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그림자 같은 삶의 이야기, 윤인섭 변호사

2015-05-27 44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윤변호사님이 올해 몇이시더라 생각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 56년생이라고 들었음에도 연세가 60이시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내가 하지 뭐‘라는 간단한 대답을 하지 못해 수 없이 고민하고 갈등하며 작은 일에도 존재를 드러내지 못해 안달하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젊은 오빠 윤인섭 변호사님을 만나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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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본인 소개부터 부탁드릴게요.

 

윤인섭 성균관대 83학번으로 89년에 사시 합격해서 연수원 21기입니다. 연수원을 수료하기 전인 92년 2월에 울산에 내려와서 지금까지 울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제가 변호사님에 대해 수소문을 하다보니 ‘제2의 이재명’이라는 이야기가 들리더라구요. 일단은 중,고등학교 모두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을 들어간 공통점이 있으시죠?

 

윤인섭 그렇게 얘기할 것까지는 없고. 제가 56년생인데 6.25이후에 한창 어려울 때라서 부모님이 우리 누나랑 나랑 3남매를 데리고(지금은 8남매가 됐어요) 보따리 하나 메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거죠. 원래 집은 충남 예산이었어요. 제가 용산에 있는 금양국민학교를 52회로 졸업했어요 69년에. 장남이고 집안이 어렵고 하니까 중학교 갈 생각을 안했죠.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그냥 직장생활을 하다가 우연찮게 공부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중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 보고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 보고. 또 직장생활 하다가 뒤늦게 대학을 갔어요.

 

김지미 검정고시를 본 게 몇 살 때인 거죠?

 

윤인섭 내가 방위 근무할 때니까 77년, 78년이었어요.

 

김지미 그러면 20대 초반까지는 국졸 학력을 가지고 계셨던 거네요.

 

윤인섭 내가 검정고시 본 이유 중에 하나가 국졸 학력으로 변변한 취직자리를 구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사람은 많고 일자리는 적으니까. 내가 지금도 기억나는 게 당시 구로공단 입구 대림동에 아폴로 보온병이란 데가 있었는데. 거기를 친구들하고 입사지원서를 냈는데 나만 떨어졌어요. 그 때 거길 들어갔으면 난 아마 다른 인생을 살았겠지. 그래서 공부를 해야겠다 했는데 다행히 공부가 좀 잘 돼서 대학까지 가게 됐죠.

 

김지미 단기간에 검정고시도 패스하고 대학까지, 그것도 성대 법대까지 갈 성적이면 공부를 잘했을 것 같은데, 어린 나이에 일을 할 때도 공부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지 않으셨어요?

 

윤인섭 공부는 하면 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내 자랑 같지만 공장 다니면서도 내가 작업능력이 뛰어났어요. 동료들 사이에서도 금방 반장이 된다던지 그랬죠. 76년쯤에 수출을 하는 추리닝 업체가 있었는데 종업원이 700명 됐어요. 거기서 완성해서 박스에 실어서 출고하는 그런 부서에 있었는데, 거기서 제가 일하는 거 보고 너 반장해 이래서 몇십명 반원이 있는데 반장하고 그랬어요. 국졸 신분으로. 나름대로 일머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기계를 다루다가 손을 다쳐서 산재를 1년간 치료를 받았어요. 그래서 그쪽일은 할 수 없게 된 거지. 그 기회에 공부를 좀 하게 됐고.

 

김지미 그 부분도 이재명 시장님하고 비슷하네요(웃음).

 

윤인섭 내가 연수원 마칠 때 원래 울산 올 생각 안하고 인천이나 성남으로 가려고 했었어요. 만약 그때 울산에 오지 않았으면 아마 이재명 변호사님하고 일을 하거나 인천이나 성남에 정착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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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그렇게 해서 대학을 들어가셨을 때가 83학번이니까, 28살 정도 되었겠네요. 군대까지 다녀온 이후에 신입생이 된 거잖아요. 정규로 중,고등학교를 다니신 것도 아니고 늦은 나이에 대학을 들어갔을 때 문화적인 충격이랄까 그런 것들이 좀 있었을 것 같아요.

 

윤인섭 이상하게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83학번이니까 전두환 통치의 격정기로 저항이 심했죠. 법대 내에도 운동권인 친구들이 있었고. 나 같은 경우는 사회경험이 있기 때문에 흐름을 알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까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은 문화적 충격이 컸을 것 같아요. 시골에서 공부만 하다가 왔는데 정치적인 상황 이런 것들이. 그래서 오히려 걔네들이 충격이 많았지. 난 별로 그런 건 없었던 것 같아요.

 

김지미 변호사님은 어떤 쪽이셨어요? 운동권이셨나요?

 

윤인섭 난 어정쩡했어요. 회색이었죠(웃음). 명동성당 들어갔던 것도..

 

김지미 그거 여쭤보려고 했었어요. 6. 10때 명동성당에 들어가셨다고 들었는데.

 

윤인섭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내가 86년에 사시 1차를 붙고 87년 2차를 앞두고 있었어요. 그 때 다니던 성당에 학습 멤버가 있었어요. 지금 부회장인 이석범 변호사도 우리 멤버였죠. 당시 저는 2차 시험 준비를 해야 하니까 86년 말부터 학습모임 참여를 안 하고 신림동 고시원에 있었는데 6월 9일에 같이 학습하던 후배 한명이 찾아와서는 내일 10일 날 성당의 학습모임 하는 친구들이 신세계 앞에서 모인대요. 형님도 점심 먹으러 바람 쐬러 나오듯이 나왔다 가라고 해서 슬리퍼 신고 나갔어. 갔는데 알잖아요 그때. 대전쟁이 벌어진 거지.

 

김지미 6·10항쟁을 슬리퍼 신고 참여하신 거네요.(웃음)

 

윤인섭 전쟁이 벌어진 거죠. 거기서 3호터널 쪽으로 쫓겼다가, 누가 얘기하기를 나중에 명동성당에서 집결하기로 했대요. 그때 퇴계로가 봉쇄가 됐었어요. 어찌어찌해서 명동성당 들어가는데 성공을 했죠. 들어가고 나서는 얘기 안 해도 알겠지만 못나가니까 그래서 2차시험 포기했지 뭐(웃음).

 

김지미 그때 슬리퍼 신고 안 나가셨으면 합격이 2년 빨랐을 수도 있었네요(웃음).

 

윤인섭 실력이 됐겠나 뭐.

 

김지미 방금 성당 얘기 하셨는데 원래 종교가 카톨릭이셨어요?

 

윤인섭 원래 우리 집안이 불교에요. 아니면 무신론자거나. 내가 아까 산재 당해서 치료 받았다고 했잖아요. 그 때 할 일이 없으니까 대림동에 있는 돈보스코센터를 알게 돼서 거기서 공부를 하고 했는데 그때는 세례 받을 생각을 못했어요. 군대를 갔다오고 나서 보니까 정신적으로 카톨릭이 제일 위안도 되고 사회변화에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들어서, 봉천동 성당에 내가 찾아가서 세례를 받았다니까요. 거기서 이석범 변호사를 만났지.

 

김지미 종교와 사회변화를 매칭 시키기가 쉽지 않은데, 카톨릭이 사회변화에 역할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있나요?

 

윤인섭 대림동에 돈보스코센터라고 있어요. 보스코라는 성인이 계신데 그 분이 이태리에 토리논가 거기에서 직업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역할을 했어요. 이런 운동이 굉장히 괜찮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당시에는 내가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에 운동권하고 접촉할 일이 없으니까 그나마 가장 역할을 할 수 있는 데가 거기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김지미 원래 사회변혁에 관심이 있으셨던 거네요.

 

윤인섭 그랬어요. 열린 눈으로 보면 뭐가 잘못되어 있다는 거 보이잖아요. 내가 부끄러운 게, 지금 처음으로 얘기하는데 나는 유신 때 장발이나 미니스커트 단속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에요. 사회는 규율이 잡혀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나이가 들어서 시야가 조금 깨이면서 뭔가 잘못됐다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들을 고민하게 되면서부터 가치관의 변화가 온 거죠. 그런 적절한 시기에 성당에 들어간 거고. 봉천동 성당이 나한테 큰 영향을 줬어요. 제가 영세를 받은 직후에 광주항쟁이 벌어졌고 봉천동 성당에 있던 한 신부님이 정권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발언을 해서 끌려가서 40일만에 나왔거든요. 우리 청년들이 거기에서 집회도 하고 대자보도 쓰고 유인물도 만들고 그런 일이 있어서, 영세 받을 때까지 가져갔던 생각들을 더 구체화하는 기회가 됐죠. 그래서 아까 말했던 학습 모임도 만들었던 거고요.

 

김지미 학습모임이라는 것이 대학으로 따지면 운동권들의 학습모임 같은 건가요?

 

윤인섭 그런거죠. 그때는 자본론이 없었으니까 정치경제 원론이라든지 볼쉐비키혁명사라든지 우리가 흔히 많이 보는 인문서적들을 그때 많이 봤죠.

 

김지미 이렇게 성당에서 카톨릭 청년운동을 열심히 하시다가 고시를 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하셨던 이유가 있나요?

 

윤인섭 생각의 전환이 되는 과정에서 공부를 하게 되니까 뒤늦게 대학가는 게 별 의미가 없더라고요. 이미 직장생활을 하기에는 시기상으로 늦기도 하고 별로 의미도 없을 것 같고. 그런데 사법고시라는 것은 되면 자격이 생기고 그 자격을 통해서 뭔가 일을 할 수 있겠다. 판사나 검사는 처음부터 생각이 없었고 변호사라는 것을 통해서 일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죠.

 

김지미 노동자였을 때는 오히려 노동운동에 전면적으로 나서지는 않으셨던 것 같은데요.

 

윤인섭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요. 만약에 누가 나한테 와서 학습을 시켜서 했으면 대학을 가지 않은 상태로 더 빨리 접근이 됐겠죠. 77년경에 미아리에 있는 추리닝 공장 다닐 때 제가 노조 대의원까지 했어요. 저는 그래서 이해를 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대의원을. 왜냐하면 제가 대의원을 한 게 그 위원장이 임명을 했거든. 그래서 대의원회에 가서 손들라면 손들고 선물도 좀 받아오고(웃음). 그런 경험들이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것 같아요.

 

김지미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고 연수원에 있으면서 내가 노동운동을 전면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 하에 수료 전에 미리 울산에 내려오시게 된 거죠?

 

윤인섭 연수원에 노동법학회가 있었는데 그게 아마 19기 김칠준 선배가 만든 걸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공법학회, 환경법학회 이렇게 있었는데 나는 노동 쪽에 관심이 있어서 노동법학회를 하면서 현장팀장을 맡았어요. 90년대 kbs 파업 때 우리 사법연수원 21기 노동법학회 현장팀장 자격으로 kbs 파업하는 데 가서 격려금도 전달하고 그런 일도 있었죠.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진행이 된 거에요. 특별히 의식적으로 했다기보단.

 

김지미 민변에 연수원 노동법학회 출신 회원들이 많긴 하지만 연수원 있을 때 학회활동을 하는 것과 노동전문운동 변호사로서 이 분야에 집중을 하기 위해서 연고도 없는 울산까지 내려오는 건 사실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윤인섭 우리 때는 그게 역할분담이 됐어요. 제가 연수생일 때 노동인권회관에 법률상담을 나갔어요. 당시 소장님이 박석운 선생이었는데 박석운 소장하고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면서 진로를 모색하게 된 거죠. 사람 인생이라는 게 우스워요. 원래는 우리 1년 선배 20기에 한 분이 울산으로 오기로 했었어요. 당시 노동법에 대해서 현장에서 친밀감 있게 접근할 수 있는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현장에서 있었나봐요. 그래서 20기 선배 한 분이 울산으로 가기로 돼 있었고 우리는 어디로 갈까, 성남 쪽에도 그런 수요가 많이 생기는데 이재명 변호사님 혼자 그런 것 같고. 부평이나 인천 쪽에는 문병호 변호사님 계시기는 하지만 부족한 듯하고 그래서 그 2군데로만 고민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 20기 선배가 성적이 잘 나와서 판사로 임명이 됐어요(웃음). 그런데 박석운 소장님도 나한테 강요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나는 고향이 충남 예산이지만 아주 어렸을 때 올라왔기 때문에 서울 밑으로 내려와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1년 선배가 안 가게 되니까 그럼 우리 기수에서 누가 갈 사람 없나 하는 판에 그럼 내가 가지 뭐 그래서 오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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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자원을 하신 거에요?

 

윤인섭 네. 모임 멤버들 중에 친한 사람 몇 명 있었는데, 다 지방으로 내려갔어요. 이상호 변호사만 서울에 남았어. 김외숙 변호사는 나랑 같이 내려왔다가 부산으로 갔고, 정주석 변호사는 법무관 갔다가 창원으로 갔고. 그리고 장광수 변호사는 광주로 갔고. 김연수변호사는 대전으로 갔고. 최봉태랑 송해익 변호사는 대구로 갔고. 전국으로 거의 약속한 건 아닌데 그렇게 하방을 해버렸어요. 이상호는 서울이 고향이라고 해서(웃음).

 

김지미 말씀하신 것처럼 연고도 없고 아무 것도 없잖아요. 되게 막막했을 것 같아요.

 

윤인섭 그런데 나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내가 그동안 살아온 것에 비하면 변호사 됐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건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나 생각이 들어서. 우리 집사람하고 89년에 결혼했는데, 애가 91년 10월에 태어났어요. 애가 5개월쯤 됐을 때 내려온 거죠. 황당하죠 한마디로.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92년 2월 6일에 내가 먼저 내려왔죠 내려와서 살 집도 준비해야 하니까. 지금은 울산이 광역시가 되어서 도시의 기능이 갖춰졌는데 90년도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울산에 제일 큰 문제는 식수 문제였어요. 도심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지하수로 해결했는데, 이 지하수 개발을 못해놓으면 물이 없는 거죠. 그리고 공해가 심했서 창문을 열어놓을 수가 없었어요. 빨래를 널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때는 ktx가 없으니까 북구에 공항근처에다가 조그만 아파트를 하나 얻었어요. 5개월 된 애기를 키워야 하는데 빨래감이 많잖아요, 그런데 지하수 물이 안 나와서 1년 만에 지금 사는 옥동쪽으로이사를 하면서 다른 거 하나도 안 봤어요. 물이 잘나오느냐 그것만 봤죠.

 

김지미 사모님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윤인섭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집사람 자랑을 잠깐하면, 쉽게 말하면 순진한 건지 고집이 좀 센 건지 모르겠는데. 봉천동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하면서 만났어요. 몸집도 조그마한데 강단이 있어요. 명동성당 농성할 때 마지막 점거 협상이 돼서 나오기 이틀 전인가 하루 전인가 그럴 거에요. 거기를 들어왔더라고. 수녀원에 간 친구하고 둘이. 근데 밖에 공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들리잖아요. 진압을 할거다, 그래서 성당 관련해서 들어와 있는 청년들은 거의 다 빠져 나갔죠. 이리저리 수녀원 통해서. 근데 가라고 해도 안가더라고. 밤늦게 새벽쯤이 되어서 도저히 안 되겠다 해서, 들어올 때 삼일로 창고 소극장 뒤로 사다리 타고 올라왔다고 해서 갈 때도 그리로 돌아갔던 일이 있어요. 그런 강단 때문에 버틸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고. 내가 미안하죠. 배려심이 전혀 없었으니까.

 

김지미 울산에 내려와서 개업을 하고 이후 노동전문 변호사로 활동을 하신 거지요?

 

윤인섭 변호사 자격을 3월 2일에 받았는데, 2월 6일에 내려오면서부터 뭘 했냐면 그때 떠들썩한 사건이 있었어요. 현대자동차 상여금 투쟁. 공장을 점거해서 엄청나게 큰 싸움이 벌어졌거든요. 몇 십명씩 구속되고, 그때 나는 그냥 일속으로 던져진 거에요. 접견가고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에피소드인데 울산 지방법원에 기록이래요. 재판을 하는데 새벽 2시 30분까지 했어요. 그때는 기록입수가 쉽지가 않아서 주로 얘기를 통해서 진상을 파악하고 변론준비하고 피고인 반대신문사항 쓰고 그래야 하는데, 내 기억에 구속자 43명인가 그 재판 준비를 혼자 해야 하니까 3일간 거의 잠을 못자고 일을 하고 재판에 들어가니까 눈에 진물이 나서 썬그라스 쓰고 법정에 들어가서 재판을 했어요(웃음). 새벽 2시 30분까지. 화나는 게 공안 검사들은 3명이 번갈아 가며 쉬는 거야. 재판부랑 나는 밥도 못 먹고.

 

김지미 방금 말씀하신 건 형사이고 민사도 있었을 텐데요.

 

윤인섭 회사가 노동조합을 괴멸시키거나 약화시키려고 조합비를 가압류를 했어요. 그래서 손배청구가 들어온 거에요. 왜냐면 상당한 기간 회사를 점거해서 회사에 있는 컴퓨터가 다 부셔졌으니까. 차량이 8천대가 부셔졌어요. 그게 손해배상청구가 들어온 거죠. 형사재판 마무리 할 즈음에 민사재판을 하게 된 거에요. 형사 1심에서는 다 유죄가 나왔죠. 기물파손도 유죄가 나왔고. 그래서 민사소송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노동인권회관 상담하면서 노동판례공부하고 하면서 사례를 알아서 파업의 마지막 현장에서 철수하기 전에 이런 것을 조합원들에게 홍보하면 좋겠다. 회사기물을 파손한 자는 프락치로 간주한다라는 이런 노동조합이 면책 받을 수 있는 문구들을 넣으라고 했어요. 그래서 마무리하기 하루 전인가 이틀 전에 노조 소식지에다 별표해서 그 문구를 넣었어요. 재판을 하는데 1심에서는 안 받아들여졌죠 그게. 형사 항소심에서는 우리가 그 부분을 계속 물고 늘어졌죠. 그래서 기물파손 부분은 무죄가 나왔어요. 노조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파손한 사람을 특정할 수 없으니까 무죄가 나왔고, 형사 무죄가 나오니까 민사도 할 수 없는 거 아니에요. 책임을 돌릴 수가 없는 거죠. 개인을 특정하기 전에는. 그래서 결국은 손해배상도 이겼죠. 그래서 노동조합이 다시 재건될 수 있었죠. 그때 엄청났었어요. YS정권 때 방송에 몇 일간 뉴스가 나왔죠. 엄청나게 큰 사건으로 기록 됐는데, 실제 형사처벌은 노조위원장하고 쟁의부장만 실형을 받고 나머지는 집행유예로 다 나왔어요.

 

김지미 변호사 1년차일 때 이걸 하신 거죠? 트레이닝은 제대로 하신 거네요.

 

윤인섭 그거 하고 나니까 다른 건 사건도 아니야(웃음). 지금도 한 번씩 얘기해요, 자동차에 있는 친구들한테. 형사사건이야 개인이 처벌받으면 되는 건데 조합비가 확보가 안 되면 노조활동 자체를 못하잖아요. 그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이걸 해결해 주면 1년치의 조합비 중에 반을 사례비로 주겠다 그랬죠. 그런데 부도냈지 결국. 약정서를 안 써서(웃음).

 

김지미 울산에서 생활하신 지도 벌써 20년이 훨씬 지났는데 처음 내려오실 때는 이십 몇 년을 있으실 거라고는 생각 못하셨을 것 같아요.

 

윤인섭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에게 제일 미안한 게 내가 울산에 뼈를 묻을지 잠깐 있다가 갈지 이런 생각 자체가 없었다니까요. 노동변호사가 필요하다고 한다, 내가 가보면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내려왔으니 얼마나 황당해.

 

김지미 중간에 이 정도면 됐으니까 다시 서울로 가야겠다 이런 생각이 든 적은 없으셨나요?

 

윤인섭 그 생각은 지금 해요(웃음). 그 전에는 그런 생각 할 겨를이 없었어요. 92년에 그렇게 하다가 현대자동차 사건 해결될 무렵에 현대중공업이 싸움이 또 벌어졌어요. 그러는 과정에 93년에 영남지역에 뜻이 있는 사람들, 지금 부산 교육감 김석준 교수, 임영일 교수, 장상환 교수, 정진상 교수, 그리고 얼마 전에 민노당 대표했던 문성현과 노조위원장들. 그분들이 주도가 되서 영남지역에 있는 교수, 노조, 운동가들, 법조인들이 모여서 제대로 된 노동운동을 해보자고 해서 영남노동운동연구소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영남노동운동연구소는 노동운동의 방향을 산별노조를 건설해서 그걸 기반으로 서구식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였는데, 그것에 한 10년간 쫓아다니다 보니까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제가 울산에 있으면서도 1주일에 2번씩은 부산에 내려갔어요. 연구소 일 때문에. 그리고 1달에 2-3번은 꼭 교육을 다녀야 됐고. 그런 중에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정치운동이 벌어진 거죠. 노동법 개정 총투쟁이 벌어지고 권영길씨가 민주노총 위원장이 되면서, 원탁회의 만들면서 국민승리21, 정치운동이 되었죠. 그런데 우리 생리라는 게 제가 울산 내려온 것처럼 대의가 있고 명분이 있으면 안할 수가 없어. 요청이 들어오니까요. 결국 울산에서 민주노동당 창당 준비위원회 위원장 맡게 됐고 그러니까 당연히 출마요구가 나올 꺼 아니에요.

 

김지미 그 부분도 질문이 준비되어 있었는데요. 울산 남구 16, 17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출마를 하셨잖아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정치운동으로 가면 안된다라는 입장에서 어떻게 출마까지 이어지게 됐나요?

 

윤인섭 저는 절대로 반대했었어요. 그런데 우리모임이라고 오래전부터 해오던 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에서 노동운동, 시민운동, 정치운동 이 3축이 되어야한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노동운동은 쭉 해오던 거고 시민운동으로 몇몇이 울산참여연대를만들었죠. 정치 쪽만 남았는데 마침 국민승리 21 이런 운동이 벌어지니까, 그 내부에 있던 몇 명이 서울 원탁회의에 갔어요. 10만원 내면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갔다와서 내 이름까지 넣어 놓은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해. 내부에서 토론이 있었는데 민노총 방침으로 결정되니까 안 할 수 없는 거 아니냐. 그러면 하자 해서 창당을 했는데, 북구가 선거구가 생겼어요. 노동자 정치운동이 첫 번째 당선자를 북구에서 만들 수 있겠다 욕심들이 많이 났죠. 그런데 얼른 생각해보니까 북구에만 후보를 내놓으면 너무 외롭다. 자동차에서 북구에 후보를 만들었는데, 중공업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냐 해서, 그때 제가 다 고문변호사를 하고 있었으니까 중공업 노조위원장을 만나서 동구에도 후보를 만들어라. 없다면 나라도 나가겠다 해서 이갑용씨가 후보가 됐어요. 울산이 태화강을 중심으로 북구, 동구는 됐어. 그런데 남구, 중구는 없는 거죠. 이야길 하다가 그러면 북구하고 동구만 선거 나오면 고립되는 거 아니냐. 누가 남구라도 나가서 뒷받침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면 내가 나가지 뭐. 해서 결국 민주노동당 이름으로 출마를 하게 됐죠.

 

김지미 변호사님 일생을 쭉 보면 ‘내가 하지 뭐’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웃음). 그러다가 18, 19대 때는 출마를 안하셨잖아요.

 

윤인섭 이런저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처음의 생각이 옮았다. 정치를 너무 서둘렀다 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제일 크게 후회했던 게 한 번도 내가 선택해서 간 길이 아닌 길이 없었는데, 정치운동만큼은 내가 어쩌다보니까 와버렸구나 이 생각이 들었어요. 2004년 선거 치르고 2006년 시장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내가 돌이켜보니까 뭘 했느냐란 생각이 드는 거야. 나는 나름대로 원칙에 맞게 산다고 왔는데, 내가 뭘 했는가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내가 탈당계 내고 이거는 일체 안 하겠다 그런 상황이 됐어요.

 

김지미 그래서 이제는 서울로 가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시나요?

 

윤인섭 그런 과정을 지나면서 노동운동도 처음보다는 열정이나 변화가 많이 됐죠. 92년 93년도 그때가 80년 노동자 대투쟁 일어난 직후라서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는 어떻게 만들어내느냐 이런 것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노동조합도 기득권 세력화한 면이 없지 않아 있고, 또 여러가지 새로운 모색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니까 별로 할 역할이 별로 없어요. 그냥 변론이나 좀 하고. 그런데 변론도 민주노총 소속 법률원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울산이 고향도 아니고 그래서 일부러 가진 않겠지만 가야 할 일이 생기면 가도 괜찮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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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지금 가족들은 서울에 계시는 소위 기러기 아빠시죠?

 

윤인섭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2004년 총선 끝나고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이 들 무렵에 기회가 되면 청와대에 가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 정권재창출 문제가 걸려있었고 나는 영남에 살기 때문에 당시 한나라당 쪽 분위기를 쉽게 알 수가 있었죠. 그러던 차에 또 부모님이 계신데 금년에 연세가 88세세요. 두 분다. 장남으로서 부모님만 서울에 신림동쪽에 집이 있었는데, 지난 뒤에 알았는데 한번은 15일 동안 연락이 안 됐었대요. 두 분 다 편찮으셔서. 내가 너무 마음에 걸리더라고. 내가 뭐하는 건가. 그래서 부모님 문제, 내가 서울 올라갈지도 모른다는 문제, 우리 아이 고등학교 진학문제도 있고 하니까, 에이 그럼 옮겨버리자, 서울에 집을 만들어서 우리 집사람이 올라갔죠. 나는 주말마다 올라가고. 그게 10년 됐어요. 청와대는 어쩌다보니 못 갔지만 시장 출마를 고민한 일도 있고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노무현재단 만드는데도 관여하고 바쁘게 살다보니 벌써 10년이 되었네요.

 

김지미 변호사님 개인에 대한 질문을 좀 더 드리자면 무영이라는 호를 쓰고 계시잖아요. 없을 무에 그림자 영. 호라는 게 자기 인생철학, 가치관 이런 것을 드러낸다고 봤을 때, 어떤 의미에서 호를 쓰셨는지.

 

윤인섭 내가 호를 지어야 될 일이 있었어요. 어떤 호를 지으면 좋을까 생각을 했는데, 내가 뭔가 흔적을 남기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피곤하겠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있어 역할 하는 것으로 없는 게 제일 좋겠다. 그 자리에 있을 때는 할 수 있을 만큼 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뭔가 남기는 것은 내 취향에 안 맞는 것 같다. 그래서 무영이라는 호를 지었어요. 농담으로는 유령인간이다, 그림자가 없어서. 귀신이라고.(웃음)

 

김지미 민변은 변호사가 되시면서 가입을 하신건가요? 지금 울산 지부에서는 최고 선배님이시죠?

 

윤인섭 솔직히 언제 가입했는지 기억이 안나요. 당연히 그랬겠죠. 울산지부에서는 나이가 제일 많죠. 사람들이 내가 당연히 지부장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막상 지부장은 못해봤어요.

 

김지미 울산 지부가 그렇게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요.

 

윤인섭 원래 울산지부가 만들어진 게 부산·경남 지부가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민변 노동위원회 수련회 하면 부산에서 다 모이고 그랬었는데, 울산 관련된 변호사도 몇 명 되고 또 새로 영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우선 지부하나 만들자하고 서울에 타진했더니 가능하다고 해서 주변에 눈여겨봤던 친구들 중에 몇 명 같이하자고 해서 십 몇 명으로 창립을 했죠. 그런데 울산이 뚜렷하게 활동할 게 별로 없어요. 그게 아쉬운 거에요. 노동 쪽은 이미 나도 그렇고 민주노총 금속법률원 친구들이 와서 하고 있고, 환경 이러한 것은 개인적으로 관련된 곳에서 하고 있어서 쉽지가 않더라고요. 그래도 드러내놓고 활동을 안 하는데 울산 지역에 각종 여러 가지 성명서 발표라든지 무슨 대책위 만든다고 할 때는 꼭 민변에 대해서 참여요청이 와요. 그러면 내부논의 거쳐서 가능하면 하고. 또 지역에선 법률적인 문제가 생기면 일단 민변에 대해서 요청을 하기도 하고 그래서 드러내는 건 없는데 울산지역에서는 시민, 노동, 환경, 여성, 이런 단체들과의 관계에서 민변이 나름대로 위상을 가지고 하고 있죠.

 

김지미 다음 주가 총회인데 이번 총회는 울산지부에서 주관을 하잖아요.

 

윤인섭 울산지부 사무국장인 장석대 변호사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우리가 매달 한 번씩 모이는 데 회의 때마다 보고도 하고 비용분담도 하고 그래요. 이번 총회를 기점으로 울산지부가 활성화되면 좋겠어요.

 

김지미 지역에 있다보면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도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던데 혹시 이런 부분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윤인섭 사실은 지방에서도 고민하고 저도 늘 고민되는 게 그거에요. 김앤장 공화국이라는 말 이면에는 사법부를 김앤장이 장악한 거 아니냐. 내용적으로는 대원외고, 서울대. 그리고 외형적으로는 김앤장 출신들이. 왜냐하면 판사임용제도가 바뀌었단 말이에요. 검사의 임용이야 뭐 연수원 졸업하고 로스쿨 졸업한 식으로 하니까 다양할 수 있는데, 판사의 임용제도를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서는 대형로펌 출신들이 싹쓸이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데, 왜 이런 문제가 되냐면 객관적 데이터가 옛날에는 사법시험 성적, 연수원 성적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지역 로스쿨 출신이나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평가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상실될 수 있어요. 그래서 민변이 해야 할 역할이 사법영역에서는 그 부분이 아닌가. 객관적 데이터로는 실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지역에서 살아왔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는 플러스 알파를 주는 식으로 해서 지역출신들이 전체 사법부 구성원의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것을 대한변협이나 서울변협이나 여러 시민사회단체 사법영역에 맡길 게 아니고 민변이 해야하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뒤집어 말하면 민변에서 활동했던 변호사들은 법원 진출하는 데 불이익을 받지 않고 플러스 알파가 된다라는 것이 형성이 돼야 균형을 잡는다. 자본 쪽을 대변하는 것이 김앤장이라면 그 쪽은 이미 충분히 루트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 부분을 민변이 애를 써야하고 각별히 필요해요. 법조일원화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갈 수 있게 하는 역할을 민변이 해야 되는 건데, 중요한 것은 형식적인 기회의 평등이 아니고, 실질적인 내용의 평등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방에 있는 로스쿨 출신들 이런 사람들도 지방에서 몇 년간 변호사 생활 하면 판사로 임용될 수 있는.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장관임용하고 국회의원 할 때 지역 안배를 했듯이 사법부도 그런 시스템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역할을 누군가 해야 된다. 그래서 서울 출신이 반이면 나머지 지방출신이 반 이렇게 할 수 있도록. 그건 의식적으로 안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가장 보수적이고 형해화 된 사법부 고위직들은 그 생각이 없거든. 간단하잖아요. 학교 성적, 로스쿨 성적 이걸로 자르고 싶어 하는데. 그러면 뻔하잖아요. 로스쿨 입학 때부터 이미 서울 로스쿨로 다 가는데 뭐. 지방에서 근무해도 판사 임용될 수 있다고 하면 서울에 있는 로스쿨 출신들이 지방에 와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되니까. 그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지금이 제일 고비가 아닌가. 잘못해서 방향이 잘못 잡히면 법복 귀족화될 수도 있겠다. 민변이 그 부분은 기로에 서있는 것 같아요.

 

김지미 민변 회원이 지금 딱 천명이 넘었어요. 그래서 이번 총회 주제도 그것으로 잡았는데 선배 입장으로서 회원 천명을 맞는 민변에 대한, 민변은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조언을 좀 해주신다면.

 

윤인섭 나는 민변 회원으로서 별로 잘한 게 없는 것 같아서, 기껏 한 게 회비 꼬박꼬박 내고, 그리고 민변 회원이라는 탈을 쓰고 지역에 이렇게 있는 거 그거 외에는 없는 것 같아서. 그런데 요새 보니까 법조인 수가 많이 늘어났잖아요. 나는 참 후배들한테 고맙고 참 기특하다는 게,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공익적 기능이 절대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민변에 몸을 담고 있는 것이 정말 고마워요. 요새 민변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을 넓혀나가는 것도 고맙고.

연수원 때 각 지역으로 흩어진 멤버들의 첫 번째 과제가 무엇인지 아세요? 좀 엉뚱한 이야긴데 뭐냐 하면, 재생산구조였어요. 우리가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있어도, 특히 법조비리라고 여겨지는 브로커 직원을 채용한다든지 리베이트를 준다든지 판사, 검사들한테 로비를 한다든지 그런 일 없이 우리 소신껏 살아가야 하는데 과연 버틸 수 있겠느냐 라는 것 때문에 재생산 구조를 갖추자. 일도 아무리 중요하지만 재생산구조를 갖추지 못하면 결국은 타협해야 하고 도태된다는 거였는데, 저도 민변에 대해서 제일 걱정하는 부분이 그 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요새 내가 가만히 보니까 법률시장도 굉장히 다양해지고 넓어져서 관심을 갖고 찾고 집중하고 투자하면은 그런 재생산을 할 수 있는 구조가 많아지니까 오히려 젊은 변호사들이 자기 전문성도 살리고 보람도 얻고 명예도 가지면서, 또 전혀 도태되지 않는 그런 시스템을 가질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참 다행스럽다. 그런데 그건 후배들 몫이죠. 우리가 처음 민변 울산 만들 때도 그랬고 지금도 늘 고민하는 게 적어도 민변 회원이 전체 변호사의 10%는 되어야 된다. 지금은 5% 정도잖아요. 울산변호사 숫자에서는 10% 조금 넘어요. 그것을 유지하자. 숫자가 늘어나면 장단점이 있어요. 활동의 방향이 점점 중도 쪽으로 땡겨 올 수밖에 없어요. 그렇더라도 회원이 늘어나서 다양한 방면에서 자긍심을 가지고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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