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민변이 할 수 있는 일, 할 만한 일, 해야 될 일
<한승헌 변호사의 삶 – 균형과 품격>을 읽고
-작성: 조영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1%도 안 되는 유권자의 민심이 결과를 결정했지만, 남겨진 사람들이 복기해보야 하는 것은 드러난 차이 그 이상이다. 합리적 사고를 할 것으로 기대하는 법률가들이 거대 정당의 후보로 출마한 선거였고, 모든 국민을 품어야 하는 국가의 대표자를 선출하는 과정이었지만 선거기간 내내 국민들은 완전히 둘로 나뉘어 서로를 헐뜯었고, 그 양 끝의 거리는 선거가 끝나고 같은 공동체에 공존해야 하는 이웃이라고 하기에 너무 멀어져 버렸다. 어쩌면 너무 한가한 평가일 수 있지만, 극단과 야만의 시대에 균형과 품격이 그리운 시간이었다.
그 때, 참 반가운 책을 만났다. 우리 모임의 큰 어른이자 정신적 지주인 산민 한승헌 변호사님의 삶을 ‘균형과 품격’이라는 주제로 정리하여 소개한 책(‘한승헌 변호사의 삶 – 균형과 품격, 이지출판’)이다. 민변 상근 사무차장을 시작으로 사법위원회 위원장 등 사법개혁 활동을 꾸준히 해 오셨던 우리 모임의 김인회 변호사님이 한승헌 변호사님의 방대한 저작과 언론인터뷰,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여 온 몸으로 성실하게 써내려간 귀한 책이다.
저자는 한승헌 변호사의 삶의 핵심사상을 ‘균형’ 으로 정의한다. 균형이란 ‘무조건 상대에게 냉정한 태도를 취하는 지혜가 부족한 무관심’이 아니라 ‘여러 대립되는 현실, 느낌, 심리현상들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높은 정신세계’로 ‘감각적 욕망에 휩쓸리지 않고 괴롭거나 즐거운 느낌에 흔들리지 않는 상태’라고 설명한다(12쪽). 서로 대립되는 현실에서 올바른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으로 각 분야의 최고의 대가가 되는 이른바 ‘세상의 끝’ 까지 가야 한다. 저자는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려면 진리에 가깝게 가야 한다. 진리에 가깝게 가려면 ‘세상의 끝’ 가까이 가야 한다. 걸어서는 ‘세상의 끝’에 갈 수 없지만 ‘세상의 끝’에 가지 않고는 진리를 볼 수 없(250쪽)’다고 설명한다.
법정에서는 모든 법률가의 귀감이 되는 훌륭한 변론을 하면서도, 피고인들의 투쟁의 현장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변호사, 독재정부시대 한 번은 반공법 위반으로, 한 번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피고인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르고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는 상황에서도 저작권을 공부하고, 삶에 대한 유머를 놓지 않으셨던 한승헌 변호사님의 삶에 대해 저자는 10가지 균형점(①변호와 투쟁의 균형, ②인권과 저작권의 균형, ③법률과 문학의 규정, ④엄격과 유머의 균형, ⑤전통과 혁신의 균형, ⑥민족과 세계의 균형, ⑦창조와 기록의 균형, ⑧자부심과 겸손의 균형, ⑨일관성과 다양성의 균형, ⑩세속과 탈속의 균형)으로 정리하여 소개한다. 10개의 균형점을 발견해 낸 저자의 생각도 놀라웠지만, 평생을 걸쳐 각 균형점 속 스무 개의 세상의 끝에 도달한 한승헌 변호사님의 성실한 삶의 기록을 마주하면서 나태한 생각에 익숙해진 정수리에 찬 물을 내려 붓는 것 같았다. 나와 같은 보통의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일과 삶의 균형’ 하나도 제대로 찾지 못해 방황하고 번민하기 일쑤인데 말이다.
저자가 애정과 존경을 담아 정리한 한승헌 변호사의 삶의 기록 중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변호사는 자신의 변론을 기록할 의무가 있다는 부분이었다. 한 변호사님은 ‘무릇 변호사는 그때 그때 부여된 변호 업무를 잘 수행해야 하지만, 재판에 정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때, 그 실상을 기록해서 동시대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또 다음 세대에게 이를 전해줄 의무가 있다(128쪽)’고 일갈 하신다. 물론, 변호사님께서 과거 군사독재 치하에서 ‘흉포한 권력 앞에 맨몸으로 맞선 피고인들을 지키고’ 법대 위에서 악에 영합하는 판사들에게 ‘오판의 과오를 깨우쳐 주기 위하여’ 재판의 허상을 세상에 알리는 ‘증언자’의 역할(분단시대의 법정, 머리말 중에서)을 자임한 것도 있겠지만 이는 민주화 이후 지금에도 생명력을 가진다. 결국 법이란 주권자의 민주적 의사형성으로 만든 법을 해석하고 적용해가는 과정이며, 이 과정이 ‘인간의 존엄성’이나 ‘평등’ 과 같은 우리 사회의 근본이념과 충돌한다면 이를 비판하고 기록하여 동시대인들에게 알리는 과정은 법률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비판적 공론의 장에서 이루어진 판결과 법 적용에 대한 비판은 결국 법의 사각지대를 드러내 메우게 하고, 그 논리를 성숙하게 할 것이라 믿는다.
한승헌 변호사님께서 민변 회원들에게 늘 강조하셨던 말이 있다. 바로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되자’는 것이다. 2008년 민변 창립 2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한 변호사님은 “민변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우리 앞에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 사서 하는 고생 더 합시다” 라고 말씀하셨고, 10년 뒤 2018년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도 “민변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 가면 역사는 진보합니다. 약한자에게 힘을 주고, 강한 자가 바르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사서 고생하는 이 시대의 선구자가 됩시다”라고 강조하셨다. 책에서도 ‘역사는 유식한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로운 사람들에 의해서 바로잡히고 또 발전되어 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211쪽)’고 말씀하셨다. 변호사의 숫자가 늘어난 만큼 다양한 활동을 하는 변호사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우리 민변 회원 숫자도 1000명을 넘어 꾸준히 늘어가고 있다. 사람이 많아진 만큼 회원들의 생각도 다양해지는 것 같다. 서로 다른 생각들을 직접 만나 교류하면서 공통분모를 찾아가는 것이 필요한데, 코로나19 등으로 오랜 기간 동안 서로 만나지 못하면서 모임에 대한 내/외부의 여러 걱정과 평가도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서로의 차이를 비판하고 주목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라는 오랜 동질감에 무게를 두고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는 진보적 법률가 단체로서의 모임의 역할에 주목해보면 어떨까?
다시 태어나도 변호사가 될 것이라는 질문에 한승헌 변호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변호사는 자기 생활을 지탱하면서 맘만 먹으면 남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헌신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직업입니다. 변호사에게는 소송 수행 뿐 만 아니라 변호사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 할 만한 일, 해야 될 일이 참 많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더 그렇습니다(229쪽).” 물론 과거에 비해 요즘엔 변호사가 가지는 ‘삶의 여력’이 꽤 빡빡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민변 변호사들이 ‘할 수 있고’ ‘할 만 하고’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민변이 힘들지만 해야 하고, 할 만 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늘 함께 해주는 좋은 동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승헌 변호사님의 시 ‘노숙’ 중 한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짧고 부족한 서평을 맺는다.
산다는 것은 하나의 진실을 마련하는 일 / 그것은 외로운 작업 / 벅차고 눈물겨운 일이다. (‘노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