들의 죽음, 등록금, 법인화 문제로 인한 학생들의 싸움, 철거민들의 싸움들을 말이다. 더군다나 각각의 갈등들이 각 집단들의 특수이익을 위한 싸움과 죽음이 아니고, 더 큰 구조적 원인으로 인하여 연쇄 고리를 지니고 있을 때, 우리는 이 갈등들이 단지 특수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아님을 목도하게 된다. 되풀이되는 (그것도 희생자는 일방적인)싸움과 죽음이 만연한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물음을 품고 살아야 하는 지 고민할 때,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의 끈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희망버스’를 타고 한마음을 품었을 때, 르몽드, cnn, 알자지라에 우리의 이야기들을 알리고, 다른 언어, 다른 문화를 지닌 사람들도 우리들의 이야기를 접하고 공감의 목소리를 내었을 때, 그 안에서 ‘인권’ 과 ‘사랑’을 오롯이 느낄 수 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