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스위] 2022년 장마, 용산 등지에서 –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공동 관람기 

2022-08-01 60

‘2022년 장마, 용산 등지에서’

– 2022. 6. 30.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공동 관람기 

김상현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과의 만남.

  민변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에서는 지난 2022. 6. 30. 목요일 19시 서울 마포구 양화로 166 소재 ‘홍대 인디스페이스’ 영화관에서 고영재 감독 작품의 다큐멘터리 음악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공동 관람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포스터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가수 정태춘과 동반자인 박은옥의 데뷔 40주년 프로젝트로 제작된 영화로서, 2019년 가수 정태춘과 박은옥이 데뷔 40주년을 기념하여 진행한 전국 투어 콘서트를 중심으로 정태춘의 음악 세계와 그의 일대기를 조명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처음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에서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을 공동 관람한다 하였을 때, 저는 당시까지 정태춘이라는 가수를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저의 부모님께서는 2000년도까지 지방에서 조그마한 테이프 레코드 가게를 하셨던 터라 레코드 가게를 매일같이 놀이터 삼아 하루 종일 뛰어 놀았던 저에게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던 가수의 존재는 굉장히 낯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을 모두 관람한 후 가수 정태춘의 앨범을 찾아보게 되면서, 어렸을 적 가게 손님들이 상당히 많이 찾던 앨범 자켓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내게 되었고, 저의 부모님 역시 정태춘의 노래를 좋아할 정도로, 정태춘이라는 가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가수이자, 실제로도 한국 대중음악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큰 발자취를 남긴, 당대의 시대를 상징하던 음유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인기가 많아 기억나던 가수 정태춘의 앨범 <정태춘, 박은옥 발췌곡집>의 앨범 자켓

 

비 오는 날의 영화 감상, 그리고 정태춘에 관한 이야기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을 공동 관람하기로 한 2022. 6. 30.에는 서울에 많은 양의 강우가 집중적으로 쏟아졌던 날이었습니다. 

  몰아치는 비바람과 퇴근시간의 교통체증으로 인하여 교대역에서 출발한지 약 1시간 20분이나 걸려서야 어렵사리 영화 상영시간에 맞춰 상영장소인 홍대 인디스페이스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고단하고 지루할 수 있었던 운전 시간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주셨던 동승자 조세현 변호사님께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감사의 인사 말씀드립니다). 

  매우 빠듯한 시간에 도착하였으나, 영화 상영관 앞에서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의 위원장이신 김종휘 변호사님과 이수연 간사님께서 반갑게 맞이해주시며 빠른 속도로 영화표 발권을 도와주셔서 다행히 늦지 않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의 상영이 시작되었고, 위 영화를 감상하면서 저는 새로운 사실을 한 가지 알게 되었습니다. 

  밀레니엄 세대(1982년부터 2000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에 해당하는 저는 1995년경 당시 국가의 ‘음반사전검열제도’ 폐지에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이 소위 당대 우리들의 아이콘이자 문화대통령이었던 ‘서태지’인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을 통하여, 가수 정태춘이 대중 포크가수로 데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합법화 투쟁에 문화연대를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발매하는 음반 수록곡들마다 사회참여적인 메시지들을 강하고도 직접적으로 담아왔고, 위 과정에서 1990년경 국가의 사전심의결과 및 가사 수정지시 등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며 소위 불법음반을 제작하여 판매함으로써, ‘음반사전검열’ 제도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수 정태춘이 1994. 1. 25. 위와 같은 적극적인 저항과정에서 검찰로부터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기소를 당한 후 위 검찰의 기소를 계기로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함으로써 ‘음반사전검열’ 제도에 대한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 일치 위헌 의견을 이끌어 낸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왠지 모를 낯부끄러움에 한순간 얼굴이 상기되기도 하였습니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가수 정태춘은 가수로서의 대부분 기간 동안 늘 주류가 아닌 소외 받는 자들을 끌어안기 위한 음악을 만들어오고, 2006년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 현장 등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언제든 달려갔으며, 당대 사회의 부당한 검열과 부조리한 제도 등을 변혁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다해왔던 혁명적 문화예술가였습니다. 

대추리 싸움에서 연행되는 정태춘(촬영 노순택 작가)

 

  특히 가수 정태춘이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였던 1993년은 3당 합당 후 13대 총선이 실시된 시기로, 위 3당 합당 및 총선 결과 등으로 인하여 1980년대 중반부터 민주화를 갈망하여왔던 이들은 큰 상실감을 느끼던 시기였습니다.

  가수 정태춘을 비롯한 민중문화예술계, 그리고 많은 시민들에게도 역시 위 시기는 패배와 절망의 시기였으나, 가수 정태춘은 1993년 박은옥과 함께 발매한 여덟 번째 앨범의 수록곡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노래를 통하여 당시의 회한을 이야기하면서도 끝까지 새로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을, 그리고 당시 세태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세상의 부당함에 맞설 것을 노래하였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 <92년 장마, 종로에서> 노래 중

 

가수 정태춘의 노래는 현재에도. 

  그러나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을 보며, <92년 장마, 종로에서> 노래의 배경이 된 1992년으로부터 정확히 30년이나 흐른 지금 여전히 가수 정태춘이 바라던 세상은 온전히 찾아오지 않아 위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노래는 현재에도 유효한 노래인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최근 서울시는 헌법에서 ‘양성평등’만 보장하고 있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과 함께 ‘서울퀴어축제조직위원회’의 비영리법인설립을 불허가하였고, 여성가족부는 ‘버터나이프 크루’ 사업이 2019년부터 ‘성평등교육, 경력개발, 문화예술·미디어 관련 사업, 마을 돌봄 등’ 총 486명의 청년들과 함께 124개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는 것을 비롯하여 2022년 올 해 역시 이미 4기 출범식까지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사업 지원 대상이 페미니즘에 경도되었다.”는 여당 원내대표의 SNS 비판 한 마디에 사업을 전면 재검토하는 등 우리는 현재에도 1990년대 ‘음반사전검열’ 제도와 같은 불합리한 검열, 부조리한 제도들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또한  파리바게뜨지회의 집단 단식,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 파업 등 각계 노동자의 노동 환경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법과 원칙에 따른 강력 대응으로 그간 만연하였던 노동계의 심각한 불법 행위를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자평하는 현 정권 및 보수 언론을 보자면, 가수 정태춘의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노래의 배경이 되었던 참혹한 ‘사회적 화재 참사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최근 완도 일대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비관하여 안타까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일가족의 사례만 보더라도 노동 환경 및 빈곤 문제는 오히려 현재에도 오롯이 반복되고 있는 일상으로 느껴져 스스로 패배감과 절망감에 젖어들기도 하였습니다.

가수 정태춘의 <우리들의 죽음> 노래의 배경이 되었던
1990. 3. 9. 서울 마포구의 한 주택가에서 발생한 <혜영이 용철이 화재 사건>

 

“젊은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도 돈 벌러 파출부 나가고

지하실 단칸방에 어린 우리 둘이서 아침 햇살 드는 높은 창문 아래 앉아

방문은 밖으로 자물쇠 잠겨있고 윗목에는 싸늘한 밥상과 요강이

엄마, 아빠가 돌아올 밤까지 우린 심심해도 할게 없었네“

– <우리들의 죽음> 노래 중

  

  위와 같은 절망감에도,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을 통하여 가수 정태춘이 약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치 않고 신보를 발매해옴으로써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부당한 사회에 저항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아온 모습들을 알게 되면서, 저 또한 <92년 장마, 종로에서>의 노래 가사와 같이 ‘비가 개여 구름이 벗겨지고 파란 하늘이 열려 저 남산 타워 쯤’에서 서울시청도, 신촌도, 양재도, 그리고 거제 등도 모두 다 보일 수 있도록, 끝까지 좌절하지 않고 ‘큰 박수 소리와 함께 깃을 치는 것’을 늘 잊지 않고 살아야 함을 다시 한 번 아로새길 수 있었습니다.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 쯤에선 뭐든 다 보일 게야

저 구로 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 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

– 92년 장마, 종로에서

  

  영화를 보면서 특히 흥미로웠던 장면은 가수 정태춘씨의 1990년대 곡들을 1990년대에 태어난 사람이 처음 들었을 때 노래 가사 내용들이 지금의 현실과도 다르지 않아 1990년대에 발매된 곡임을 믿지 않았다는 인터뷰 내용이었습니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의 말미에 가수 정태춘의 40주년 콘서트 장면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가수 정태춘의 노래에 감탄하면서도, 위 웃픈 인터뷰 내용들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가수 정태춘의 노래가 제 시대를 찾음으로써 오롯이 가수 정태춘의 예술적 역량 및 그의 감수성적인 가창력에만 집중하여 귀 기울일 수 있는 시대가 조속히 도래할 수 있기를 바래보기도 하였습니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의 감독 고영재 및 가수 정태춘의 무대인사

  약 2시간의 영화 상영이 끝난 후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의 감독 고영재 및 가수 정태춘의 깜짝 무대인사 시간이 있었습니다.

  감독과 가수 정태춘의 무대인사를 통하여, 가수 정태춘의 삶과 노래, 그리고 감독이 영화에서 보여주려 했던 가수 정태춘의 모습 등을 생생히 설명들을 수 있어서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영화 감상만큼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무대 인사 중인 감독 고영재와 가수 정태춘. 박은옥 가수도 당일 관람객석에서 함께 인사 나누어 주셨습니다.

 

  또한 영화의 공동 관람객들 중에는 민변 회원들을 비롯하여 가수 정태춘의 팬 분들, 그리고 일반 관람객들도 계셨고, 가수 정태춘은 무대 인사가 끝난 후 상영관 로비에서 영화 공동 관람을 찾아준 관람객들 한 명 한 명에게 사진 촬영과 사인을 친절히 허락해주심에 따라 뜻밖의 팬 미팅 시간도 갖게 되어 매우 즐거웠습니다.

가수 정태춘과의 단체 사진(아쉽게도 이 사진에 저는 없네요.)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의 공동 관람 행사가 모두 종료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제가 가장 먼저 재생하였던 노래는 <92년 장마, 종로에서>였습니다. 그리고 <92년 장마, 종로에서> 노래는 현재에도 제 플레이리스트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아직까지 가수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 노래를 한 번도 들어보시지 못하셨다면, 이번 기회에 <92년 장마, 종로에서> 노래를 한 번 들어보시기를 조심스럽게 권해드려 보며, 추후 기회가 되신다면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역시 꼭 감상해보시기를 강력히 추천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계절과 달리 엄동한 시기에 <아치의 노래, 정태춘>와 같은 좋은 영화의 공동 관람 행사를 기획해주시어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주신 민변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에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추후 문화예술스포츠위원회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행사들에서도 많은 회원 분들의 참여와 함께 더 즐거운 시간을 가져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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