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의 인터뷰] 인권변호사의 길 – 이석태 변호사

2011-04-29 257

[민변의 인터뷰]


인권변호사의 길_이석태 변호사


인터뷰_출판홍보팀 이재정 변호사
사진_출판홍보팀 6기 인턴 유재선
정리_출판홍보팀 이재정 변호사, 6기 인턴 김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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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이 태동하던 당시부터 늘 함께 해 오신 이석태 전 민변 회장님이, 얼마 전 참여연대 공동 대표를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권 변호사’, 역사의 흔적이 묻어나는 그 타이틀이 딱 들어맞는 그에게, 아직도 목마름이 남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역사에 박제되지 않고 여전히 길 한 가운데 서 있는 그를 만나 봤다.



민변: 어떻게 참여연대 대표직을 수락하시게 되었는지?
 
이석태(이하, 이):참여연대라는 훌륭한 조직이 만들어지던 때부터 우리사회 새로운 시민사회 운동의 면면을 채워가던 모습까지 가까이서 지켜봐왔지요. 그 가운데 선배, 동료변호사들이 함께 활동을 하기도 하고 김창국 변호사님이나 민변 회장님을 역임하신 최영도 변호사님의 경우는 단체의 대표를 맡기도 하면 적극적으로 결합해 역할을 하셨지요.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여러 고민들이 있었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결정을 했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형식적인 틀의 민주주의는 갖추게 되었지만, 내용적인 면에서 아직도 채워져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사회의 변화가 때때로 굴곡은 있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진전되면서 변화해 가야 되는데, 근자에는 남북관계, 인권분야 등 여러 면에서 후퇴하고 있는 상황이라, 법률가로서 시민사회 일원으로서 안타까웠습니다. 그 가운데 제 역할을 찾아 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때, 참여연대 공동대표의 제안이 있었던 겁니다. 특히 내년, 내후년의 중요한 정치변화, 선거 국면도 마주하고 있고 참여연대가 (정치, 선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겠지만) 시민사회의 한 축으로 그 집약된 힘을 보탤 필요가 있는 상황이라는 점 등에 대한 복합적인 판단도 있어 대표직을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민변: 말씀하신 대로 참여연대라고 하면 90년대 이후 우리사회에 (그간의 민중, 노동운동의 영역과 또 다른) ‘시민운동’을 촉발시키고 뿌리내리게 한 대표적 시민단체이고, 법률가 교수 등 전문가들의 역량을 엮어 사회의 법적, 제도적 변화를 추동한 터라, 우리 법률가에게도 친숙한 단체입니다. 그렇지만, 변호사님께서 함께 해 오신 전문가 집단이나 민변 같이 변호사가 회원인 단체와 달리 참여연대는 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회원인 시민단체인데요. 그런 시민조직의 대표를 맡는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으신지. 그리고 각오는.
   


이: 부담감..글쎄요.. 좌우간 걱정이 많습니다. 지금은 대표라는 이름보다는 또 한명의 신입회원, 간사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회의를 통해 조직을 익히고 논평이나 성명을 읽으면서 참여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단계인데요. 이 과정에서 알게 된 참여연대의 구성원들의 면면은 정말 대단합니다. 아시다시피 참여연대는 우리사회 모든 현안을 다루다시피 하는 다양한 부문활동이 있는 단체인데, 그 논의과정의 수준도 상당하였습니다. 그렇게 다양하고 넓은 범위에서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대안을 조직하고 표명하고 비평, 비판하는 데 있어 참여연대만한 조직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당분간은 그런 활동들에 놀라면서 감동하고 격려하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일 같네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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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사회와 인권에 관심을 둔 법률가(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그 시작이 궁금합니다.
 


이: 처음엔 로펌에 근무했었습니다. 그만두고 개업하던 무렵 민변 초기 결성에 관여하게 되었지요. 당시 저는 그저 평범한 소시민적인 변호사였는데 일거리가 없던 지라..(웃음) 민변이 만들어지기 전 ‘청변’이라는 모임에 있었습니다. 6월 항쟁이후 사회변화에 참여하고 싶은 변호사들이 모여 세미나도 하고 시국사건변론 등 주어진 일을 동료들과 나누면서 민변을 만드는 과정에까지 참여하였지요. 세월이 지나면서 경험이 생기고 그 분야도 넓어지면서 저 자신도 시야가 넓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시간들이 모여 인권변호사라는 직책을 만들어 준 것 아닐까요. (민변: 지나치게 겸손하신 말씀인 것 같습니다)


 


민변: 당시 ‘청변’에서의 세미나는 어떤 주제로, 어떻게 이루어 졌나요. 


이: ‘청변’을 함께한 변호사들은 대게 비슷한 생각의 동료들이긴 했지만 기본적인 인식의 공유를 위해 일종의 토론 학습과정을 가졌던 것입니다. 박원순 변호사도 당시 함께 한 동료인데, 그이처럼 미리 의식이 앞서있는 변호사들이 나같이 모자란 사람들에게 토론을 통해 기부한 셈이죠 (웃음) 그러다가 민변이 만들어 지게 되었지요. 비슷한 시기 박종철 군 사건이 발생했고 그 손해배상소송을 청변 그룹에서 맡게 되었습니다. 10여명이 역할과 팀을 나누고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이론적 도입을 연구한 것도 그때였습니다.  



민변: 동성동본불혼이나 호주제 위헌 소송, 매향리 소음피해주민 소송, 긴급조치 재심사건 등 굵직하고 주목할 사건들에 관여 하셨는데, 그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은. 아쉬움이 남는 사건도 좋습니다.


이: 그 사건들 모두 저 혼자 주도한 것도 아니고, 많은 변호사들의 공동작업에 함께 관여한 것뿐이지요. (역시 겸손이 지나치시지요?^^) 동성동본문제나 호주제, 매향리 소음 피해 소송사건들처럼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낸 사건들의 경우에도 좀 더 잘 했더라면 그 시기를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아쉬움이 늘 있습니다. 그 밖에 안타까운 사건으로 지금도 진행 중인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이 있습니다. 재심이 개시 되었지만 검찰이 재심개시에 항고하여 현재 대법원 계류 중에 있는데, 늘 가슴 한 켠 무게로 있는 사건입니다. 다음 달이 되면 사건이 있은 지 벌써 20년이 흐른 셈인데, 당초에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에 비견되는 프랑스 드뤠피스 사건이 12년이 걸렸지요. 그런데 이 사건이 20년이 다 되도록 이러고 있다 보니, (물론 결국 그리고 곧 진실이 밝혀질 것으로 믿고 있지만) 변호사로서는 늘 무언가를 가슴에 얹고 사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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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새로운 판결을 도출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고 즐거운 작업이기도 하지만 긴 시간 싸우는 과정에서 지치고 어려운 일도 많은 것 같습니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면서 마주하는 어려움은 어떤 방식으로 극복 하시는지. 그 산을 넘는 비결이, 후배 법률가로서 궁금합니다.


이: 언뜻 보면 변호사들만이 모여서 하나의 문제를 돌파해야 하는 과정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 사건들의 옆을 보고 우리 변호사들 뒤를 돌아보면 그것을 열망하는 사회 여론들이 있고 지치지 않고 도와주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결국 시기가 늦던 빠르던 사회를 움직여 가는 동력이 되는 것이지요. 나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지만 사회 발전에 있어서는 일종의 낙관이 있습니다. 싹이 땅을 비집고 삐져나오는 바로 그 순간, 그 솟아오르기 직전의 준비된 큰 에너지에, 미미한 개개인 변호사의 역량이 보태지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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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외국 서적을 번역하시기도 하고 시민 사회적 국제연대활동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활동을 위해 어학 공부를 따로 하시는 건지. (국제회의에서 만난 일본변호사님 한분이 변호사님의 일본어 능력이 해마다 달라져 있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바쁜 변호사 업무 가운데 그런 노력들이 존경스럽다고 하신 적이 있음)


이:  일상적 관심사의 한 분야로서 책을 읽기도 하는데 그것이 영어로 된 채 번역본이 없는 경우라면 어쩔 수 없이 번역하면서 읽게 되지요. 그리고 과거사에 대한 관심을 두고 보니 우리 근대사에서는 국제 연대나 국제 사료 등으로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기 마련이고, 이 경우엔 결국 현안이 있어서 공부가 필요한 셈이지요. 일본어의 경우, 과거 식민 지배 탓에 여전히 거리감이 있지만 언젠가는 가장 가깝게 연대하고 인권과 사회변화에 함께 할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따로 공부를 합니다. 


민변: 변호사님께서 관여하신 활동 중에는 (일본 군 위안부 문제나, 긴급조치, 그리고 재일동포 간첩사건 같은) 과거사와 관련한 것이 많은데요. 왜 이리 과거에 집착하시는지요. (웃음) 


이: 과거사문제는 과거의 문제이면서도 여전히 현재의 문제입니다. 인권의 문제를 떠올리면 약자, 소외된 곳을 쳐다 볼 수밖에 없는데, 바로 과거사도 그런 부분입니다. 과거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소외된 약자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민변: 재일동포간첩사건은 어떤 것인지. 


이: 70년대에 박정희 군사정권, 80년대 전두환 정권당시의 일입니다. 1970년 들어서면서 일본의 진보적 사회흐름 가운데 재일동포들이 비로소 자신들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고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재일동포 학생,‘ 기업인들이 한국에 많이들 왔어요. 정권입장에서는 좋은 먹잇감이었죠. 재일동포 사회의 특성상 북도 남도 바다 건너 조국인지라, 한 집안에 총련계도 민단계도 있을 수 있었고. 그런 상황은 정권의 입맛대로 엮기 나름인 것이죠. 적당히 두드려 대규모 학원간첩사건을 만들어내곤 했고, 그것이 80년대까지도 이어졌습니다. 보안사 중앙정보부, 안기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훗날 감옥에서 나오더라도 청춘을 다 보낸 그 남은 삶은, 말도 못하게 비참해진 경우가 많습니다. 상당수가 정신이상, 신체장애로 고생하고 있어요. 한국 땅을 오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그들을 위해 사회구성원으로서 책무라고 생각하면서 여러 변호사들이 모였습니다. 함께 일본을 오가며 현재도 한 참 진행 중에 있습니다.
 


민변: 민변 전 회장님이셨습니다. 변호사님께 ‘민변 회장’이라는 직책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  그건 무거운 책임감이지요. 민변이 만들어 지던 때부터 줄곧 민변 회원이던 제게 회장이라는 직책은 활동의 연속일 따름 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변화는 무거운 책임감이었습니다. 다만, 동료들하고 호흡을 같이 한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구요. 솔직히 회장은 허상이고 실제 당시 사무총장이셨던 장주영 변호사님께서 모든 일을 다해내셨지요.(웃음)



민변: 사형제도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 관련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오셨습니다. 아직도 여전한 문제인데, 어떻게 보시나요.


이: 김형태 변호사님과 작년 사형제 헌법소원을 함께 하였지요. 결과적으로는 사형제를 유지하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느낀 것이 결국은 사법부가 결정하기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사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물론 (작년 소송은) 아쉽긴 하지요. 사법부의 판단이 나온 상황에서 공론화를 촉발시키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지만, 다시 또 채비해서 폐지 운동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회가 민주주의로 가는구나 싶은 징표가 있는데 우리는 그 처음은 넘었습니다. 최소한 영장 없이 체포하는 일은 없으니까. 남아있는 다른 문제는 바로 사형제 폐지와 양심적 병역거부의 인정과 같이, 우리사회가 ‘개인을 존중하고 고려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형제 폐지의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의 경우, 누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하더라도 개인의 문제만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관점에서 출발했습니다. 개인의 삶은 사회가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고 있고, 불우하면 불우할수록 더욱 그러하지요. 사형제도는 완벽하게 개인으로 그 책임을 돌리는 제도입니다. 복지이야기, 생명이야기 모두, 사람이면 누구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데 그가 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사회가 존재의 두려움을 책임지고 보장해야한다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일할 능력도 없고, 심지어 재미도 없고 의욕도 없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사회는 ‘존재’를 보장해야 합니다. 최소한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보장 하는 것. 민주화의 중요한 징표가 아닌가. 사형문제도 그런 맥락에서도 이해될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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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일상적인 변호사 활동, 단체 활동, 번역 등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하시는데 그 열정과 에너지를 지속하시는 비결, 건강관리는.


이: 걸어 다니는 습관을 가진지 오래되었습니다. 따로 특별히 운동은 안하지만 기회가 나면 많이 걸어요. 강북 쪽에 갈일이 많이 있는데 대체로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20분내 거리의 사대문에 많은 곳들이 모여 있지요. 인권위 15분. 참여연대는 좀 더 멀어서 30분. 그 사대문 인근을 걷는 기쁨은 제게 특별해요. 예전 명동은 운동가들을 만나던 장소였고. 함께 시위하고 대치하던 장소였지요. 그 곳을 걷다 보면 그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 ‘아.. 여기가 밤을 새던 곳, 여기는 대치하던 그 장소였지…’  



민변: 채식주의자라고 들었습니다. 언제부터. 그리고 채식의 이유는.
 


이: 채식에 관심을 가지고 채식위주로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은 20년이 넘었습니다. ‘주의자’라는 말에는 자신이 없고 요즘엔 채식을 지향하고 있다고 하지요.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런 생각으로부터도 약간의 이완이 필요하지 않느냐 싶기도 했지요. 보통 채식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물론 저도 환경에 대한 고민을 포함해 여럿 있지만, 시작은 단순하게 ‘굳이 많이 먹을 필요가 있을까, 굳이 동물을 먹을 필요가 있는가’ 에서 출발했습니다. (민변: 혹시 종교적인 이유도 있는지) 사람들은 저더러 ‘종교는 없는데 종교적이다’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자연, 사물의 존재, 밤하늘의 찬란함, 우리를 둘러싼 그 어떤 신비로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에 대한 궁금함이 있을 따름인데.(웃음) 



민변: 마지막으로 뉴스레터 독자들에게 한마디.
 


이:  민변 대표부터 참여연대 공동대표까지 정말 책임감이 많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새로운 역할을 찾고, 여전히 인권에 관심을 갖고 있는 변호사로서 좀더 성실히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지켜봐주세요. 



민변: 민변의 역사에 관여하신 원로급
(?, 본인은 이런 타이틀을 극구 부인하셨음)이신데도 여전히 민변 회의테이블과 현장에서 마주하고 의논할 수 있으신 선배님이셔서 참 좋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있어 주실거죠. 선배님? (웃음)
  


이:  네. 물론입니다. 저는 새로운 의미에서 ‘현장에 돌아왔습니다’. 늘 현장에서 뛸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할 겁니다! 


<마치며> 


  인터뷰 내내 넘쳐 나온 다른 이들의 이름 석자들을, 인터뷰 글 가운데서 지우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함께 한 다른 이들의 귀한 땀을 더 빛나게 하고 싶어 하는 인터뷰이에게 인터뷰어 ‘민변’ 여러 차례 경고(?)했다. 오늘의 주인공에 전념해 주십사 하고. 사라진 이름에 행여 노여워하실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변호사님께서 무대에 서시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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