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인권모니터링] 삶도 사랑도 사람도 흑백이 아니라 무지개색이다.

2011-05-17 237

[아시아인권모니터링]


삶도 사랑도 사람도 흑백이 아니라 .


   


글_국제연대위원회 인턴 김다운 


1. 배제되는 것들에 대하여


  지난 3월 31일, 동성 간의 합의에 의한 사적 성적 접촉에 대해 처벌을 규정하고 있는 군형법 제92조에 대한 합헌 결정이 있었다. 군형법 제92조는 “계간 기타 추행을 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라고 적시하고 있다. 계간(닭의 성교)이란 용어는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성폭력을 처벌하는 다른 법에서 ‘강제 추행’을 규율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성폭력이 아닌 성적 접촉만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명확성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성적자기결정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적 법률임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는 군형법 제92조에 대해 8년 만에 다시 합헌 결정을 내린 것이다. 반면, 최근 미국에서의 DADT 정책 폐지는 군대 내에서 동성애자의 군복무를 인정한 것으로써 소수자의 권리를 위한 진일보한 결정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DADT)’라는 정책은, 군대 내에서 군인이 아웃팅을 당하거나 커밍아웃을 했을 때, 강제전역을 당해야만 했던 차별적 정책이었다.


 


 


사진출처:뉴시스


  언뜻 보기에, ‘군대’라는 공간에서 동성애자의 권리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은 문제처럼 보인다. 군 형법 제92조에 대한 변론에서 국방부 측 변호인과 법무관은 “동성애 성행위의 비정상성과 위헌 결정이 내려질 경우 군의 전투력 저하가 우려된다.”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동성애의 성행위의 비정상성‘이라는 인식은 이성애만이 ’정상‘이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기준에 근거하고 있는 억압적, 차별적 발상이다. 더군다나, 동성애 성행위의 금지에 위헌 결정이 내려질 경우 군의 전투력 저하가 우려된다는 주장은 사실적 근거에 기초한 것이기 보다는, 동성애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군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 환상에 의해 동성애 문제를 바라보면, 위계적인 질서와 규율을 바탕으로 상부의 지휘, 명령을 일사분란하게 수행하는 군대 문화 속에서, 다양성은 인정되어서는 안 되는 ‘장애’이다. 마치 군대 내의 일원이, 군대가 지향하는 통념상의 ‘남성적’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은 전투력의 상실이자 아군을 묶어주는 동일성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군 지휘부는 ‘적’의 존재에 대항하여 ‘폭력’과 ‘전투력’으로 무장해야 하는 군대조직에서 ‘성별적’ 일체성을 극도로 강조하고, 통념상의 남성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에게는 엄청난 차별과 억압을 가한다.


  하지만, “군복무와 동성애의 문제”에 군대가 동성애자에게 불합리한 차별과 억압을 가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연관성이 있다고 보는 시각 자체가 동성애에 대한 편견의 결과일 수 있다. 사실, 군대는 모든 개인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며 모두에게 일사 분란한 동일성과 일체감을 요구, 명령한다. 개인마다 자신의 성향과 가치관은 다양하지만, ‘군대’는 (국가안보라는)조직의 특수한 목표를 이유로 그 개인들의 다양성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즉, 군대 내 개인들은 그가 동성애자건, 이성애자건, 양성애자건 군 조직, 국가로부터 오는 억압과 폭력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다. 만일, 군대가 특별히 ‘동성애자’를 차별적으로 더욱 억압한다면, 그것은 군대 내 개인들에게 군대가 바라는 통념적 ‘남성성’을 강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이자 ‘남성주의’의 환상이다. 이러한 환상과 이데올로기는,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여성, 장애인 등과 같은 존재들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조직을 유지시키고, 조직문화를 지탱하는 규율은 동일성의 억압을 통해 차별을 조장하기 쉽다. 군복무에서 애초에 배제되는 장애인과 여성은 군대조직과 군대문화에서는 열등하게 간주될 수 있다. 종교나 신념의 이유로 군복무를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군을 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범죄자가 되어야만 한다. 군 내부에 있는 동성애자들은, 그들이 ‘남성을 좋아한다’는 이유, 혹은 (군대가 원하는 기준에서) ‘남성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인해, 군대 내 전투적인 남성들 간의 연대를 흐리는 이질적 존재로 간주되기도 한다. 군대 내 동성애자들에 대한 규율이나 지침에서, 그들을 ‘변화’, ‘개선’ ‘격리’시켜야 할 정신적, 심리적 치료대상으로 보는 시각은 군대조직이 얼마나 군대조직 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지를 알 수 있다. 군대뿐만이 아니라, 교도소와 같은 구금시설 내에서도 인권, 특히 소수자에 대한 권리에 둔감하여 발생하는 차별적 문제들이 많다. 교도소에서 한 수용자가 자신의 성적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 모욕당하고 있다는 좌절감과 수치심에 자신의 성기를 절단한 사건은 구금 시설의 인권문제에 대한 편협성과 둔감함을 드러내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기존의 지배이데올로기에 익숙한 사고방식과 언어는 그들의 기준에 포섭되지 않는 존재들에 대해 무심하거나 반(反)감을 가진다. 더군다나, 군대, 교도소 등의 특수조직에서 가지고 있는 ‘기준’ ‘지침’은 규율하는 자와 규율 받는 자의 권력의 차이로 인해, 규율 받는 자의 인권은 사각지대에 놓이기 쉽다. 지배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조직의 규율 속에서 언제까지 개인들, 소수자들의 차이는 인정되지 않고 단순하게 억압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2. “사회적 통념에 의하여”

  사실, 군대나 교도소와 같은 특수한 조직에서만이 개인들, 소수자들의 차이를 억압하는 파시즘적 규율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성별, 나이, 외모, 학벌, 직업, 종교, 경제적 능력, 성적 취향, 인종, 언어, 문화 등등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수없이 많은 부분에서부터 파시즘적 규율과 잣대는 작동한다. ‘사회적 통념’이라는 강력한 문화적, 사회적 규율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실제로는 차별적이고 억압적일 수 있는 규율과 정서에 대해서 그것들이 ‘정상적이고’ ‘상식적이고’ ‘일반적이고’ ‘표준적인’ 것이라 쉽게 판단한다.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통념’상 결혼은 ‘남성과 여성간의 정신적, 육체적 결합‘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는 결혼식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본다면, 검은 양복을 입은 신랑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떠올리지 않는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성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성만을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결혼할 수 있는 사람들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사회적 통념은 결혼을 흑백만큼이나 이분적인 남녀의 틀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혼인제도가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배경과 우리 헌법 및 민법이 예정하고 있는 혼인제도를 감안하면 혼인의 당사자는 남녀 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고, 비록 혼인제도의 의미가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고 시대의 윤리나 도덕관념에 따라 변화할 수는 있으나 현재 우리 사회의 혼인 및 가족 관념에 의하면 혼인이라 함은 일부일처제를 전제로 하는 남녀의 정신적, 육체적 결합을 의미하고, 아직 그 의미에 있어서 변화를 찾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중략) 동성간에 사실혼 유사의 동거관계를 유지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의사를 부부로서의 공동생활을 영위할 의사였다고 보기 어렵고, 또한 이러한 동거관계는 객관적으로 부부공동생활을 인정할 만한 혼인생활의 실체가 있었다고 보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회관념상 가족질서적인 면에서도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여서……“ 


-2004년 법원의 동성 파트너 관계의 부당한 파기에 대한 재산분할 및 위자료 청구 기각 판결문 중


 


  하지만, 사랑은 흑백의 이분으로 단정 지을 수도 없듯이 남녀만의 것이 아니다. 성별, 국적, 나이 등에 구애받지 않는 사랑 등 다양한 모습의 사랑이 존재한다. 사회적 통념은 어떤 특정한 형태의 사랑만을 제대로 된 사랑으로 규정해놓고 사람들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그것을 강요한다. 규율과 통제 없이 사회적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으름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순응하게 만들고 때로는 사회적 질서가 무너질 때의 혼란으로 공포를 심어주기도 한다. 남녀간의 결합만이 자연스럽고 이상적인 것이며, 사회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신봉하고, 동성애자들은 곧 에이즈와 같은 질병을 일으키는 혐오대상으로 간주하여 사회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들로 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역사적으로 인간이 노예제와 같은 과거의 억압적 상태에서 한 걸음 나아갔을 때, 그것은 사회적 질서와 사회적 통념으로 묶여 있던 굴레에서 용기 있게 뛰쳐나온 이들이 있었을 때였다. 노예제 역시 한때는 사회적 통념이었고 질서였다.


  최근 해외 입법례와 인권규약의 현대적 해석을 보면, 가족구성권이 이성애적 결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고 한다. 국제인권법과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에 관한 전문가들이 채택한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에 관한 국제인권법 적용에 대한 요그야카르타 원칙(THE YOGYAKARTA PRINCIPLES on the Application of International Human Rights Law in Relation to Sexual Orientation and Gender Identity」(2006)은 성적 지향 또는 성별 정체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가지고, 가족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명시하였다.


  얼마 전, 브라질에서 동성 간의 시민적 결연(Civil union)을 합법화하면서, 중남미국가에서 아르헨티나에 이어 사실상 동성애 결혼을 허용하였다. 동성애 결혼에 대한 진일보한 입법례 사례에도 불구하고, 아직 동성애는 여러 국가, 사회에서 차별과 억압에 직면하고 있다. 지배적 종교와 문화로 인하여 여러 국가, 혹은 사회나 부족에서 동성애를 여전히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우간다의 경우, 동성애는 징역 14년형에 처하는 “불법행위”일뿐만 아니라, 최근 동성애자에게 최고 사형까지 내릴 수 있는 법안이 거론되고 있어 국제적으로 규탄을 받고 있다. 이슬람권, 유교권, 기독교권 등을 망라하고 아직 동성애를 ‘불법’ 혹은 ‘혐오’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곳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지배규범은 개인들에게 일치된 해석에 의해 주어진 제한된 목소리만을 허락한다. ‘정상’이라고 간주되는 것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대상들의 목소리는 듣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차이와 관계의 다양성들은 억압한다. 익숙한 언어에 갇혀,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지배규범에 자신의 삶을 종속시킨 우리 자신일지 모른다. 동성애는 비정상이나 질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다양한 관계 맺음과 사랑의 방식이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라는 사회적 위치와 삶의 경험은, 주류의 시각에서 보면 열등함의 근원이고 극복되어야 할 장애이다. 그러나 반대로 억압받는 자의 시각에서 기존 사회를 보면, 이들의 독자성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과 지성을 가능하게 하는 자원이 된다.(이것이 바로 모든 탈식민주의 사유의 출발점이다.)”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 참고자료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
가람, 성소수자의 가족구성권, 제3회 LGBT인권포럼, 2011. 1. 15.
뉴스 기사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76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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