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인권모니터링]
2011 벽두 소식 : 이집트의 민주화 혁명
고대 역사의 산실이자 아랍권역의 패권을 주도하는 이집트.
그곳이 드디어 혁명을 맞이하고 있다. 석유산업, 권력 이양 등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언론에 의해 폭로되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의 이목이 여기로 집중되고 있으며 그와 함께 무바라크 정부의 부패, 이집트 국민들이 처한 상황, 그리고 시위 중 인권 탄압 현황이 주목되고 있다.
1. 무바라크 대통령
1981년, 사다트가 피살된 같은 달, 무바라크가 다음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87년, 1993년, 1999년에 재선이 되어 무려 30여 년 간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였다. 현 이집트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직선제가 아닌, 의회에서 단일 후보 선출한 뒤 국민투표를 실시해 당락을 결정하게 되지만 야당은 이러한 선거 방식에 반대하고 있다.
무바라크는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혹은 라마단 전쟁)에서 공군 참모총장으로 참전해 전공을 세운 영웅이었고 1974년 공군원수가 되었다. 이후 사다트 대통령에 의해 부통령으로 임명되어 정치에 입문하였으며 1981년에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 되자 대통령이 되었다.
권위주의형 정부
이전 대통령인 나세르나 사다트가 큰 업적을 많이 남긴 것에 비해 사다트의 죽음으로 손쉽게 대통령에 당선된 무바라크는 정치적 정통성이 다소 부족하였고, 결과적으로 사다트 대통령을 따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친서방 외교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정적이나 야권을 내무부와 정보기관이 철저히 감시하는 권위주의 모델을 따르게 되었다.
그는 무려 30여 년간 비상계엄법을 연장해왔으며 형식적으로 복수정당을 허락하였으나 정당 등록 조건을 까다롭게 하여 후보 등록 자체를 봉쇄하였다. 2005년 대선에서 복수후보를 처음으로 허용하였으나 90%에 가까운 지지를 얻어 연임에 성공했다. 또한 가장 큰 야당인 무슬림형제단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탄압을 하기 위해 재판 없이 그들을 구금하고 고문, 살인도 서슴지 않는 등 대내적으로 탄압적이고 권위적인 정치 형태를 보였다.
반면에 그는 대외적으로는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무바라크는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맺은 평화협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미국으로부터 매년 15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얻어냈다. 이는 이스라엘에 이어 2번째로 큰 액수라고 한다. 또한 사다트 대통령의 일방적 평화협정으로 인해 악화된 아랍 국가간의 관계 개선을 이루었다.
하지만 사다트와는 달리 후계자를 키우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결국 아들인 가말 무바라크를 후계자로 내세워 국민들이 반발하였다. 국내 경제 상황도 심각한 상황이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과 실업률이 10%에 달하였으며 국민의 50%가 하루에 약 2달러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제조업 부문이 부재하여 일자리가 부족하고 계층간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등 경제 위기를 맞고 있다.
1. 빵과 자유 ; 이집트 혁명의 원인
1) 이집트의 현 경제 및 정권 부패 상황
빵을 다오
보도에 따르면 북아프리카와 중동국가로 번지는 민주화 시위는 치솟는 물가, 즉 빵 값을 견디지 못한 서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1월 30일 폐막한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경제전문가들은 인플레이션에 직면한 신흥국 리스크가 올 한 세계 경제의 최대 문제라고 진단하며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신흥국 정권이 위협 받을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이집트보다 앞서 혁명이 일어났던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도 ‘굶주림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식료품 가격이 문제였다. 공식 물가 상승률은 4.5%이지만 식료품 상승률은 10%를 웃돌았으며 이집트에서는 물가상승률이 12%를 넘어서 식품 보조금 지급이 검토되었으나 결국 시위가 일어났다. 또한 튀니지와 이집트의 실업률도 상승하여 각각 30%, 40%에 달하고 있다.
정부의 부정부패
국제투명성기구의 2010년 부패인식지수 순위에 따르면 북아프리카와 아랍권 지역의 국가의 부패인식지수가 상당히 낮다. 부패인식지수의 점수가 낮을수록 부패가 심한데, 이집트는 3.1점으로 180개국 중에서 98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권력을 확장하고 대통령직을 연장하기 위해 정치적 부패, 운동가들을 재판 없이 가두거나 이들을 위한 불법 수용 시설을 만든 것이 드러났다. 2010년 12월 있었던 의원 선거에서는 최대 야당인 무슬림 형제단의 후보자 등록을 제한하고 언론 검열, 체포 등 온갖 부정행위가 동원되었다.
2) 비상사태 법( Emergency Law )
(참고: 위키피디아)
제3차 중동 전쟁이후로 비상사태 법(법률 제 1958, 162번)이 제정되고 1981년부터 발휘되고 있다. 이 법 아래에 경찰의 권력이 확장되고 시민들은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 받았으며 검열또한 합법화되었다. 정부는 이유 없이 무기한으로 개인을 감옥에 수감되게 할 수 있게 됐고, 이 법은 거리 시위자, 승인되지 않은 정치 단체, 등록되지 않은 재정적인 모금을 포함한 모든 반정부 단체의 활동에 적용된다.
3) 미국과 이집트, 그리고 반미
이집트는 최초로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는 아랍국가이며 미국의 원조를 이스라엘 다음으로 많이 받는 국가이기도 하다. 혁명이 진행되면서 많은 이집트의 젊은이들은 미국이 무바라크의 독재정권을 지지해 왔으며 이집트 내에서 자행되고 있는 수많은 인권 유린을 방관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미국과 친교관계를 맺었으나 탄압적인 정책을 펼쳤던 이란의 팔레비 정권과 비교되며 이집트의 청년들은 이러한 미국의 행태를 비난하였다.
&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연대하여 가자(Gaza)지구 봉쇄를 하는 것을 대부분의 이집트 국민들이 지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바라크는 이를 강행하였으며 이 때문에 이집트의 청년들은 무바라크가 이집트의 이익보다도 서방세계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며 시위하였다.
1. SNS와 위키리크스, 도미노 혁명의 시작
1)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이집트의 시위는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을 뒤따랐다. 도미노식으로 시위가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이유의 이면에는 ‘지도자의 장기 독재에 따른 부패’라는 공통점이 있다.
무바라크는 대통령이 된지 30년이 넘는데다가 2011년 9월로 예정된 대선에 출마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예상되었고 아들에게 집권 여당의 권력을 이양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대통령 일가에 대한 하급 관리의 뇌물 수수가 이미 관행화 되는 등 부패가 팽배했다.
이러한 정치적 부패가 만연한 상황에서, 튀니지의 혁명이 성공하자 아랍권 전역에 독재로 인해 이제껏 받아온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
2) SNS의 파급력과 인터넷의 역할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도미노처럼 퍼지고 있는 시민 혁명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혁명이라고 명명하기도 하는 등 SNS가 정보통신 분야뿐 아니라 현실정치에서도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튀니지 시민혁명의 도화선은 대학을 나오고도 과일 노상을 해야 했던 무함마드 부아지지의 분신자살 사건이었다. 잊혀질 수 있는 이 사건은 트위터(twitter)를 통해 튀니지 전역에 퍼졌고 이는 곧 국민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어서 위키리크스(wikileaks)를 통한 정부의 부정부패가 공개되자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집트에서도 SNS가 큰 역할을 했다.
1/25의 첫 집회도 페이스북에 한 청년 단체가 시위를 제안하며 성사되었으며 SNS를 통해 경찰과 대응 하는 법 등이 퍼졌다. 구굴의 중동, 북아프리카 마케팅 매니저인 와엘 고님이 익명으로 운영하던 페이스북 페이지는 시위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집트의 시위 관련 소식은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를 통해 전세계로 퍼졌으며 국제사회로부터 이집트 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 시위대에 대한 동정 여론을 끌어냈다.
이 지역에서 SNS 위력이 강한 이유는 언론 탄압으로 인해 자국 내 언론이 제 기능을 못 하기 때문이다. 독재체제의 구축을 위해 언론이 통제되는 까닭에 공영방송은 정부 비판을 배제한 정부의 홍보 채널로 이용되어 와 실질적 언론이 없는 상황에서 SNS가 대안적 언론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쉽게 작성, 유포가 가능하고 국경을 넘어 전 세계를 묶는 네트워크로의 유포가 가능하여 자국뿐만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는 데에 일조하였다.
4. 시위의 진행 상황과 대통령 하야
시위의 진행 (Wikipedia, Huffington Post 참조)
Ø 1.25 “분노의 날”: 이집트 혁명의 시작.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수에즈, 이스마일파 등의 도시에서 혁명이 시작됨. 카이로에서 15,000명이 타흐리르 광장을 점령.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여러 장소에서 20,000명이 시위했다. 서부 도시 아스완에서는 200 시위대가, 동부 도시 이스마일파에서는 2000 시위대가 시위.
Ø 1/27: 인터넷 중단됨.
Ø 1/28 “분노의 금요일”: 분노의 금요일. 무바라크 대통령이 개각을 선포.
인터넷 서비스가 중단되고 이동통신 서비스가 중지됨. 금요일 기도 종류 후 수 만 명이 시위를 시작했고 한 시간도 안 되서 수 백 만 명으로 늘었다. 잠재적인 대통령 후보인 모하메드 엘바라데이는 카이로로 돌아와 시위에 합류할 의사를 밝혔다.
경찰은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등 이집트 곳곳의 시위대들에게 최루 가스, 고무 총알, 물대포를 쐈으며 수에즈의 수 천 명이 경찰서를 점거해 체포된 시위자들을 풀어줬고, 포트사이드에서는 수만명의 사람들이 정부 건물을 점거했다. 수에즈에서는 경찰이 총을 발포해 시위 참가자 최소 1명이 사망.
정부는 오후 6시부터 오전 7시까지 통행 금지령을 내렸지만 시위자들은 무시했고 경찰과 충돌했다. 저녁이 되자 시위자들은 카이로의 국민 민주당 본 건물에 불을 질렀고 시위자들은 저녁 기도를 위해 잠시 멈췄지만 경찰은 계속 최루 가스를 살포했다.
이집트 정부는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수에즈에 경찰을 보조하기 위한 군대를 배치했다. 알자지라는 수에즈에서 군대가 시위자들과의 공개적인 대립을 피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보도했고 같은 사례가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보도됐다.
Ø 1/29: 익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이집트의 소통을 도움
Ø 1/30: 힐러리 클린턴이 이집트의 민주화를 역설함.
Ø 1/31: 이집트의 개각 선포.
Ø 2/1: 무바라크 대통령이 다음 선거 불출마 선언.
반정부 단체의 지도자들은 시위자들과 함께 백만의 행진(아랍어 : مسيرة مليون)에 참여해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부터 헬리오폴리스의 대통령궁까지 행진했다.
BBC는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자들의 수를 예측하기 힘들다고 보도했고, 알자지라에 의하면 오후까지 백 만 명이 넘는 시위자들이 카이로 중심부에 모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중에는 2백만 명까지 모였다고 한다. “백만의 행진“이라는 이름은 백만 명의 목소리를 목표로 페이스북에서 시작되었다.
나비 필라이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은 폭력에 의한 300명의 죽음과 3,000명의 부상이 보고되었다고 발표했지만 이 수는 확인되지 않은 보고도 포함한 것이다.
늦은 오후 무바라크 대통령은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다음 대선이 있는 2011년 9월까지는 대통령직을 지킬 것이며, 정치 개혁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자들은 계속 무바라크의 대통령직 하야를 요구했다.
Ø 2/2: 이집트의 인터넷이 복구됨.
이집트의 인터넷 접속이 부분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했으며 통행 금지령도 완화되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차기 대권 불출마 선언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는 즉시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것을 요구하며 시위 강도를 높이고 있으며 2월2일 새벽 대통령 대국민 TV담화 직후 알렉산드리아 및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서 다수의 시위대와 무바라크 옹호세력간의 충돌 상태이며 부상자가 속출했다.
카이로 중심가 및 외국인, 대사관 인원들의 밀집지역인 마아디(Maadi) 지역에는 이미 경찰들이 복귀하여 치안안정화를 시도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카이로 지역 및 헬완과 같은 외곽지역은 잦은 총성을 들을 수 있으며 단지 지역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지역자치방범대들이 자신의 가족들과 자산을 지키기 위해 사흘째 철야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측 관영 TV채널은 6th of October Bridge의 한산한 모습만을 방영하며 일반 국민들에게 시위의 심각성을 숨기는데 노력했으나 이미 국민들 사이에는 알자리라 및 BBC world등 Global 방송사들의 실시간 방송을 통해 늘어가는 시위대들의 활동 현황을 공유하였다.
Ø 2/4 “작별의 금요일”: 작별의 금요일.
분노의 날“과 “분노의 금요일“을 계획한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2월 4일 헬리오폴리스 대통령궁 앞에서의 시위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2월 4일까지 즉시 권력을 내려놓고 대통령직을 하야하라고 요구했다. 2월 3~4일동안 카이로의 도로에는 탱크가 배치됐고 시위자들은 밤 동안 타흐리르 광장에서 머물렀다. 무바라크 옹호자들도 활동했다. 수 십만명이 금요일 기도에 참여하기 위해 타흐리르 광장에 모였다. 시위는 금요일 기도 이후에 이루어질 예정이며, 알자지라는 지금까지 모인 사람의 수가 백만명이 넘을 것이라고 집계했다.
Ø 2/5: 내각 사임
Ø 2/6: 정부가 권력 이양을 약속함.
Ø 2/10: 무바라크가 즉각 사임할 것이라는 루머에도 불구하고 무바라크가 즉각 사임을 거부함
Ø 2/11: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하고 카이로를 떠남. (군부에게 권력 이양)
5. 인권 탄압 현황과 관련 NGO 반응
언론 탄압
1) 인터넷
무바라크의 30여년간의 독재와 맞서 젊은 활동가들이 인터넷을 이용하여 거리 시위 등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Human Rights Watch는 1/28일 전면적으로 이집트의 인터넷과 이동통신이 중단되었고 이는 계획된 거리행진과 경찰 폭력 관련 사진 등을 봉쇄하여 사실을 덮을 의도가 다분하다고 보도했다.
HRW의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부장은 인터넷 중단과 통신 봉쇄는 정부가 시민들의 인권을 중대하게 침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이집트 정부는 표현과 정보 접근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으며 광범위하게 퍼진 시위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동통신과 인터넷 서비스를 중단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2) 해외 언론인 탄압
2/3일과 4일, 해외 언론인들이 무바라크 옹호자, 경찰들에 의해 구타를 당하거나 체포되는 등 사태가 급변하였다. 몇몇은 구타만 당했고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와 사진사가 체포되었고 뉴욕타임즈 기자가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경찰의 폭력적 탄압 활동
http://news.mk.co.kr/v3/view.php?year=2011&no=74806
기사에 따르면, 2/5일 까지 최소 5000명이 부상하고 11명이 사망 하는 등 유혈 탄압을 하였다. 또한 유튜브 사이트에는 고문당하거나 잔인하게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이 “Police Brutality”란 제목으로 지속적으로 유포되고 있다.
NGO 성명
2011년 1월 31일, 무바라크 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1 차 집회가 한국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있었고 2월 11일 2차 집회가 있었으며 공동 성명서가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