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민변의 든든한 살림꾼, 조영관 변호사 인터뷰

2015-12-23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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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관변호사를 보면 듬직하다는 말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언제 봐도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묵묵히 맡은 일을 하는 사람, 입담이면 입담, 재치면 재치, 알고 보니 피아노에 기타까지. 다재다능한 조영관변호사가 2015년의 마지막 회원 인터뷰의 주인공입니다. 내년에는 아빠가 된다고 하니 조변호사를 만나시면 덕담 한마디씩 부탁드립니다~

 

김지미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조영관 저는 83년생이고..보기보다 엄청 어리죠?(웃음) 변호사시험 3회 합격했고요, 민변은 2012년 로스쿨 다닐 때 특별회원으로 가입했어요. 지금은 민변에서 회원팀과 노동위원회를 하고 있고요. 법무법인 덕수에서 소속변호사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광주 전남고 출신이시네요. 제가 마음대로 정한 거지만 민변에 전남고 3대 인재가 있죠. 김진국, 설창일, 조영관.(웃음) 그리고 민변은 아니지만 8:1의 주인공 김이수 재판관님도 전남고 츨신이시죠.

 

조영관 2대 인재라고 해 주세요. 저는 아직.. 저는 태어난 곳은 화순이구요. 광주에서 자랐어요. 고등학교 이야기를 조금 하면 학교가 무등경기장이라고 야구경기장 바로 옆에 붙어있었어요. 제가 야구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때에는 6회 말이 지나면 무료입장을 했어요. 그러면 야자 끝날 때쯤 1학년 때는 야구를 보러가고, 2학년 때부터는 굳이 가지 않더라도 알 수 있어요. 함성소리로 이거는 홈런, 이거는 2루타 우리가 졌다 이겼다를 알 수 있죠. 야구장 근처에 있어서 해태타이거즈 선수들도 많이 보고.. 학교 내부적으로 여러 가지 행사들도 있고, 동아리나 모임이 되게 많아서 선후배 사이는 되게 끈끈한 학교예요. 저도 고등학교 때 밴드 활동을 하고 그랬어요.

 

김지미 광주 출신인데 사투리를 전혀 안 쓰시네요.

 

조영관 아버지, 어머니가 안 쓰셔서 그런 것 같아요. 아버지는 지방 신문사 기자출신이시거든요. 어머니는 피아노학원 선생님이셨어요.

 

김지미 엄마가 피아노학원 선생님이면 아이들의 부러움을 많이 샀겠는데요.

 

조영관 애들 사이에서 좀 그랬었죠. ‘우리 집 피아노 8대 있다.’ 뭐 이런 거(웃음).

 

김지미 당연히 피아노도 좀 치시겠는데요?

 

조영관 엄청 혼나면서 배웠던 것 같아요. 가정 스토린데 원래 아버지가 결혼할 때 직업이 없으셨어요. 아버지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오셨는데 졸업한 이후에 사회운동을 하셨다고 해요. 저 태어나기 전 아빠의 옛날 사진들을 보면 미포조선소에서 일을 하셨던 사진이 있더라고요. 어렸을 때는 서울대 졸업한 사람이 왜 이런 곳에서 일을 했을까 궁금했어요. 어머니는 대학 졸업하기 전 선을 보고, 졸업식 때 가족들이 만나고, 3월 1일에 결혼을 하셨대요. 엄청난 속도가 잘 이해가 안 가지만 옛날에는 다 그렇게 했다고 하시더라구요. 어머니는 피아노를 전공했지만 피아노 학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남편이 직업이 없으니까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신 거죠. 그래서 집이 피아노학원이었어요. 집이랑 피아노 학원이랑 같이 있어서 학교 갔다 오면 엄마가 마땅히 할 거 없으면 피아노나 쳐라, 그래서 피아노를 치고 그랬죠. 엄청잘 치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엄마가 피아노학원 하시는데 안하면 안 되니까 조금은 했었어요. 중학교 때 대회도 나가고 그랬어요. 고등학교 들어갈 때쯤 전공할 거 아니면 더 안 해도 된다고 하셔서 그만 뒀어요.

 

김지미 어렸을 때부터 음악이나 악기하고는 자연스럽게 친해졌겠네요. 아까 밴드했다고 했잖아요. 그럼 건반 담당이었겠네요.

 

조영관 처음에는 통기타 치는 동아리에서 건반을 했었는데 건반이 잘 눈에 안 띄어요. 건반은 항상 위치가 맨 뒤거든요. 맨 뒤고 양손을 다 쓰고 서 있어야 하니까 잘 티가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기타하고 싶다(웃음). 그래서 1,2학년 때는 건반하고, 3학년 때는 기타를 했어요.

 

김지미 이렇게 다재다능할 줄이야. 전남고 3대 인재가 맞다니까요(웃음). 이런데 공부까지 잘해서 고대 정외과를 가셨어요. 외교관이 꿈이었다구요.

 

조영관 이건 좀 부끄러운 이야긴데, 고등학교 때 제가 공부를 잘 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수능대박 케이스에요 제가. 근데 어렸을 때부터 영어공부를 좋아했어요. 저희 때가 이해찬 1세대여서 야자 없고 고등학교 때 6시면 학교에서 나와서 자기 공부하고 싶은 거 하라고 할 때였거든요. 저는 영어학원을 다녔는데 그때 외국사람을 처음 봤는데 어린 마음에 너무 신기한 거에요. 그때가 또 한참 유엔 같은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꿈을 꾸는 사람이 많았을 때였거든요. 그런 곳에 가면 되게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국제기구, 외교관 이런 거 하면 좋겠다 생각해서 정치외교학과를 가게 된 거죠.

 

김지미 영어 잘 하시겠는데요.

 

조영관 아니요. 잘하지는 못해요. 긴 문장이나 어려운 단어 이런 건 못하고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짧고 단정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건 잘해요. 아내도 같은 과 출신인데 아내의 영어를 들으면 교과서적인 영어에요. 의사전달이 되게 훌륭하고 뉘앙스도 잘 전달이 되구요. 저는 그 정도는 아니예요.

 

김지미 외교관을 꿈꾸고 대학을 갔는데 대학 생활은 어땠어요?

 

조영관 광주에서 계속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친척들 보러 서울에 한두 번 오기는 했었는데, 서울에 와서 오래 살거나 이런 건 대학 때가 처음이었죠.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수시 시험을 보러 왔었는데, 저는 지하철에서 한강을 처음 보고 바다인 줄 알았어요. 너무 커서(웃음). 그래서 내가 잘못 가는 거 아닌가 엄청 불안해했었어요. 그리고 이것도 되게 부끄러운 이야긴데, 전 지하철의 벨을 눌러야 문이 열리는 줄 알았어요(웃음). 그래서 그때 광주에서 기차를 타고 와서 용산에서 내려서 1호선을 타고 신설동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고대로 면접을 보러 갔었는데, 그때 신설동역 내리기 전에 제발 누가 눌러라 어디서 누르는지 모르니 그냥 누가 눌러라 속으로 계속 그랬어요.(웃음).

 제가 이 이야기를 신입생 환영회에서 했어요. 선배들이 저를 되게 가여이 보면서 어리버리한 애구나,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때 기숙사에 살았었는데, 밤마다 선배들한테 전화가 와서 과 실로 와라. 그때 선배들이 과실에서 족발 시켜 먹고 기타치고 놀아주셨죠. 학기 초에 입학해서 별로 할 것도 없고 재미도 없고 그래서 저녁에 과 실에 가서 선배들이랑 그렇게 친해졌어요. 그런데 선배들이 한 3월 달쯤 되니까 등록금 집회 가야 된다고 하잖아요. 등록금 집회까지는 학교 내에서 한 거니까 그냥 갔어요. 대학생 때는 이런 것도 하는 거구나. 그땐 되게 귀엽게 했던 것 같아요. 학교 집회도 풍선 같은 거 불고 그랬어요. 5월 달 쯤인가? 고대 근처 안암동에 철거촌이 하나 있었어요. 저녁에 8시 30분쯤 친한 선배한테 전화가 와서 철거촌에 오늘 가야되는 일이 있다. 그때 조금 무서웠긴 했죠. ‘아, 가야 되나요?’ 그러니까 그 동안 니가 먹은 족발이 있는데(웃음), 족발 값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래서 학교 내에서 하는 거 빼고 처음 외부 집회에 갔었는데 그때는 엄청 무서웠어요. 그때 용역 깡패들이 집에 낙서하고 꼭대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돌아가면서 불침번 비슷하게 하고 안에서 애들 가르쳐주고 이런 것을 조금씩 하게 됐는데, 자주 가니까 선배들이 다른데도 데려가고. 그렇게 하면서 조금씩 학생회 활동들에 참가를 하게 됐고, 2학년 때는 학생회 집행부 하라고 하고 이렇게 되면서, 내가 학생운동을 하고 있구나 이런 걸 스스로 깨달은 건 3학년 정도 됐을 때, 다이어리를 봤는데 집회일정만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한 6년 정도. 과 학생회장 하고, 단과대 학생회장 하고, 총학생회 사무국장하고 그렇게 대학생활이 다 지나갔어요.

 

김지미 이야기를 들어보니 처음에 선배들이 가여이 여긴 게 아니라 쟤는 꼬시면 넘어오겠다 이렇게 생각한 거 같은데요(웃음).

 

조영관 광주 출신이라고 할 때도 선배들이 되게 좋아했어요,.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좋아했을 수도 있겠다 싶더라구요. 아무래도 광주여서 시위나 집회문화에 대해서 낯설지 않았어요. 광주는 작은 도시라 어렸을 때 시내에 있는 학원을 다녔었는데 중.고등학교때 일주일에 한 번씩은 집회 하는 걸 봤어요. 시위대가 최루탄 던지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싫어하거나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거든요. 차가 막혀도 막히나 보다. 학원 갈 때 집회를 하면 안 오는 애들이 많았고, 수업이 잘 안될 때가 많은데 그럴 때 집에 가서 엄마한테 “데모한다고 선생님 수업 잘 못했어” 라고 해도 그런가 보다 이런 분위기였어요. 그래서 서울역에서 집회 있으니 같이 가자고 했을 때도 낯설거나 이런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나를 더 좋아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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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조변호사님 얘기를 듣다보면 조변호사님은 어떤 이상을 추구했다기보다는 사람이 좋아서 족발 먹고 과 실에 있다가 서서히 학생회 활동에 참여하게 된 케이스예요. 처음엔 굳은 신념을 가지고 활동을 하다가도 고학년이 될수록 서서히 발을 빼는 경우가 많거든요. 남학생은 군대를 가고 여학생은 취업전선으로 뛰어들고 하는 식이죠. 6년동안 학생회 활동을 쭉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조영관 사실 저는 모범적으로 활동했던 케이스는 아니에요.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하는 평가를 들어보면 “조영관은 도망갈까 늘 불안한 사람이었다.” 그 정도예요. 그래도 운동의 구심이 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늘 그 주위에 있고 싶었어요. 처음에 동기들이 저한테 과 학생회장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운동에 대해서 강한 신념이 있고 열심히 잘 하는 사람 많은데 내가 이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했었는데 어떻게 하게 되었죠. 학생회장 같은 대표자는 복 받은 사람들이예요. 부끄럽지만 지금도 선후배들이 학생회장했던 형, 동생으로 기억해주거든요. 실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집행부들인데 그 사람들은 인정받고 기억되는 경우가 잘 없어요. 그런 이유들로 힘들어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대표자를 하는 복을 받았으니 도망치지 않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저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방황을 많이 했는데, 총학생회 사무국장하고 나서 군대를 갔어요. 한걸음 물러난 거죠. 광주에서 공익으로 군복무를 하면서 책읽기 모임에 참여를 했는데, 거기서 또 활동하는 분들을 만났어요. 멀리 못가더라구요. 거기서 활동하는 노무사분들이 계셔서 제대하면 노무사 시험을 보고 민주노총 법률원에서 일을 하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어요. 전업활동가가 되지는 못할 것 같고 그렇다고 해 오던 활동과 전혀 무관하게 살 수도 없고, 돈은 벌어야겠고 이런 복합적인 상황에서 노무사 시험을 보자라고 결심했고 복학해서 공부를 했죠.

 

김지미 그때는 외교관의 꿈은 완전히 접은 건가요? 외무고시는 한번도 보지 않으셨어요?

 

조영관 아니요~ 외무고시는 2번이나 봤어요. 부모님께서 “너는 왜 군대를 가지 않고 학교를 다니느냐”라고 물어보셔서 고시 준비한다는 핑계를 댔었죠. 그 덕에 시험접수를 하고 1차를 2번 봤는데 진짜 한 글자도 공부를 하지 않고 가서 제 뒤에 있던 사람이 되게 불안했을 거예요. 진짜 빨리 풀고 잤거든요.(웃음)

 

김지미 그럼 노무사 준비를 하다가 마침 로스쿨이 생겨서 전환을 하신 건가요?

 

조영관 제가 그렇게 순탄한 인생은 아니었어요.(웃음) 노무사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어요. 졸업도 해버려서 백수가 된 거죠. 원래 학교 다닐 때 생활비는 제가 아르바이트해서 벌어 썼는데. 집에서 취직해라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취직은 해야겠고 뭐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에 그때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에서 인턴을 뽑는다는 공고를 봤어요. 공감 인턴을 하면서 부모님께는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다라고 말해서 취업 압박을 누그러뜨리고, 노무사 시험을 1년 더 준비한 거죠. 그런데 또 떨어졌네.(웃음) 그때 공감에서 제 멘토 변호사님이 정정훈 변호사님이셨는데, 좌절하고 있는 저에게 로스쿨 한 번 가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해주셨어요. 큰 영향을 받았죠. 정작 본인은 잘 기억을 못하시더라구요. 로스쿨 입학하는 과정이나, 새내기 변호사로 지내는데 여전히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

 

김지미 편견일수는 있겠지만 고대 정외과를 갈 정도면 공부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을 것 같고 그럼 노무사보다는 사법시험을 먼저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조영관 지금 생각해보면 빨리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능력도 부족해서, 사시는 언제 될지 예측이 안됐었고 노무사는 그 때 생각에 1~2년 정도 하면 될 것 같았거든요. 빨리 뭔가를 해서 무직의 설움을 극복하자라는 생각이 더 컸어요.

 

김지미 변호사나 법조인에 대한 꿈이 전혀 없다가 다른 사람의 제안으로 로스쿨을 가게 된 거잖아요. 인생의 방향이 급변하게 된 거네요.

 

조영관 학생운동을 할 때는 변호사들보다 열심히 활동하는 노조 활동가들이 좋아보였고 전문가들이 훈수를 두는 것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공감 인턴하면서 이런 방식으로 자기역할을 하는 전문가가 필요하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죠. 그렇지만 그때도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안했던 것 같아요. 로스쿨 학업계획서에 ‘앞으로 내가 되고자하는 법조인상’을 이주민관련 변호사가 되고싶다라고 쓰면서 내가 변호사가 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은 했지만 처음부터 변호사가 되고 싶어서 로스쿨을 간 건 아니었어요.

 

김지미 학교 다닐 때 이주민관련 활동을 조금 했다고 하셨고, 지금도 주된 활동이 이주민 활동이잖아요. 일반적으로 변호사가 되고 나서 흔히 전문분야라고 하는 나만의 활동영역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조변호사님은 반대 케이스인거죠. 자신이 활동하고 싶은 영역을 먼저 정하고 변호사가 된 거니까요. 지금 이주민 관련해서 법률지원활동을 굉장히 활발하게 하고 계세요. 매주 일요일 성균관대 라파엘 클리닉에서 무료법률상담을 하고, 매주 화요일마다 서울글로벌센터에서 인권법률상담을 하고, 중국동포신문에 고정적으로 칼럼을 연재하고, 이주민 법률 상담, 소송 담당까지 하고 계시네요.

 

조영관 제가 혼자 다하는 것은 아니고요, 저희 사무실에 계시는 민변 회원이시기도 한 윤영환 변호사님하고 같이 대림동에 이주민 지원센터 ‘친구’라는 단체를 운영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저하고 윤영환 변호사밖에 없어가지고 매주 상담을 했었는데 지금은 자문 변호사단으로 참여하시는 분들이 늘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돌아가면서 해요. 매주 일요일 라파엘 클리닉이라고 천주교재단에서 세운 이주민무료진료소인데, 탁자 하나 놓고 법률상담하고, 서울 글로벌센터는 서울시 위탁사업으로 이주민 체류를 돕는 활동을 하는데, 고지운 변호사님하고 저하고 번갈아 가면서 한주씩 하고 있구요. 동포신문에 칼럼 쓰는 것도 이주민들에게 필요한 법률 상식 같은 걸 돌아가면서 쓰는 거고, 센터도 1주일에 1번 정도 가서 법률상담하고 있어요.

 

김지미 특별히 이주민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요?

 

조영관 중 고등학교때 외교관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외국인에 대해 관심은 있었어요. 그런데 외국인과 이주의 문제는 다르잖아요. 그걸 경험하게 된 거는 03년도에 있었던 명동성당 이주노동자 농성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들을 강제추방을 하겠다고 정부가 방침을 정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 했고,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연대활동을 했었어요. 거기에서 많은 걸 느꼈어요. 첫 번째는 저는 노동자들의 권익의 문제, 노동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이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주 노동자들은 더 열악한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어요. 두 번째는 저에게도 편견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외국인들을 대할 때 피부색이 다르고 말이 잘 안 통하니까 좀 두렵기도 했었는데, 같이 2박3일 정도 지내고 나니 친해지더라구요. 그리고 빨리 친해질 수 있었던 게 이 사람들은 반말밖에 못해요. 처음에는 그게 재밌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들었던 말이 다 반말밖에 없었던 거에요. 그래서 반말밖에 할 수 없었던 거죠. 이 사람들은 눈치가 되게 빠르고 또 욕을 잘 알고 있어요. 어떻게 저런 걸 알지 싶을 정도로. 처음에는 그게 웃기고 재밌었는데 같이 지내다보니까 그들이 이런 상황이었겠구나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경험들이 굉장히 컸고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생겼고, 그렇게 돼서 지금까지 하게 된 거예요.

 

김지미 이주민센터 ‘친구’에 대해서 소개 좀 해 주세요. 변호사님 페북에서 보니 카페인 것 같던데요. 영화 상영도 하고.

 

조영관 덕수에 계시는 윤영환 변호사님이 주도를 하셔서 만든 단체이구요. 처음 만들어졌을 때 저는 로스쿨 2학년 학생이었어요. 그때 저는 라파엘클리닉 상담을 주말에 참여했고 고지운 변호사님이 상근 변호사로 계셨어요. 처음에는 같이 하는 사람들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시행착오들이 많았어요. 대림동에 작은 사무실에 책상 하나 놓고 상근변호사 한명 있으면서 지나가다 들리는 사람들 상담하고 그랬죠. 그러다가 이주민들이 법률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만 오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편하게 올 수 있는 공간을 하나 만들었음 좋겠다라고 해서 펀딩작업을 하고 그 옆에 건물 3층을 임차를 해서평상시에는 저렴한 가격에 이주민들이 편하게 와서 쉬다 갈 수 있도록 카페로 영업을 하구요. 영화상영회도 하고 법률교육도 하고 단체로서 하는 다양한 활동들을 해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사무국장을 하고 있고 윤영환변호사님이 대표로 계시는데 올해 많이 성장했어요. 몽골 유학생 한분 채용해서 상근으로 있고, 이주민 단체에서 오래 일을 하셨던 활동가 한분 모셔서 센터 소장님으로 계시고요.라파엘 클리닉이 성균관대 로스쿨 바로 옆에 있어요. 그래서 성균관대 로스쿨 학생들이 처음 상담왔을 때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때 상담을 같이 했던 친구들이 졸업하고 변호사가 돼서 자문변호사로 결합해서 15명 정도로 자문변호단이 꾸려져서 지금은 돌아가면서 법률상담을 해주고 있습니다.

 

김지미 재정은 어떻게 해요? 카페가 수익이 날 것 같지는 않는데요.

 

조영관 최근에 한 달 매출 100만원 달성해서 저희 뒷풀이 했어요.(웃음) ‘친구’를 후원해주시는 분들의 후원금으로 카페 임대료, 기본적인 단체운영비로 사용해요. 상근자들 급여는 윤영환 변호사님이 개인적으로 지원을 하고 계시는 상태구요. 내년 목표가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카페를 전환하는 거예요.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전환을 하면 인건비나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요. 하지만 일반 후원이 절실한 상태예요. 상담을 하면 정말 억울한 사정이 있는 외국인들이 있는데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워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외국인에 대한 법률구조제도가 있지만 소송에 국한되어 있고, 출입국 행정이나 노동부 절차등에는 아직까지도 도움이 많이 필요한 상황이에요. 저희 단체 재정이나 역량도 아직은 부족한 상황이에요. 그래서, 아직은 개인적으로 무료로 변론을 하기도 하고, 사재를 출연해서 하기도 하는데 상근변호사를 고용하는 것이 새해 목표인데 많은 도움이 필요하답니다. 그래서,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있는 민변 변호사님 중에서 저희 단체에 후원하시고 싶은 분들이 계시다면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네이버에 이주민 지원센터 친구라고 검색을 하시면 다양한 안내가 되어있습니다. 연락을 주시면 언제든지! 제가 직접 가서라도!!(웃음)

 

김지미 대림동에 있으면 주로 조선족 분들이 많이 오실 것 같은데 주로 상담하는 내용이 어떤 것들인가요?

 

조영관 방문하시는 분들은 조선족이 상대적으로 많긴 하구요. 조선족 분들이 언어가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보습득능력이 더 빨라서 그런 것 같긴 한데, 다른 나라 외국인들도 많이 오세요. 저희가 통계를 내보니 2014년도에 40개 국가 260명 정도가 상담을 받았고 그 중에 60건 정도 소송구조로 진행을 했어요. 올해는 그거보다 조금 많을 거 같아요. 경찰서나 이주민단체에서 연락이 많이 오는 편이예요.

 

김지미 대림동 근처에 일종의 브로커들이 많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피해를 받는 경우도 있는 것 같고. ‘친구’가 널리 알려져서 이주민들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조영관 브로커들의 가장 큰 문제는 절박한 상황을 이용하는 거거든요. 저희들도 행정사나 여행사에서 사기를 당해서 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인터넷에서 서식 다운받아서 입력해주고 30만원씩 받아요. 불가능한 것들을 약속하고 수백만원씩 받기도 하고요. 아직 국가에서 이주민들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법률적인 도움이나 구조방법을 제공해주는 것은 없거든요. 가정법원에서 이주민 출신 상담원들을 배치하거나, 외국인 가사문제에 대해 법률구조를 하고는 있는데 아직 민간분야에서는 공인되거나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데가 없어요. 저희 단체가 좀 더 성장해서, 브로커를 통한 편법적인 방법이 근절되고, 이주 외국인들이 제대로 된 법률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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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민변에서는 노동위원회, 회원팀 활동을 하시고 작년에 1년차 새내기 변호사였었는데, 작년에 세월호가 터지면서 신입회원답지 않게 열심히 하셨어요. 우리가 처음 본 것도 청운동에서였죠? 조영관 박인동 콤비가 항상 집회 때마다 있었고, 작년에 활동했던 신입변호사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을 조영관 변호사라고 얘기를 많이 했었어요. 그래서 좀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올해 총회에서 신입모범회원상, 솔직히 기대를 하시지 않았나요?(웃음)

 

조영관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1년차 때가 가장 시간이 많잖아요. 그냥 열심히 따라다닌 거에요. 저도 2년차밖에 안되었지만 일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니까 시간내기가 어렵더라구요. 사실 이 대목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제가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는데, 저희 사무실인 법무법인 덕수에 훌륭하신 2분의 회원이 계세요. 윤영환변호사님, 이민종 변호사님이 민변에 관심이 많은 회원이시자 저의 고용주시기도 한데요. 사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민변에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고, 1년차 때는 거의 배임(?)수준으로 민변 일을 많이 했는데 그때마다 적극적으로 민변 활동을 할 수 있게 지원해주셨고 배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저랑 박인동변호사가 세월호 활동 할 수 있었던 것도 선배님들이 하라고 배려하고 지원을 많이 해주셔서 가능했었던 거죠. 사실 1년차 변호사들 되게 일하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언제 가야하는지 몰라서 못하는 경우들이 많거든요. 저희들은 권영국 변호사님이 세월호 특위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각 사무실에서 배려를 해주셔서 따라다닌 것에 불과한데 그런 걸로 모범적인 활동을 했다고 하면 민망하죠. 오히려 세월호 특위는 선배 변호사님들의 파워를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저랑 박인동, 손명호변호사는 주로 실무적인 일들을 했었어요. 집회 있으면 가고 편집하라고 하면 편집하고 이런 일들이어서 저희가 만들어서 했던 게 아니라 깔아주신 멍석에 그냥 열심히 했던 것뿐입니다.

 

김지미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아주 중요한 일을 하셨던 게 작년이랑 올해 회원 야외행사로 성곽길하고 부암동을 갔어요. 그 때 양질의 간식을 조변호사님이 손수 장만해서 일일이 포장을 해 오셨잖아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보이는 곳에서 굉장히 열심히 하셔서 이런 사람은 신입모범회원상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모범회원상을 받을 것이다라는 얘기들도 있었거든요. 그렇게 때문에 향후 2~3년안에 모범회원상을 받으실 수 있도록 쭉 열심히 해 주실거죠?

 

조영관 저는 제가 진짜 모범적인 활동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삼형제 첫째거든요. 그리고 막내가 저보다 10살이 어려요. 부모님께서 딸을 낳아보시겠다고 노력하셨는데 아들이 나와서 삼형제인데. 부모님께서 맞벌이 하시니까 초등, 중학교인 동생들 챙기고 그런 일들을 당연히 해야 했어요. 모범회원상 받는 분들은 민변과 지금 사회에 꼭 필요한 활동을 기획하시고 진짜 모범적인 활동을 하시는 사람들이잖아요. 저는 그냥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것 뿐이니까요. 상을 받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도 별로 해본 적은 없어요.

 

김지미 회원팀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고 2년차가 지나가고 있는데, 이때가 아이디어가 가장 많을 때거든요. 그래서 민변이 이랬으면 좋겠다, 민변이 신입회원이나 저년차 회원들을 위해서 이런 것들을 해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부분이 있을까요?

 

조영관 민변이라는 단체에 대해서 1,2년차 변호사들이 제일 먼저 느끼는 감정은 부담감일거예요. 저 역시도 그랬거든요. 저 스스로 “조영관 변호사입니다” 라고 소개하는 것도 아직은 무거운 느낌인데 민변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조직이기 때문에 편하게 생각하기는 어렵거든요. 그래서 저는 외람되지만 친절한 조직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있어요. 저년차 변호사들이 쉽게 오고갈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김지미 항상 지적이 되는 부분인데요 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할까요?

 

조영관 제가 회원팀하면서 다양한 회원행사를 몇 번 했었잖아요. 이게 되게 좋은 것 같아요. 저년차 변호사들이 와서 편하게 참여할 수 있는 가벼운 행사가 있고 그때 와서 멤버십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관심 있는 위원회 소개하고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송무를 민변 선배들하고 같이 할 수 있는 경험, 선배님들이 진행한 송무 기록들을 민변에서 적극적으로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들을 했어요. 민변이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지만 변호사단체로서의 색깔이 가장 크잖아요. ‘이 조직이 내 조직이구나, 이 공간이 내 공간이구나’ 하는 경험은 아무래도 선배변호사들과 소송을 같이하는 상황들이 생겼을 때, 같이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 같아요. 공동변호인단 모집하는 것들도, 몇 개를 같이 해보기는 했는데, 열심히 못해서 죄송한 것이 먼저지만, 그래도 아쉬운 부분은 공동변호인단의 운영에 대한 관리를 민변에서 적극적으로 같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점이에요. 실무변호사님들이 사건 대응하기 위해서 필요한 법리들을 만들거나 법원 일정들을 챙기거나 하는 것에 시간을 많이 쓰는 경우 많기 때문에 1,2년차 변호사들을 같이 챙기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거든요. 신입 변호사들 입장에서는 좀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구요. 그래서 민변 차원에서 TF팀을 꾸리거나 공동변호인단을 모집한다는 것들을 더 신경을 써서 회원들을 같이 묶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민변에 다양한 위원회가 흥해야 위원회별로 신입변호사들이 안착하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구조인데, 개별 위원회에서 공통적으로 1, 2년차 변호사들에게 필수적,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프로그램 같은 것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노동위같은 경우에 올해 처음 1년차 변호사들 실무수습 끝날 때 선물을 주는 프로그램을 시도해 봤거든요. 그런 기본적인 몇 가지 아이템들을 위원회별로 권장하고 제안해서 각 위원회별로 이루어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되면 민변에서 신입변호사들이 뿌리내리기 좋을 것 같아요.

 

김지미 그럼 반대로 저년차들은 이렇게 하면 빨리 적응을 하고 안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동기, 후배들에게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해준다면?

 

조영관 민변에게 가지는 부담감, 무게, 두려움 이런 걸 크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마찬가지로 그랬지만 민변에서 내가 뭔가를 하겠다고 말하기엔 내가 너무 부족하지 않나라는 생각들을 되게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공동변호인단 모집한다거나 민변 행사한다거나 할 때 내가 거길 가도 되나, 나는 아직 잘 모르는데 1년차인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런 부담감이나 어색함이 있어도 그나마 1,2년차 때 뭐라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1,2년차때 뭐라도 모임이 있거나, 위원회 행사가 있다고 할 때, 가입을 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들 자기 전문분야를 어떻게 찾아야하는지 잘 몰라서, 특정위원회를 선택한다는 것에 두려움도 좀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하나만 고르는 것도 아니고 여러 개 고를 수 있고, 전문 분야를 찾는 게 전문분야가 완성되어서 찾는 게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해보아야 알게 되는 거니까, 위원회 활동들을 주저 없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사실 저도 노동위원회 활동을 하고 있지만 노동문제에 대해서 관심만 있지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노동위원회 가입신청을 했고, 활동하면서 배우는 정보들도 많거든요. 자기가 뭘 해야 할지 모를 때는 관심 있는 위원회에 지원하고 신입회원 엠티 자료집 보면 각 위원회별 담당자 연락처 안내해주잖아요. 그거 보고 문자 보내고 모임 있으면 가고 이렇게 하면 그 과정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이 있을 테니까요. 적극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김지미 그럼 마지막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 인터뷰가 올해 마지막 인터뷰예요. 작년에도 연초에는 선배님의 덕담을 듣는다면 연말에는 후배들의 쓴소리를 들어봤으면 좋겠다 생각을 했거든요. 선배들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조변호사님이 후배들 대표로!

 

조영관 아니 이것은 익명성이 보장되어도 할 수 있을까 말까 한데! 뉴스레터를 통해서 민변에 쓴소리를 하라는 것은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웃음)

 

김지미 조변호사님이 회무에 적극 참여하고 계시니까 민변이 이런 점은 정말 좋지만 이런 점은 바뀌었음 좋겠다, 이런 활동은 더 적극적으로 해봤으면 좋겠다라는 것이 하나쯤은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조영관 어렵네요.. 다만, 민변에 가입되어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시대는 지났다고 생각해요. 소속회원들이 민변이라는 단체에서 일과 활동을 하면서 실력을 입증을 해야 하는 시기에 왔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기에는 젊은 변호사들은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선배변호사님들은 여러 가지 다른 일들에 바쁜 이유로, 몇몇 변호사들을 제외하고는 회비를 납부하는 것만으로 회원의 의무를 다했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천명 회원시대인데 회원행사 참석률도 저조한 편이구요. 그건 개선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고. 가끔 선배변호사님들께서 1,2년차 변호사들이 적극적으로 뭘 좀 하자고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선배 변호사님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1,2년차 변호사들이 와서 뭘 합시다라고 이런 걸 제안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조직 내에서 뭘 하자고 하는 것을 자주 봐야 할 텐데 그런 것을 잘 보지 못한 상태에서 1,2년차 변호사들이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이걸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 경험한 바가 없으니까 망설이게 되는 경우들이 있거든요. 저는 그런 측면에서 세월호 특위나 이런 것들이 좋은 의미였다고 생각해요.

 두 번째로 전문가로서의 실력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 변호사라는 직역이 어떤 측면에서 보면 본인이 가진 능력보다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민변도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들을 해오면서 실력이 충분히 입증되고 있지만, 조금 더 세밀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선배님들이 진행한 다양한 송무 기록들이나 노하우들이 후배들에게 좀 더 직접적으로 전달되고, 송무를 넘어서 다양한 분야, 특히 국회를 대상으로 한 입법정책들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개진은 보완되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안에 대해서 성명서를 내고 시급하게 대응하는 것은 민변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장점이고 실력인데, 긴 안목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그 정책을 평가하고 법률안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는 부분들에 대한 역량이 강화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지미 정책연구소 같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그런 것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조영관 네 그렇죠. 송무와 관련해서는 올해 공익변론센터가 만들어지니까 이후에 평가를 해봐야할 부분이긴 한데, 아직까지 민변이 법률적인 도움이 필요한 다양한 공익적인 주제와 수요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요. 상근변호사님 같은 경우는 다른 업무들이 많아서 송무와 관련된 업무를 하기는 한계가 있고외부적으로 민변 회원변호사님들이 하시는 것들은 민변 차원에서 충분히 관리되지 못하는 한계도 있는 것 같아서 변론역량 내지는 송무역량을 늘려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지미 오~하나만 말씀드려 달라고 했는데 몇 가지를 하신 거예요?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군요.(웃음)

 

조영관 아닙니다. 사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지 민망합니다.

 

김지미 역시 관심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말씀을 해 주신 것 같아요. 오늘 귀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드리구요. 내년에도 더욱 활발한 활동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영관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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