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의 인터뷰] 긴급조치 변호인단의 간사변호사, 조영선 변호사 인터뷰

2011-01-31 219




민변의 인터뷰, 조영선 변호사

 


인터뷰 및 정리 : 출판홍보팀 염용주 5기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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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출판홍보팀에서는 대법원의 긴급조치 1호 위헌 판결을 이끈 민변 변호인단의 간사변호사인 조영선 변호사님을 만나보았다. 그는 스스로가 하는 일에 대해서 “별 거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나마 날씨가 조금 풀린 화요일 점심, 변호사님의 사무실에서 기륭사건, 소록도 한센인 소송 그리고 긴급조치 등 결코 “별 거 아닌”일이라고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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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판결 관련


Q. 요즘 사무실이 긴급조치 피해자분들의 방문으로 시끌벅적한데요, 먼저 긴조 소송을 진행하게 된 계기 혹은 배경을 말씀해주세요.
A. 2007년 11월 경 오종상씨 진화위 진상규명 사건을 보면서 긴급조치에 대한 사법적 평가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법원은 그동안 긴급조치 피해자들에 대해 계속해서 면소판결만을 내려왔다. 재판 당사자인 오종상씨는 소위 말하는 ‘막걸리 긴급조치’ 피해자인데, 버스 안에서 옆자리 여학생에게 이런저런 푸념을 늘어놓았다는 죄로 잡혀간 것이다. 이런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정당한 국가배상 등을 구하기 위해 민변에서 긴급조치변호인단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Q. 방금 막걸리법이라고 하셨는데, 그게 뭔지 설명해주시겠어요?
A.
 술 한 잔 마시며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말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형을 살다 나오는 것을 일컬어 하는 말이다. 재판당사자인 오종상씨도 이 막걸리법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버스 안에서 유신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했다는 사실로 옆에 앉은 여학생과 교사에 의해 형을 살고 나오신 것이다.


Q. 소송진행중 가장 힘드셨던 점, 재판 중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
A.
 대법원에서는 긴급조치와 관련된 사건에 일관되게 30년 넘게 면소판결을 냈다. 재판의 내용, 사실관계 등을 실질적으로 다퉈본 적이 없다. 과거에 긴급조치가 폐지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면소판결을 내고 있던 것. 고문 혹은 협박을 당했는지 피해자가 묵비권을 행사했는지 가려보고 다퉈볼 기회가 없었다.
면소는 긴급조치로 인해 구속-구금 중에 있는 피고인을 우선적으로 석방시킨다는 의미가 있었으나, 이미 형이 확정되어 형을 살고 나온 사람들에게는 면소판결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즉 재판을 이미 받은 긴조 피해자들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었다.
(※ 면소판결이란, 관련 법령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재판을 거치지 않는 것. 입증, 증거조사, 법리다툼을 생략하게 됨.)
 
Q. 아, 그랬기 때문에 이번 판결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이었군요? 그렇다면 변호인단 측에서는 이번 위헌 판결을 예상하셨는지요?
A.
 그 날 아침까지도 면소판결로 예상하고 보도 자료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날 당일에 가서 재판관을 마주하니, 그게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전율을 느꼈다. 36년 만에 면소가 아닌 판례변경을 통한 무죄판결이 나온 것이다. 긴급조치, 그리고 유신의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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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긴급조치 관련 소송의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A.
 긴급조치 1호에 대해서만 위헌판결이 나온 것이고 당해사건에만 적용이 된다. 법리적으로 봤을 때 재심을 할 수 있는 요건이 법으로 정해져있는데 헌재에서 긴급조치 자체에 대한 위헌 결정이 나야 재심이 가능하다. 그러나 대법원의 위헌판결에 대해 재심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명문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재심사유가 있어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사후적으로 재심요건에 해당하는 경우만 가능하다. 오종상씨의 경우에는 6일동안 잠안재우고 고문.폭행하였기 때문에 재심개시결정을 받았다. 경찰, 중앙정보부원의 폭행이 없었던 경우에는 영장 없이 구금당한 것으로 재심논리를 만들고 있다. 문제는 긴급조치 자체가 영장 없이 구금가능하다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재 긴급조치 1호, 4호, 9호에 대해서 재심청구를 추가로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헌재에 올라와 있는 사건이므로 헌재의 결정이 나오면 피해자 전체가 재심의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내용이 고문인지 아닌지 따질 필요 없이 위헌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재심청구와 무죄판결이 가능하게 된다. 헌재 위헌이 나올 경우 형사보상절차, 국가배상절차까지 가능하게 되는데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 헌법재판소 위헌판결과 대법원 위헌 판결의 다른 점.
 헌법재판소가 위헌으로 결정한 법령에 의해 처벌받은 경우 재심으로 다툴수 있지만, 대법원은 원칙적으로 당해사건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개별 사건별로 재심사유 등을 정리하여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이번 대법원이 긴급조치가 법률이 아니라고 하면서 위헌이라고 판담함으로써 헌법재판소에 계류중인 긴급조치 위헌헌법소원과 우선 관할과 관련하여 법리적인 다툼의 영역이 있다.


Q. 현재 진행 중인 헌법소원도 긍정적인가?
A.
 대법원 판결 때문이 아니라 유신. 긴급조치 시대에 대한 역사적, 사법적 평가로서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다. 아무리 합법이라고 해서 정당한 것은 아니다. 나치도 법치주의를 따랐다. 히틀러도 합법적으로 당선되고 집권했다. 법만으로는 정당한 사회가 될 수 없다. 긴급조치는 박정희 정권의 도구였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법적으로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한다. 사법부가 독재에 일조해왔기 때문에 스스로 풀고 넘어가야하는 역사적 결단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Q. 긴급조치 판결로 우리 사회의 기본권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변화 속에서 우리가 고민해야할 것은 무엇일까요?
A.
 역사라는 것은 나선형으로 발전한다고 한다. 정보통신기본법이 위헌 결정 난 것처럼, 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기재는 광범위하다. 본능적으로 권력이라는 것은 자기통제를 싫어하고 확장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런 부분에서 “법이라는 것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할 것이다.








– 민변으로서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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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민변 사무차장으로 일하면서 가장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A.
 개인적인 소회로는 시야가 넓어졌다는 것이 크다.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촛불집회다. 그 때의 많은 시민들의 움직임은 놀라운 것이었다. 단순히 ‘촛불’이었기 때문만이 아니었고, ‘광우병’이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변화”가 느껴졌다. 예전에는 집회나 시위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깃발을 따라 다니면서 뭉쳐왔는데 이번에는 깃발이 없었다. 국민들의 자발적이고도 생동감 넘치는 표현의 자유를 맘껏 느꼈다. 이 사람들이 20년, 30년 후에 사회에 진출하고 건강한 목소리를 낸다면 보다 나아진 사회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Q. 촛불 당시 민변에서 ‘인권 침해 감시단’활동도 하셨습니다.
A.
 감시를 가장한 동반 투쟁이었다(웃음). 민변의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되었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만큼 이 사회에 민변이 필요하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민변이 촛불에 대한 시대적인 사명을 다했는가에 대해서는 따로 평가받아야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민변이 한 것은 변호인으로서의 조력뿐이었다. 촛불이 던져준 시대적 사명이다.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변화에 대해서는 민변이 힘을 못 미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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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기륭사태에도 깊이 관여하셨는데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기륭 비정규직 문제에 개입하게 된 것은 송경동씨를 통해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갔던 것이다. 그 이후로 기륭 노동자들 투쟁에 5분 대기조처럼 대기했다. 기륭 노동자들은 매일 체포당했다. 사실 변호인으로서는 무력하다. 단지 노동자들에게 달려오는 변호인이 있고 접견자가 있다는 것이다. 기륭 노동자들에게 심정의 위안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한 일이라고는 가끔 가서 막걸리를 얻어 마시고 노래하나 부르고 한 것뿐이다.
 노동자 측과 그렇게 가까이 지내다 보니, 회사 측에서는 나를 비롯한 몇몇을 배후 세력으로 지목했다. 기륭 사태는 결론적으로 1년 6개월이라는 단서가 있었으나 복직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비정규직 사건에 있어서 진일보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그 이후로 ‘동희 오토’랄지 여러 사업장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사실상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어쨌든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 사회가 안고 갈, 그리고 해결할 문제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시켰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같이 “패배”라는 아픈 역사를 반복한 것이 아니라 긴 투쟁이었고 많은 성과는 아니었지만 복직이라는 성과를 작게나마 얻었다는 점은 앞으로 비정규직 투쟁하는 데 있어서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홍익대 비정규직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사용자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편차가 크다. 성남시가 좋은 예이다. 청소 용역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는데 이것은 재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형평과 분배의 문제이다. 같은 것을 같게 대우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바뀌어야 할 부분이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노동자가 사용자를 사용자라고 부르지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Q. 한센인 인권 문제와 관련된 활동도 많이 하셨습니다.
A.
 한센은 소위 말하는 문둥병, 즉 나병이다. 예전에 일본이 ‘나예방법’을 만들어서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했다. 일본에 있는 변호사들이 이에 위헌성이 있다고 판단을 했고 소송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 내부에서 이 소송이 승소하였다. 그런데 한센인 중 한명이 담당 변호사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소록도와 대만에서도 일제시대에 격리 감금된 사람들이 많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소송단이 그 편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 변호인단이 소록도에 와서 소송준비를 하기 시작했는데 한센인들이 워낙에 폐쇄적이고 게다가 변호인단이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진행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민변 광주 지부로 협조 요청이 오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소록도 한센인 변호단을 구성하였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한 손해배상소송을 진행했다. 우리가 기초자료 구성하여 일본 변호사에게 넘기면 일본변호사가 재판을 진행하는 형식이었는데 2006년도 10월 25일, 소록도와 대만이 같은 날 판결을 했다. 그런데 소록도는 패소하고 대만 낙생원은 승소했다. 대만과 우리가 동일한 침해를 받았는데 다른 판결이 나온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집회도 하고 종로 종묘에서 1000명의 한센인들과 함께 시위도 했다. 결국 일본정부가 1월 달에 2007년 2월 6일에 일본 한센보상법을 개정하여 소록도와 대만 낙생원의 보상원리를 마련하였다. 600여명의 피해자들이 보상 청구를 했고 현재 470여명 정도가 보상을 받았다.
 이 소송은 매우 의미가 있다. 먼저 한일 과거사 관련하여 일본이 입법적으로 자국이 아닌 한국이나 대만 등의 국가에 대한 사과를 하고 피해보상을 했다는 점에서 뜻 깊다. 과거사 문제를 법을 통해서 해결할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또 음지에 있던 한센인들을 양지로 이끌어내서 소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송 진행 당시 1000여명의 한센인들이 종로집회를 했는데 세상 밖에 자신의 얼굴을 들고 종로거리를 걸은 것은 처음이었다. 소록도 사람들은 정상인들과 대화할 때에는 고개를 돌리는 것을 습관화 하고 있다. 사람들은 손님이 가도 음식을 내놓지 않는다. 예전엔 외부와의 소통을 두려워했는데 이번 소송을 통해서 많이 당당해지고 스스로 커밍아웃을 통해서 떳떳해졌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변호사들과 일본의 변호사들, 일본의 한센인권단체들이 협력해서 하나의 마음으로 성과를 이뤄냈다. 또 개인적으로는 한센문제를 변호사로서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에, 또 그 일을 해냈다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
 내가 말을 잘해서 시간이 빨리 가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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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A.
글쎄, 나는 한때 80-90년대에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이다. 직장에서 해고된 후 1년 동안 해고투쟁을 하고 소송도 하고 이겼는데 어쨌든 그 당시 90년대 초반, 나이는 30이 넘었고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다 현장 활동을 접고 현장을 떠나서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이 밤기차를 타고 순천에서 올라왔다. 노동자들을 남겨두고 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랄까,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그것이 고시공부의 원동력이었다. 사람들에게 마지막 유인물을 보낸 게 “신발 끈을 다시 묶으며,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 사람들에게는 현장을 떠난 것은 어떻게 보면 배신이었으니까. 그 사람들에 대한 부채 의식이 큰 힘이 되었다.
 작은 형 관련해서는, 이 양반이 지게질도 나보다 못하고 외모도 내가 낫다(웃음). 문학적 소양과 풍류가 넘쳤던 사람. 형을 많이 따라하고 싶고, 닮고 싶었다. 리영희 교수의 책도 형을 통해서 보게 되었다. 형이 현장 활동을 하고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자연히 형을 통해서 사람에 대한 사랑이랄까 이런 것들을 좀 배웠다. 그런 부분들이 있다.
 별거 아니다. 내가 하는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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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향후 계획은???
A.
 민변에서 하고 있는 내가 몸담고 있는 긴급조치, 한센, 7080노동탄압사건과 시대적 과제같은 문제들도 한번 시작한 이상 어떠한 형태로든 결론을 맺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이다. 개인적으로는 쉬고 싶기도 하고 글도 쓰고 싶다. 또 지난 시간을 반추하고 되돌아보고 점검하고 싶은데 이래저래 오랫동안 소란스럽게 달려 온 달구지 같다. 혼자 침잠해서 회고하고 정리하고 계획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열심히, 따뜻하게 살아야지. 계획은 많은데 일본어도 색소폰도 배워야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다. 둘째가 나를 놔주지 않는다.(늦둥이)둘째 때문에 주말이 더 힘들어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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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인터뷰 하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셨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추가로 하실 말씀은?
A.
조영래 변호사님이 이름을 민변이라고 이름을 지을 때, 어떤 생각으로 지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는 민주화가 종착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것
이다. 민변 변호사들이 진정성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의 영역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해내는 것이, 우리 이름에 걸맞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변이 아직 많은 역할을 더 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의 요구가 아닌가 생각한다. 민생문제 연구 또한 다양하게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민변도 다양해질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나 싶다.
 또…(웃음) 민변 많이 사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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