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교수 초청강연 <한국문화의 정체성> 방청기 – ‘전통 잇기’를 넘어
서상범 회원 (법무법인 다산)
지난 8월 23일 화요일 저녁, 오랜만에 민변 월례회에 참석하였다. 2015년 이후 7년여 간 공무원으로 생활하다 변호사로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으로, 그동안 그렇게도 강의를 듣고 싶던 유홍준 교수님의 강연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덕빌딩에서 하는 월례회에 처음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2시간 가까이 진행된 교수님의 강의를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경청하였다. 교수님의 강의는 1,2부로 나뉘어 1부에서는 한국문화 정체성 일반, 2부에서는 시대별 특징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셨다.
그간 변호사로서, 공무원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책을 읽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고민을 나누면서 점점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 문화, 역사, 전통의 긍정적인 면, 훌륭한 모습들이었다. 교수님도 같은 취지로 말씀하시면서 30년 전 쯤에는 이러한 내용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였다는 것이었다.
한국은 그간 근대화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닌 채 선진국을 따라 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매진해왔고 그 전제에는 우리의 역사, 문화, 전통에 대한 부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유례없이 빠른 양적 성장을 거쳐 선진국의 문턱에 서게 된 이제 서야 우리 민족의 역사적 경험,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되돌아 보는 것이 가능한 시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시대 거란(遼)이 침공(제1차)한 이유는 당시 송나라의 대항마로 흥기 중이던 거란이 고려에 대하여 자신을 인정해 달라는(송 대신 요의 연호를 사용하라는) 요구와 거란의 배후를 위협하는 여진을 제압하여 달라는 요구 등이었는데, 고려의 외교관 서희가 거란의 장수와 협상하여 요의 연호를 사용하기 위한 준비시간을 허여받고 여진을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강동6주를 넘겨받는 대신에 거란은 철수하는 매우 획기적인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교수님은 미국에 대항하여 중국이 급부상하고 있는 요즈음, 한국에 필요한 것이 바로 서희와 같은 외교관과 국정운영 전략이 아니겠느냐고 언급하시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는 수난과 전란으로 점철된 역사가 아니라 합리적이면서도 상식에 기초한 전략을 펼쳐 동북아의 정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이로써 우리 민족의 자율성을 최대한 고양시켜온 자랑스럽고 슬기로운 역사라고 강조하셨다.
몽골(원나라)이 침공해오자 최씨 무신정권 아래에서 27년에 걸쳐 7차례나 침략을 막아내다 후에 원종이 되는 고려 태자가 원나라로 가 쿠빌라이 칸(원세조)과 협상하여 “불개토양” 즉 고려의 전통을 바꾸지 않을 것과 칸의 직접통치를 받지 않겠다는 담판을 짓고 대신 고려 태자가 원의 사위가 되는 것으로 양보한 것은 원이 고려를 인정하여 “대접을 받은” 것이지 굴욕적인 것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는 설명도 같은 맥락이셨다.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직접 침공하여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항복한 역사도 청나라의 요구는 기본적으로 명나라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하라는 취지였으므로 국제정세를 감안하여 주화파의 의견에 따라 이를 받아들인 결과를 굴욕적인 것만으로 단정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말씀도 많은 공감이 갔다.
만약 후손의 입장에서 조상들이 전쟁을 했으면 반드시 이겨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굴욕적이라는 경직되고 근시안적인 생각에만 매달린다면 조상들이 어떻게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며, 중국 내 50여 개 소수민족 중 독립국가를 배경으로 하는 민족은 조선족(한국)과 안남족(베트남) 그리고 몽골족(몽골) 3개 뿐인데 조상들이 갖은 어려움을 헤치고 지혜를 모아 후손들에게 독립국가를 물려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여야 하고 오히려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야 한다는 교수님의 구수한 강연을 들으며 비슷한 생각을 나누고 고민을 함께 하는 것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깊게 느낄 수 있었다.
요즘 K-Pop이 뜨는 것은 한국이 그동안 이른바 ‘선진음악’의 장점을 계속적으로 따라가고 흡수하다가 결국은 이들 장점을 한국식 “비빔밥”으로 승화시키게 된 것 아니겠냐고 하시면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은 전통을 이어온 데만 있지 않고 외부의 장점을 받아들여 우리 문화와 전통을 변화시켜온 역사적 경험에 존재한다는 지적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앞뒤 돌아보지 않고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나온 일등만능주의, 엘리트주의만으로는 더 이상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당연한 진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소중한 저녁 시간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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