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민변 최초의 여성 사무총장, 정연순 변호사

2010-08-17 319




  민변에 새 집행부가 출범한지 벌써 석 달이 되어간다.
  새로운 집행부가 돋보이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민변 최초로 여성사무총장이 취임했다’는 점일 것이다.

  서글서글한 외모와 부드러운 화법이 편안함을 주지만
  일처리는 깐깐하다고 알려져 있는 정연순 변호사,
  민변의 새로운 사무총장을 만나 ‘민변’과 ‘변호사’로서의 ‘개인사’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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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변 최초의 여성 사무총장



– 민변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으셨나요?

 
 제가 연수생일 때 법무법인 ‘덕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때 만난 선배님들이  이돈명, 최병모 변호사님 같은 대선배님들과 이석태, 김형태, 조용환 변호사님 등
기라성 같은 분들이었죠.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변호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는데요,
그분들이 모두 민변 회원들이셨기 때문에 변호사 되는 것과 민변가입은 완전히 동일한 걸로 생각했습니다. (웃음)


– 여성위원회에서도 큰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위원장으로 있을 때 여성위원회가 모범위원회로 상을 받기는 했지만,
그건 제가 잘해서라기보다 후배들이 잘해준 덕분이에요. 김진, 이상희, 이정희 변호사 등 후배들이 정말 활발하고 모범적인 활동을 해주었거든요. 저는 살아오면서 늘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하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운이 좋았던 거죠.


– 벌써 사무총장하신 지 두 달 반이 지났습니다. 느끼신 점이 있다면요?

 총장으로 일해 보니 민변이 정말로 사회각계각층으로부터 많은 일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이 일을 다 어떻게 해내지 하면 또 회원 분들이 마다하지 않고 다 맡아서 잘 처리해줘서 총장으로 일하는 것이 처음 생각보다는 그리 큰 부담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회비만으로는 지금 사업들을 적절하게 수행하기에는 좀 모자라요. 전임 집행부가 발전기금을 넉넉히 마련해줘서, 그 일부를 예산에 전용하고 있는데요, 남아있는 기금과 소진속도를 보면 제가 일하는 기간 동안은 괜찮을 것 같은데, 곳간을 비워놓고 나가면 안 되니까, 자나 깨나 돈 걱정을 하고 있는 게 하나입니다.(웃음)
 마지막으로는 여러 사정 때문에 활동에는 적극적으로 결합 못하시는 회원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가는 과제인데요, 요즘 시국이 시국인지라 계속 닥쳐오는 시급한 일들에 급급해서 이를 어쩌나 하고 있지요. 


– 회원들께 바라는 점이 있으신가요?

 회원들에게 어떤 불만이나 요청이 있지는 않아요, 집행부가 어떻게 하면 더 잘해드릴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만, 굳이 말씀드리자면 회원들이 사무처에서 마련한 월례회 등의 전체 모임에 시간을 내서 꼭 참여하셨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지금 변호사 업계가 큰 지각변동을 겪고 있지요. 우리 모임에는 관록 있는 선배들도 계시고, 달라진 상황에서 고생하고 있는 젊은 후배들도 많습니다. 서로가 변호사로서 공통으로 가지는 애환이랄까. 어려움도 있고 서로 다른 고민도 있는데요, 시간되면 이런 모임에 나오셔서 선후배간에 서로 소통하고 공유하고 다독이며 힘을 얻어가셨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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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본부장


– 총장님 경력을 보면 2006년부터 2년 반 동안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을 하셨는데요.

 네, ‘전무후무한 차별시정본부장’입니다.(웃음) 2006년에 차별시정본부가 만들어지면서 제가 들어갔는데, 제가 나온 뒤로 인권위가 축소되면서 차별시정본부가 없어져서 조사국으로 통합되었지요. 제가 일하는 시기에, 비록 국회에서 통과되진 못했지만 ‘차별금지법’ 안이 만들어졌고, ‘장애인 차별금지법’과 ‘연령 차별금지법’은 제정, 발효되었지요. 지금 정권에서 반차별운동이 좀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흐른 나중에 돌이켜 보면 차별금지법 제정역사의 획을 그은 시기라고 평가될 그 때에 관련 기관에서 일할 수 있었다는 게 개인적으로 매우 보람 있고 뜻 깊습니다.


– 민변에서도 얼마 전부터 ‘(가)소수자인권위원회’의 발족을 위한 준비모임이 만들어졌죠?

 소수자 인권의 문제는 그 바탕에 ‘사회적 차별’이라는 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민변이 전통적으로 ‘시민의 정치적 권리’ 쪽을 옹호하다 보니, 사회적 차별 시정 분야에 대한 관심이 좀 적었고, 회원들의 개별적 활동들은 있으되 조직의 활동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집행부의 출범과 함께 그동안 개별적 활동을 해오시던 회원들이 모여 ‘위원회를 만들자’는 제안을 해주셨어요. 역시 저는 운이 좋은 편이죠, 가만있는데 이렇게 일을 하겠다고 나서주는 회원들이 있어요(웃음) 정말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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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변호사 정연순



– 여성변호사의 수가 많지 않을 때에 변호사를 시작했는데요, 왜 법조인의 길을 선택하셨나요?


 대학에 다닐 때가 전두환 군사독재시절이라 뭐, 데모하러 다니고 수업거부에 시험거부 하다 보니 학업에 소홀해져서 학점이 안 좋았어요.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4학년이 되었는데, 정말 졸업하면 어디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내밀 수 있는 학점도 못 되어서요, 그래서 ‘에이,  사법시험이나 보자’는 생각으로 시험을 봤는데요. 다행히 그리 늦지 않게 합격했어요. 역시 운이 좋았죠. 시험 준비 과정에서 딱 한번 왜 법조인을 하려고 했을까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사회적 이슈와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일로써 공헌할 수 있는 직업이라 만족합니다.  



– 업무의 질로 평가받아야 하는 전문직 여성으로서 산다는 것이 녹록치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개척을 해나가고 계신 ‘언니그룹’이신데, 후배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드려요.


 대부분이 ‘가정’과 ‘사회적 평가’, 두 가지를 다 성취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는데, 정말 힘들어요. 남자들은 대부분 하나를 내조해주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는 ‘마누라’는 없고 ‘남편’만 있으니까요.(웃음) 두 과제를 양립시키는 게 고통스럽죠. 저도 힘들게 겪어왔고, 그렇게 살아가는 후배들을 보면 안쓰럽지요. 남성들과 동등한 사회적 평가를 받기 위해서 가진 능력 100을 50:50으로 배분하는 게 아니라 더 쥐어짜서 130이나 150을 해야 겨우 동등하거나 따라가는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언니들이 그렇게 살아왔으니 후배들 너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죠. 한국사회가, 남성들 역시도 너무 ‘과잉사회화’되어 있거든요,  ‘근로시간을 줄이고 가정과 사회가 양립 가능한 사회’로 만드는 것은 남성과 여성, 우리 모두의 과제에요. 더구나 아이들을 키우고 가정에 충실한 게 사회적 성공 못지않게 중요하고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것임을 저도 알기에, 그걸 버리고 사회적 요청에만 헌신하기를 요구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뭐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오른 여성들의 경우에는, 책임의식이나 책무를 조금 더 강하게 느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개인이 스스로 잘나서 거기까지 온 것 같지만 사실 그런 여성 하나를 키워내기 위해 사회적 비용, 사회 구성원들의 노력이 엄청나게 들어가 있거든요. 그 여성들은 자신들이 쌓아온 자산을 그 구성원들을 위해 돌려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때문에, 장기적으로 한 개인의 삶에서 가정과 사회가 양립 가능한 제도를 만드는 것과는 별도로, 그것을 실현해가는 과정에서 선도적이고 좀 힘겹게 살아야만 하는 여성들이 있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문제제기도 적극적으로 해줘야 하고 롤모델도 만들어줘야 하는데, 후배들을 보면 그 역할을 요구받을만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까, 만나면 자꾸 어떻게든 130, 150을 해보라고 닦달하니까, 후배들이 저보고 깐깐하다고 하나 봐요(웃음).. 너무 안타깝지만 말입니다.


– 굉장히 많은 사건들을 맡고 계시고 또 맡아 오신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사건을 말씀해주세요.

 변호사 경력이 이쯤 되면 누구나 가슴에 두는 사건들은 많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요, 성매매 여성이 포주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해서 결혼까지 해서 살다가 추적해 온 포주에 의해 차용금 사기로 고소당한 사건을 무료변론 해준 적이 있어요. 3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정말 힘겹게 재판을 해서 항소심에 가서야  무죄를 받았는데요, 처음 시작했을 때 뱃속에 있던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서 재판정에 데리고 오가면서 겨우 무죄를 받았지요. 나중에 후배들이 그 변론기록을 참고로 성매매여성들을 위한 변론매뉴얼도 만들었고, 그 여성분뿐만 아니라 한 아이와 남편까지 ‘한 가정’을 끝내 지켜냈다’는 점에서, 지금 생각해도 뿌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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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적인 이야기


– 남편분이 백승헌 전임회장이신데, 사무총장으로 일하는 것에 있어 어떤 부담감이 있나요?

 총장직을 수락하기까지는 솔직히 부담스러웠어요.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전혀 그런 건 없고, 오히려 가까이에 있으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기도 하고 그럽니다. 다만 그럴 경우 자꾸 이야기가 길어져서, 저희 집에서 ‘민변’은 ‘금칙어’ 처리된 상태입니다.(웃음)


– 저 역시도 정연순 변호사님의 차기 총장 내정 소식을 듣고,  세습 의혹을 제기한 사람인데요.
  의혹을 해소해주십시오.(웃음)

 
민변의 회장직은 선출직입니다. 그러나 하시겠다고 적극 나서시는 분들이 없어서 경선을 한번도 못해보고 전임회장이 회장후보자를 섭외해두고 나가긴 하지만, 나머지 집행부 임원은 전적으로 신임회장이 결정하지요. 그런데 김선수 회장님이요, 딱 던져 놓고서는 다른 가능성도 전혀 타진해 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리시는 그 수에 결국 성질 급한 제가 말려서 그만 수락을 하게 되었는데요(웃음). 회장직이면 모를까, 총장직은 전임회장이 관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점은 세간의 오해라고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많은 기혼 여성분들이 ‘여성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내’로 취급받는 일이 많습니다. 
  정연순 총장님은 특히 같은 분야에서 일을 하시다보니 특히 그런 일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남편이 저보다 8년 선배예요. 출발할 때부터 그 사무실의 선배였고, 민변에 들어와 봤더니 또 민변의 창립멤버였습니다. 관계 자체가, 좀 불리했죠(웃음). 사회적 명망에 많은 차이가 있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정연순 변호사’보다 ‘백승헌의 아내’로 불린 경우가 꽤 있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8년 선배랑 맞먹으려고 했던 것’ 자체가 이상했던 거죠. 반대로 제가 8년 선배였으면 ‘백승헌 변호사’가 ‘정연순의 남편’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그게 그때에는 ‘여성적 문제의식’과 결합되어서 잘 극복이 안 되더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다른 사람들은 심각하게 이야기한 것이 아닌데도 상처를 받은 적이 꽤 있었어요. 이제는 후덕한 아줌마가 되었고, 유학도 가서 좀 떨어져도 지내고 3년 가까이 인권위 활동을 하며, 다른 커리어와 네트워크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극복이 되었지요. 


– 지난번에 백 변호사님이 인터뷰에서 “대부분은 제가 정 변호사에게 도움을 줬다고들
  생각하는데, 역으로 저는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도움을 주었죠. 저희 부부는 변호사로서도 오랜 기간 같은 사무실에서 일해 왔는데요, 그래서 서로가 지루해 하지 않을까 하시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다행히 저희는 둘 다 지적 탐구욕이 많아서요. 변호사라는 직업과 그런 특성이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얼마 전 잡지에서 ‘공명’에 관한 글을 봤는데, 사람마다 특정 주파수가 있고, 그 주파수가 잘 맞는 사람끼리는 인간관계가 굉장히 편안하다고 해요. 남편과 저는 주파수가 비교적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이해력이 빠르고, 쟁점을 정확히 보고자하고, 그것을 처리하는 논리적 사고방식에서요.


– 변호사 업무에, 민변 총장직에, 그리고 얼마 전까지 학업도 같이 하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 많은 일들을 소화해내고 계시는 동력이 뭔가요?

 글쎄요. 아마도 첫 번째는 제가 호기심에, 유약한 마음에 여러 일을 맡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구요. 다만 그 일들을 어찌 해나가느냐는 질문에는 꼭 잘 해내야겠다는 ‘책임감’으로 버티는 것 같아요. 그게 제가 범생이로 자라며 한 번도 부모님을 실망시켜본 적이 없다가 대학에 들어가서 부모님의 기대와 어긋난 일을 하고 심지어 부모님을 속이고 다녔거든요. 그때부터 ‘내가 선택해서 하는 일은 잘 해야겠다’는 책임감이 굉장히 강해졌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힘이 부칠 때가 없지는 않지만, 그걸 극복하기 위해 의식적으로라도 즐겁게 일하려고 노력해요. 이왕이면 재밌게, 즐겁게..  이런 마음자세를 아침마다 외워 보곤 합니다.


– 두 아이의 엄마시라고 들었습니다.
  아이들, 혹은 인생의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제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는 마치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유치하게도, 동일한 시험을 치르고 비슷한 성적으로 들어와 대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이 그 뒤에도 비슷한 인생의 궤적을 그리며 살아갈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25년이 지나 보니 너무들 달라져 있더군요. 심지어는 19년 전에 사법연수원에 같이 들어간 동기들도 각자 다른 인생을 살고 있지요. 무엇이, 어디서 그 차이가 벌어졌을까, 곰곰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제가 딸과 아들이 있는데요, 아이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 지를 늘 성찰할 수 있고, 주체적으로 결정해 나가면서 나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것 그 이상은 없어요. 지금 아이들을 보면 그럴 여유를 주지 않는 사회라서 그게 안타깝고,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삶이 가능한 사회를 꼭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인터뷰 / 출판홍보팀 김란아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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