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비현재이다 – 강의,그리고 사색

2008-11-24 131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후기를 쓰는 것이 기쁨이자 부담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되새겨 볼 수 있어 즐겁다. 하지만 약 세 시간에 걸친 알찬 강의에 대해 내가 덧붙여 언급할 것이 없어보였다. 전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과연 선생님께서 하시려는 말씀의 10분의 1이라도 이해했을까? 불안정한 인식과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는다. 견고한 주관적인 인식은 객관의 지평을 넓혀준다 하신 선생님의 말씀을 변명삼아 내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생각들을 적는다.




존경하는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는 일이다. 다른 인턴은 정년이 되어 퇴임하신 교수님을 만나는데 너무 떨려한다며 놀리기도 했다. 선생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그 분의 제자(?)가 되기로 생각한 이상 이 기대감은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사실 20대 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처음 접했을 때는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쓰인 언어도 쉽지 않았고 평범한 대학생인 내게 책 속의 상황도 솔직히 크게 공감되지는 않았다. 몇 년 후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공부를 하다 책을 다시 펼쳐 보았을 때야 사람과 세상과 삶에 대한 깊은 생각들을 표면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두 번 세 번 읽으면 읽을수록, 내 생각이 자란 그 만큼만 선생님의 인생과 사상을 읽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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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시작되었다. 첫 학기를 시작한 중학생 마냥 손에는 선생님의 2004년에 쓰신 책 ‘강의’를 들고 귀는 선생님의 생생한 ‘강의’에 쫑긋하며 하시는 말씀에 집중했다. 빛바랜 낡은 노트에 쓰인 묵은 이론을 반복하여 가르치는 노교수님의 강의가 아니라 당대의 현실 속에 천착하여 오랜 시간을 사색을 통해 우려낸 결과물들을 보이시는 모습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하자마자 먼저 결론을 말씀하셨다. 우리사회의 현재 모습을 인문학적 가치를 가지고 성찰하여 희망을 발견하자는 것이었다. 후퇴하는 민주주의, 침체되는 경제, 고단한 우리네 삶,  소망이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는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선생님은 작은 씨과실에서부터 ‘희망’을 역설하셨다.




석과불식 (碩果不食) – 성찰과 희망의 조건 –




“‘씨과실’을 먹지 않고 그것을 새싹으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먼저 잎사귀를 떨고, 즉 거품을 거두어 내고 잎사귀에 가려져 있는 기본적 구조를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석과불식에서 성찰이라는 명제를 통찰력 있게 발견하시는 모습, 작금의 유동성 금융위기를 피상적으로 보지 않고 근본적 구조의 문제라고 적시하시는 모습 역시 시작부터 선생님이셨다. 근대사회의 물리적 방식, 기계론적인 세계관, Here and Now의 실사구시의 빈약한 사회?사상 풍조를 통찰력있게 짚어내시며 잔잔하지만 깊은 호수처럼 단정한 어투로 말씀을 이어가셨다.


“극박한 상황에서는 사회와 개인이 근본적인 처방을 하지 못합니다. 실사구시의 풍조와 병리적 대응 방식은 안 됩니다. 진리와 근본을 봐야 합니다. ‘경제를 왜 살리는 가’ 그 개념의 준거를 재구성해야 합니다. 경제를 살리는 근본의 이유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입니다.”


 




이양역지 (以羊易之) – 인간에 대한 이해 –




“이양역지의 핵심적 의미는 만남입니다. 만남과 관계가 하나의 점으로 끝나게 되는 현대사회의 실상을 성찰하게 합니다. 점이 선이 되지 못하고 선이 면이 되지 못하는 현실과 그 현실 속의 인간적 위상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곧 인간관계이며 모든 인문학적 유산 역시 관계의 소산입니다… … 인간이해에 있어서의 관건은 인간은 곧 인간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적 정체성이 사장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간관계의 공동화로 이어지며 인간관계의 공동화는 다시 사회성의 황폐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사람을 타자화하지 않고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성을 최대한으로 확대 할 때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됩니다. 이러한 인식 틀은 우리의 문화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 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단호하신 어조로 근대의 비인간적 사고를 비판하셨다. 인간관계 없이 대상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고에 대해 말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을 문화 인류학의 대상으로 삼는 사고를 예로 말하셨다. 책 ‘오래된 미래’를 말씀하시자, 라다크의 학자 타시가 오래된 미래의 작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에게 지어준 시가 문득 떠올랐다.




당신이 태어난 위대한 유럽에는 /자유의 나라들이 번성하고 있지요/물질의 풍요와 산업과 기술/모두를 가지고 있지요 (중략)//이곳에 사는 우리에게 진보는 없어도/우리에겐 기쁘고 평안한 마음이 있어요/기술은 없어도 더 깊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지요 (중략)//세상의 모든 화려함을/주의 깊게 바라보세요/거기에 숭고한 의미가 있나요?/나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요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도/쾌락이 차고 넘치더라도/명성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도/죽음이 그에게서 모든것을 빼앗게 되겠지요 //(중략)이제는 마음을 모아 노력해야 해요/오래지 않아 알게 될 거예요/대단한 광경을 볼 거예요/그리고 내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게 될 거예요        – 타시 라브기아스, 당신이 태어난 위대한 유럽에는, ‘오래된 미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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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非현재입니다.




미래는 非현재입니다. 현재의 갈등과 모순을 조금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미래입니다.”




근대와 현대의 인간들은 자신들이 진보적이라 여기고 무언가 대단한 성취를 해낼 것이라고 자부하지만, 세계는 여전히 전쟁과 테러, 기아와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제살을 깎아 먹듯 우주 속 자기들이 발붙일 유일한 환경을 파괴하며 다신 만들어낼 수 없는 자원들을 가지고 분별없는 소비에 집중한다. 15억의 인구는 추위와 더위를 피할 집조차 없으며, 10억의 인구는 먹을 것이 없어 영양실조에 걸려있다. 코카콜라가 1리터에 1.58달러이지만, 하루 1.25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14억 명이다. 21세기가 되도록 인간이 지금까지 성취해낸 진보는 우리를 포함한 세상의 일부가 배부른 돼지로 살아가는 진보다.




근대 이전의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자연적인 삶을 간직한 리틀 티베트 라다크의 모습, 한 마을에서 서로의 삶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관계 맺는 삶의 모습은 오래되었지만 우리의 미래가 되어야할 모습이었다. 이어서 선생님은 헬레나의 ‘오래된 미래’와 함께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동양의 주역과 서도(書道), 불확정성의 원리와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현대 물리학을 재료삼아 ‘관계론’을 버무려내셨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을 분절하지 않고 연속적인 시간으로 이해했다던 한 학생 때문에 선생님의 사색적인 일면이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하고 겸손히 되물었다고 하셨다. 감옥에서의 추체험과 면벽명상은 자신의 모든 만남이 선생님의 삶을 수많은 관계 속에서 구성하는 원천이라고 겸허하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듣자 무라카미 류의 단편소설 속 대사가 기억났다.


자신이 접하는 타인에 따라 인간은 인격을 조금씩 바꾸는 거야. 사실은 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늘 다른 인격이 된다고 생각해 그것은 타인에 의해 자신을 확인하기 때문이야. 내게는 타인이란 없어.’




면벽명상은 주체의 해체를 가져온다고 하셨다. 알튀세르는 인간은 호명당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자의식이 강한 현대인들에게 주체의 해체는 너무나 힘들어 보인다. 그 강하디 강한 자의식이 고립된 섬을 만들어 고독과 외로움의 절규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또 진실된 주체의 발견이야 말로 타자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기쁨이었다.




끝없는 바다같으신 선생님으로부터의 사색




공존과 소통 그리고 변이 – 화이부동 (和而不同),  최고의 진리는 물과 같습니다 – 상선약수(上善若水),   삶은 공부이며 여행입니다 – 양심(良心). 경험에 근거한 예화와 많은 독서에 기반한 지식들은 3시간동안 쉴새없이 쏟아져 나왔다. 선생님의 사상은 말 그대로 동서고금의 집약이었다. ‘우리는 근대성을 능가할 만한 것이 정말 없는가?’라는 물음으로 고독한 공간에서 긴 세월 동안 독서와 사색으로 만들어내신 ‘선생님의 근본 진리에 대한 탐구와 그에 근거한 실천’들은 뿌리를 건드리지 못하고 ‘현상과 현실의 문제 해결에만 집착하는 나의 실사구시’한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솔직히 평소 선생님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미지는 묵직하고 조용하시며 신중하신 분이라는 것뿐이었다. 항상 깊이 있는 글과 진중한 이야기들로만 뵈었기 때문에 선생님을 매우 진지하신 분인 줄만으로 알았다. 세상이 엄숙하면 엄숙할수록 그만큼 유머가 필요하다.” 빅토르 위고의 말이다. 복잡하고 엄숙한 시대에 선생님의 사람과 삶을 기반한 예화를 듣게 되니 유머(humor)는 인간(human)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와 배려에서 나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선생님의 힘은 젊은이의 그것 이상이었다. 질의응답까지 3시간 가까운 시간동안 선생님의 강의는 클래식 악보의 피아노(p)와 포르테(f)처럼 좁은 산기슭에서 넓은 바다로 이어지는 강물처럼 이어졌다. 강의가 끝날 무렵 결국 선생님은 열변을 토하시며 정해진 시간마저 열정으로 넘기셨다.




주관과 실천




‘훨훨 날아다니는 하늘의 선녀가 아닌 다음에야 여러 개의 조망대를 한꺼번에 가질 수는 없고 어디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제가 사는 터전을 저의 조망대로 삼지 않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주관의 양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고 객관적인 견해를 더 많이 수입하려고 합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사색 155쪽 중에서-




주관과 실천이라는 튼실한 두 발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오신 선생님이셨다. 끝없는 자기성찰을 통해 얻어진 선생님의 사상은 철저히 삶을 기반으로 한다. 현장의 대지위에 서 있는 두 발이다. 그 든든한 발걸음에서 우리는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패스트 푸드같은 지식이 아닌, 오래 숙성된 깊은 맛을 내는 지성의 소리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나도 과연 저때가 되면 선생님처럼 인간적이며 깊이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 시대 나는 어떤 주관을 가지고 세상을 인식하며 실천해나가야 할까?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눈앞에 닥친 상황에 실사구시 하느라 지나쳐버렸던 중요한 물음들을 스스로에게 던져 볼 수 있었다.



 


강의로부터의 사색(민변 10월 월례회 후기)


민변1기 인턴 정관영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는 매달 정기적으로 “월례회”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외부에 계신 분들을 초청해서 강의를 진행함으로써, 민변이 단순히 변호사 집단을 넘어서는 더 많은 세상의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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