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인간 존재의 의미』와 진화론 공부의 의미

2022-01-26 69

[서평] 『인간 존재의 의미』와 진화론 공부의 의미

– 작성: 이종훈 변호사 (법무법인 시민) (2022.1. 24.)

 

지난 연말 E. O. 윌슨 교수가 별세했다. 『인간 본성에 대하여』와 『개미들』(공저)로 두 번의 퓰리처상(일반 논픽션 부문)을 수상한 윌슨은 ‘사회생물학의 창시자’, ‘세계 최고의 개미학자’ 등으로 알려져 있다. 과연, 영화 속 히어로 ‘개미인간(antman)’이 몸집의 규모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면서 빌런에 맞서 (양자)세계를 정복한 것처럼, 윌슨은 연구대상의 규모를 자유자재로 조절하면서 편견에 맞서 학문을 정복해 나갔다. “학문의 정복자” : 윌슨의 명저 『지구의 정복자』에 대한 해설의 글에서, 그의 제자이자 한국 생물학계의 석학인 최재천 교수는 스승을 이렇게 칭했다.

사진 출처: 사이언스북스

윌슨의 저작들 중 비교적 최근(2016년)에 한글로 번역된 『인간 존재의 의미 : 지속 가능한 자유와 책임을 위하여』는, 제목 그대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과학적・인문학적 의미를 탐색하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제언하는 책이다.

 

[Ⅰ.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를 통해 윌슨은, 이기적 개체의 이타적 행동을 가능케 하는 ‘진사회성(eusociality)’의 진화 메커니즘을 밝힌다(리처드 도킨스가 윌슨의 『지구의 정복자』를 “온 힘을 다해 집어 던져야 할 책”이라고 격하게 비난할 정도로, 이 주제는 진화학계의 뜨거운 감자이다. 이에 대한 이론적 논의가 『인간 존재의 의미』의 [부록]에 할애된다).

[Ⅱ. 지식의 통일]에서는,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르네상스 시대의 계몽주의 운동을 현대에 부활시켜 통섭(統攝)적 앎으로 나아가자고 제안한다. ‘인문학에 대한 자연과학의 제국주의적 침탈 시도’라는 항간의 오해와 달리, 윌슨은 “인문학이야말로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임을 거듭 강조한다.

[Ⅲ. 다른 세계들]은 한 편의 여행스케치이다. (개미군집 등) 초유기체를 구성하는 (개미 등) 유기체들의 정교한 감각 세계로, 그리고 “새로운 증거에 맞추어서 규칙을 바꾸는 과학적 게임”을 따라 외계인의 세계로, 저자와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다.

[Ⅳ. 마음의 우상들]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윌슨의 탐구는 계속되는데, 생물학의 도움을 받아 본능과 종교, 자유 의지 등의 철학적 주제에 대해 연구한다. ‘물리적 실재’와 ‘사회적 실재’를 다른 스펙트럼에서 사고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통섭적 이해의 가능성을 증진시킨다.

[Ⅴ. 인간의 미래]에서 윌슨이 밝히고 있듯이, “과학 기술 시대에 자유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했다. 유년기를 거쳐서 어른이 될 때 그러하듯이, 우리에게는 선택의 범위가 훨씬 더 넓어졌지만 그에 따라 위험과 책임도 훨씬 더 늘어났다.”

윌슨은, 인간의 감각이 닿지 않는 시공간에의 천착을 통해 (억겁 속에서 찰나에만, 광활 속에서 티끌에만 존재할 수 있는) 인간에게 겸허를 호소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문학과 과학이 결합된 계몽주의 운동에의 애착을 통해 (자기와 세계에 대한 앎을 향한) 인간의 야망을 자극한다. 이러한 겸손과 야심의 모순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데, 윌슨의 말마따나 애초에 우리는 모두 “성인이자 죄인인, 진리의 수호자이자 위선자인 유전적 키메라(chimera)”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 종의 이러한 이중적 본성은 우리의 두 발이 딛고 있는 이 행성에서 인류문명을 탄생시킨, 유구한 진화의 인과(因果)이다. 따라서 문명의 도래를 가능케 한 생물학적 인간 본성을 신성한 수탁물로서 보호하자는 이른바 ‘실존적 보수주의(existential conservatism)’는 윌슨에게 필연적이다. 윌슨에 따르면, 우리 인간 본성에 어울리는 서식 가능한 행성은 단 하나밖에 없으며, 우리에게 “불멸할 기회도 단 한 번뿐”이다.

열띠게 사회과학을 공부하던 학생 시절, 인간 본성 운운하는 진화론적 설명을 거들떠도 보지 않던 적이 있었다. 건조한 수학 그래프 안에 ‘인간 존재의 의미’를 가두려는 시도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테제를 숭상하는 유물론자임을 자처하면서도 그랬다. 돌이켜보건대, (인간의 머리처럼) 위를 향한 야심만 있고 (인간의 발처럼) 아래를 향한 겸손이 없었던 탓일 테다. 그리고 진화론에서 이야기하는 ‘인간 본성’을 ‘약육강식’, ‘적자생존’ 등 냉혹한 말들과 일맥상통하는 무엇인가로 오인한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참된 유물론자가 아니었다.

『공감의 시대』(프란스 드 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등과 같이, 공감과 연대의식, 공정성과 정의에 대한 감각 등이 다름 아닌 바로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밝혀낸 진화론 연구가 국내에도 많이 번역되고 있다. 이러한 특질들이 진화적 산물이라는 것은, 이것들이 소위 ‘이기적 유전자’만큼이나 우리 인간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진화론적 본성이 존재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진보를 포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고 인간의 ‘진사회성’을 사회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통섭적으로 파악함으로써만, 우리는 인간의 따뜻한 본성이 가장 잘 발현될 수 있는 사회체제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이타성이 집단 차원에서 작동하는 자연선택의 산물이라는 윌슨의 견해 역시, 사회집단의 구조를 적절히 설정함으로써 공감과 연대의 인간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지지한다고 믿는다.

윌슨이 위대한 것은 그의 학식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자 제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을 서슴지 않았으며, 후학들의 힐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 발견된 증거들에 입각하여 (한 때 자신이 주창한) 이론을 비판하기도 하였다(물론 그 당부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지만 말이다). 지적 겸허와 지적 야망을 두루 갖춘 윌슨에게 “학문의 정복자” 작위는 아깝지 않다. 그의 명복을, 감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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