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랑 고시랑] 오랜 연애, 그 밋밋하고 지루한 이야기… 그리고…….

2011-05-17 167

[고시랑 고시랑]


오랜 연애, 그 밋밋하고 지루한 이야기… 그리고…….


 

글_이재정 변호사



내 친구 이야기다.




대학 시절 선후배로 만나 십 수 년 연애 끝에 결혼한 이들이 있다. 두 사람은 1994년 신입생환영식에서 만났다. 새내기 중에 제일 예뻤던 그녀는 학생회 간부였던 그와 연애를 시작했다. 세련된 그녀가 철지난 옷 같던 학생운동을 시작했던 것도 연애 때문이었다. 90년대 학번 중에서 유일하게 피 쏟아지던 현장을 기억하는 91학번. 바로 그의 학번이었다. 군대 가는 선배 뒷모습에 세상 무너진 듯 눈물을 쏟아내고, 휴가 나온 그이를 보러 한껏 멋 내고도 몇 번을 다시 확인하던 그녀. 복학생이 되어 돌아온 그 선배는 더 이상 학생회 방을 드나들지 않았다. 대신 그녀와 함께 새벽 공기 가르며 도서관 자리잡아주며 남은 학기를 보냈다. IMF 구제금융시대, 사지에 쫓겨 가듯 서러운 졸업장 떠안을 때도 그래도 함께여서 견뎠으리라. 신림동 고시촌 어느 라면 집 오래된 텔레비전, 그 안에서 들리는 카운트다운으로 밀레니엄 새 시대를 마주하던 바로 그 순간도, 낡은 소매 깃이나마 마주하고 있음에 안도했다.





효순이 미선이가 아프게 우리 곁을 떠나던 해, 그는 치열한 시장으로 나가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그의 도움으로 그녀가 월드컵 함성도 모른 척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긴긴 터널 안에서 꾸역꾸역 이어온 관계는 사랑이라는 말의, 그 따뜻한 볕도 잊어버렸다. 설레고 간절하던 1994년의 그 감정은 이젠, 있었는지조차 분명치 않다.






이젠 내 이야기다.






1994년, 참 애매한 시간이다. 최루탄 냄새가 더 이상 누구나 겪는 경험이 아니던 그 때, 새내기가 되었다. 대신, 술 취한 선배들의, 강경대 열사로 시작된 그 싸움터에서 사라져간 여러 동지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른하게 최루 내를 느꼈다. 누구의 기억인지도 모른 채 그 몽롱한 감정으로 나는 그것들과 연애를 시작한다. 시작했으니 늘 함께여야지. 함께이니까 행복에 겨워야지. 그런 당연한 것들로 채워지던 시간도 잠시.






언제나 답을 알려줄 것 같았던 선배들이 하나 둘 군대로, 고시 반으로 사라졌다. 썰렁한 학생회 방에 줄 끊어진 기타만 가끔 위안이 되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덩그러니 졸업장만 받고 보니 IMF 구제금융시대란다. 서러운 그 시대는 오히려 위안이었다. 토플, 토익 모르고 살던 내게 그만한 핑계가 없다.






법학 책들 안에서 맞이한 2000년 새 시대, 밀레니엄 그 요란함이 주는 소외는 독서실 한 귀퉁이의 나를 더욱 열중하게 했고, 월드컵 16강, 8강, 4강 소식이야 말로 경쟁자들을 피말리는 아군이 되었다.






대학시절 아련한 그 연애의 기억을 추억으로라도 들출라 치면, 효순이, 미선이를 모른 척 했던 순간이 떠올라, 오늘이 불편했다. 그렇게 사법연수원에 들어갔다.





아직도 우리는 연애중입니다.








2008년 청계광장에서 그들을 다시 만났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의 그녀가 그를 꼭 뺀 딸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그렇게 다시 나타났다. 시위용 손 팻말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아가 입에서 종잇조각을 빼준 건 나였다. 부부는 광장이 고팠고 사람이 그리웠던지 한껏 들떠 그저 바쁘다. 그 때 그 광장의 모든 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다시 만난 당신이, 그리고 내가 벅찼다.





있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했는데.



다시, 설레며 손잡던 그 날이 생생해졌다.



내 손을 잡던 그가 아니라 그의 손을 잡던 내 감정이 고스란히 다시 떠올랐다.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거다.





지금 그녀는 내 친구다.




어떤 소셜네트워크 사이트에서 정해주는 이름으로 ‘친구’다.



그렇게 친구로 그녀 이야기를 매일 듣는다. (물론 전에도 그녀를 웹에서 본 적이 있었지만 좀 다르다. 미니홈피라는 공간에 아가사진, 새로 산 구두, 어제 저녁 외식한 맛깔난 음식사진으로 자주 소식을 전하곤 했다)




‘얼친’이라는 타이틀로 그녀는 연애 중이다. 오늘 우리 삶을 감각하고 전하면 수많은 그(그녀)가 반응하고, 그 반응에 다시 그녀가 설렌다.








그녀가 부쩍 예뻐졌다.



삶이 생존이 아니라, 생명이라는 것.



사랑이 고립이 아니라 광장이라는 그 빤한 진실을 좀 늦게 알고 나니 늦게 배운 도둑질로 그녀도 나도 바쁘다.



.



그렇게… 아직도…



우리는 연애중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재정 변호사 – 처음 신입회원이던 때부터 민변을 놀이터 삼아 드나들며 간사님들 점심 도시락까지 동냥하다가, 지금은 사무차장으로 사무처에 함께하고 있는 회원이다. 언론위원회와 국제연대위원회 활동. 현재 출판홍보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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