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선으로 살고 싶다, 이정일 변호사 인터뷰.

2015-03-25 41

2주에 한 번, 집행위 회의에서 뵙는 이정일변호사님은 조용하고, 조용하고, 또 조용한..그런 분이셨습니다. 인터뷰를 위해 들렀던 블로그에도 ‘평화와 선’ 이런 단어들이 주로 보여 역시라는 생각을 했었죠. 그런 분이 우리를 제대로 즐겁게 해 주셨습니다. 지면의 한계상 많은 부분을 생략할 수밖에 없어 안타깝지만 역시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 알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시켜 준 이정일 변호사님을 만나 보시죠.

 

이정일변호사

 

 김지미 현 집행위원 중에서는 최초 인터뷰가 되겠네요. 변호사님 소개 좀 간단히 해 주세요.

 

이정일 저는 37세 이후로 나이를 세본 적이 없어서 나이는 잘 모르겠고(웃음) 현재 환경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정일입니다.

 

김지미 변호사님 말투에서도 느껴지지만 저쪽 아랫지방이 고향이시죠?

 

이정일 원래 태어난 곳은 경남 고성이고 초등학교 3학년 때 김해 진영으로 이사를 나와서 지금 어르신들은 다 거기서 살고 있어요. 그래서 고향을 물으면 그냥 김해 진영이라고 해요.

 

김지미 단감으로 유명한 진영이죠? 봉하마을도 근처에 있고. 시골에서 서울로 대학을 올 정도였으면 그 동네에서는 영재였겠는데요.

 

이정일 개천에서 용 난 꼴이죠. 저는 성대 법대는 3수해서 들어갔어요. 원래 제가 하고 싶었던 공부는 철학이여서 고대 철학과에 지원했다가 떨어졌죠.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도올 김용옥 선생님의 ‘여자란 무엇인가’란 책을 읽었는데, 그게 센세이션했거든요. 그래서 철학을 공부하겠다 그랬는데 재수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왜 철학과 가려고 하니, 나의 아들 중에는 판사·검사가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시더라구요. 그때는 아버지 말씀을 따르는 것이 부모에 대한 효도라고 생각해서 법대로 전향해서 성대 법대를 들어가게 됐어요. 법대 들어와서도 법공부는 내팽개치고 다른 학교 가서 철학 강의도 듣고 이랬었지요.

 

김지미 변호사님 블로그를 봤을 때 뭔가 형이상학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이정일 제 블로그 보셨어요?

 

김지미 당연하죠.(웃음) 블로그 이름이 ‘길 떠난 나그네를 위한 평화와 선’이고 평화와 선으로 살고 싶다 이런 말이 있어요. 방금 말씀하셨지만 천주교 신자신데 성철스님 법문집이 대문사진으로 나와 있고. 그런 쪽에 어렸을 때부터 관심이 있으셨던 가봐요.

 

이정일 지금 생각해보니 학창 시절에 친구들이 고민거리를 저한테 많이 물어봤던 것 같아요. 대학교 와서는 불교 쪽에 관심이 많아서 주로 도봉산에 있는 도선사에 1주일에 1번씩 하숙생들이랑 같이 가서 절도 하고 그랬었죠. 그러다가 대학 졸업하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종소리가 ‘땡~’나는 거에요. 아주 아주 맑은 종소리가. 저는 당연히 절이 있는 줄 알고 찾아갔는데 그게 성당이었어요. 그게 성당을 다니게 된 동기예요. 원래 어머니가 독실한 불교 신자라서 제가 성당 나간다 그러니까 처음 1년 정도는 되게 반대했어요. 옛날부터 어르신들 그런 거 있잖아요. 한 집안에 두 신을 섬기면 사달난다. 그래가지고 반대를 했는데, 저는 신앙생활 뭐든지 열심히 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으로 시골 가면 어머니하고 같이 절에 열심히 가고 집에 와서는 성당 열심히 다니고 그럽니다. 대신에 여전히 불교 관해서는 관심이 많아서 여행을 간다거나 하면 될 수 있으면 사찰로 가곤 해요. 수행하거나 기도하는 방법도 불교식의 기도나 수행방식이 저는 끌려서 좀 하는 편이죠.

 

김지미 저는 개인적으로 사춘기의 남자아이들은 반인반수라고 생각하거든요.(웃음) 그런데 어떻게 그 나이에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을까요?

 

이정일 글쎄요.. 제가 3남 3녀 중에 5째에요. 그러니까 아들이 3명, 딸이 3명인데 형이 부모님이랑 싸우는 모습을 되게 많이 봤어요.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가 고생하고 있는데 형이 왜 저럴까. 나는 부모님을 힘들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어렸을 때부터 조금 강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철이 일찍 든, 아마 생각을 좀 많이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아마 전생에 스님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긴 했어요.

 

김지미 그런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한 번쯤은 나는 출가를 할 거야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던데 그런 적 없으셨어요?

 

이정일 그런 생각을 딱 한 번 한 적 있어요. 제가 3남 3녀 중에 대학을 처음 갔어요. 그것도 법대를 갔으니 집안의 기대가 얼마나 컸겠어요. 제가 98년에 사시 1차 합격을 했는데 그때에 성당 다니는 지금의 아내를 만나서 서로 좋아하게 된 거에요. 그래서 결혼을 하겠다 라고 하니까 집에서 반대를 했어요. 아내 집이 당시 세탁소를 하고 있었는데 그런 거랑 또 장인어른도 돌아가셔서 안계셨고 뭐 그런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다 반대했을 때는 제가 그렇게 마음이 안 아팠는데, 어머니가 반대하니까 되게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어머니가 1년 동안 매주 눈물을 흘리면서 전화해서 다른 아가씨면 안 되겠냐 그러셔서 마음이 흔들려서 나중에는 제가 헤어지자고 그랬거든요. 그때 제가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서 내세운 게 그거였어요. 내가 출가하겠다고.(웃음)

 

김지미 그건 협박이잖아요.(웃음) 내가 이 여자랑 결혼을 못하는 나는 출가를 하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하신 거예요?

 

이정일 그럼요. 그랬더니 조금 잠잠해졌는데 결정적으로 잠잠해졌던 이유는 그 다음에 제가 사법시험 2차에 떨어졌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에이, 우리 아들 별거 없구나.(웃음) 그렇게 되가지고 아버지가 내년에 1차 보고 나서 그때에 결혼하든지 말든지 해라 그러셨는데 그때 아버지의 진심은 그거에요. 1차 합격하면 또 반대하려고.(웃음) 그 틈새를 나는 무조건 1차 보기 전에 결혼을 해서 이 사람하고 같이 사는 게 더 좋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은 그거다라고 생각했죠. 1차를 봤는데 이번에는 안되겠다라는 감이 오더라구요. 1차 발표하는 날이 5월 6일인가 그래요. 그래서 1차 발표하는 그날 결혼을 했어요. 그랬더니 같이 시험 본 친구·선배들이 너 하필 발표하는 날 결혼했다고.

 

김지미 2월에 시험보고, 5월에 결혼한 거네요. 그러면 결혼식장에서 합격소식을 들으신 거에요?

 

이정일 기대를 안했으니까. 안될 거 뻔한 건데. 그래서 발표를 보지도 않았어요. 다른 사람들이 너 발표하는 날 이렇게 결혼하기 있냐고 그래가지고 결혼식에서 머리를 되게 많이 때렸던 기억이.(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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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결혼기념일이 더 기억에 남으시겠네요. 사모님의 어떤 점이 그렇게 출가까지 불사하게 만든 건가요?

 

이정일 저는 후배들이 결혼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물어볼 때 딱 두 가지만 이야기 하는데, 하나는 나의 모든 부족한 것, 나의 결점 이런 것들을 솔직하게 이야기 해줄 수 있는 상대방이냐 아니냐에 대해서 첫 번째 질문을 해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 해줄 수 있는 사람이란 느낌이 든다면 50점. 그 다음에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던지 간에, 내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 다 지지하지 않는데 끝까지 나를 지지해 줄 사람으로 느껴지느냐. 이 두가지 느낌만 있다 그러면 저는 무조건 결혼해라라고 이야기를 하고요. 나머지 조건들은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서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들이 오히려 더 큰 힘이 되고 남한테 이야기 할 때도 가식이 아닌, 그 자체에 담기는 힘이 있다라고 생각해요.

 

김지미 사모님이 그런 상대이신 거죠?

 

이정일 그런 상대라는 믿음이 들었지요. 또 아내가 저에게 선물을 해 달라고 해서 제가 류시화 시인이 쓴 잠언집 있잖아요.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 알았더라면. 그 책을 선물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저도 한 권을 사서 봤거든요. 읽어봤는데 내용들이 삶을 편안하게 하고 가진 것 없지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이 되게 많았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느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모든 것들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이 사람과 함께 살면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김지미 그런데 사모님 입장에서는 고시생하고 결혼을 한 거잖아요. 앞으로 생계가 어떻게 될지, 언제 합격할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에서 결혼이라는 것을 결심을 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사모님도 변호사님에 대해서 나의 소울 메이트다 이런 게 통했던 건가요?

 

이정일 그렇겠죠?(웃음) 그러니까 안 떨어지고 했는데 결혼하니까 집에서는 어쨌든 너는 원하는 결혼을 했으니까 그 다음부터 우리는 경제적인 지원을 안 해준다라고 하셨어요. 그때 와이프가 무역회사 다녔거든요. 월급이 많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것 갖고 생활을 했죠. 결혼하고 경제적인 지원도 끊고 이러니까 절박함이라는 게 되게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공부 외에 다른 것은 안했던 것 같아요.

 

김지미 그때 결혼하신 게 신의 한 수인데요.

 

이정미 저도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하는 게, 제가 2차 떨어졌을 때에 점수가 0.01차이로 떨어졌어요. 그런데 동차로 2차 합격할 때는 0.03차이로 합격을 했어요.(웃음)

 

김지미 연수원 문을 닫고 들어 가셨군요.

 

이정일 연수원에서 교수님 면담을 하는데 교수님이 너 뒤에서 세보는 게 빠르겠다 그러셨어요. (웃음) 근데 저는 별로 개의치 않았어요. 평소에 원했던 것은 변호사가 되는 거였고 그러니까 졸업만 하면 된다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김지미 재수하면서 전혀 생각지 않던 쪽으로 진로를 바꾸고 법대에 들어간 것 까지는 효도하는 셈치고 그렇다하더라도 고시를 보고 법조인이 되어야 겠다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이정일 저도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아버지께 이제 법대 갔으니까 공부를 하든 말든 터치하지 마십시오 그랬어요. 그랬는데 3,4학년 되니까 고민의 지점들이 많아지더라고요. 법대 나왔다고 취직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주변 친구들은 고시에 올인을 하고 있고. 특히 성대 분위기는 들어오면 고민하지 말고 무조건 고시 공부 하라고 그래요. 반면에 저는 철학이나 사회학 이런 거 공부하고 있었어요. 그 당시에 인상 깊었던 게 정치경제학 원론이라고, 왜 자본주의가 이렇게 부패하고 기업들이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는 이런 구조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그런 경제개론서인데, 그런 걸 공부하면서 법조인의 역할이라는 게 지배계급의 어떤 도구가 아니냐 라는 생각 때문에 저는 고시공부를 처음에는 안하려고 했었어요. 그러다가 졸업을 하면서 변호사로서 반대진영에서 도와 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고시공부를 한 것 같아요.

 

김지미 연수원 33기니까 2004년에 수료를 했는데 민변은 2011년도에 가입을 하셨어요. 변호사 7,8년차에 가입을 하신 건데, 그런 회원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거든요. 가입하기 전에는 민변에 대한 관심이 없으셨나요?

 

이정일 관심은 있었는데 제가 일을 하면 끝장 볼 때까지 열심히 하는 편이예요. 민변에 들어가면 너무 열심히 해서 다른 일을 못하게 될까봐 스스로 좀 두려웠어요. 제가 2004년부터 조영선 변호사님, 서중희 변호사님, 박영립 변호사님 등등 많은 변호사님하고 한센인 관련 소송을 하고 있는데 소록도에 비행기 타고 한번 내려가면 하루 종일 걸리고 이러다보니까 하기는 해야 되겠는데 너무 힘든 거에요. 그래서 중간에 잠시 그만 두었다가 다시 해서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민변에 들어오면 이것저것 너무 열심히 할 것 같아서 좀 망설이고 있었죠. 그러다가 한센인 소송도 같이하고 동화에 함께 계시는 조영선변호사님이 회원 가입을 권유하셨는데 제가 한 1년 정도는 거기 들어가면 민변 활동만 열심히 할 거고 그러면 사무실 측면에서도 유리하지 않다 그랬죠. 근데 조영선 변호사님이 민변 들어오면 회비 내줄게 이래가지고 부담 없이 들어갔는데 딱 2달 내주고 안내주더라고.(웃음)

 

김지미 낚이셨군요.(웃음) 한센인 보상청구는 처음 소송을 시작할 때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승소를 할 수 있을지 예측을 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 1년차 변호사로서 선뜻 참여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이정일 변호사가 되고 나서 첫 번째는 먹고 사는 문제가 고민이었고 두 번째는 내가 변호사가 되고자 했던 첫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도구가 뭘까 하고 생각을 했는데 나이가 좀 들고 보니 그게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천주교에서 ‘소록도에서 보내는 편지’라는 책이 있어요. 신부님, 수녀님들이 소록도에 들어가서 평생 거기에서 생활하시다가 어떤 신부님은 한센병에 걸려가지고 돌아가시기도 하고 하는. 신앙을 지키면서 봉사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런 측면이 있어서 어렵지만 한센인 변호단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지미 변호사님 사전 조사를 좀 해보니 예전에는 중국에 관심이 꽤 있었던 것 같아요. 중앙대·경희대 중국경제전문가 양성과정을 밟으셨네요.(웃음)

 

이정일 제 중학교 때 꿈이 중국여자랑 결혼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딛으면 중국 소림사를 꼭 한번 방문하겠다.(웃음)

 

김지미 예? 전생에 소림사 승려가 아니었을까요?(웃음)

 

이정일 그런 게 막연하게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사법연수원 4학기 때 중앙대에서 연수를 좀 받고 그 다음 해에 경희대, 그리고 행정학회인가 거기에서 중국 비즈니스 법률 강의를 한 6개월 들었어요. 그때는 미래에 21세기에는 세계경제를 이끌 나라는 중국이다 그런 이슈들이 되게 많았었잖아요. 그러면 우리나라 기업이 중국에 진출을 하게 되면 법률 자문을 요구하는 수요가 좀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있었지요. 그랬는데 나의 의지와 수요자 사이의 간극이 워낙 크니까 지금은 과감하게 접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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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현재 환경위원장님이시잖아요. 제가 언뜻 듣기로는 민변에 가입은 했는데 위원회 뭘 하나 쓰라고 해서 그냥 쓴 게 환경위다 라는.. 환경위원장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입 동기이던데 사실인가요?

 

이정일 환경위원장은 어울리지 않는 옷인 것 같긴 해요. 환경위는 어떻게 활동을 하게 됐냐면 4대강 사업 취소소송 변호인단을 모집했었는데 거기 참여를 했거든요. 제 고향집인 진영 봉하산에 올라가 보면 바로 앞에 낙동강이 보여요. 이 아름다운 강이 파헤쳐지고 물길을 가로막고 하는 이게 너무 가슴이 아파서 저도 개인적인 자격으로 변호단에 참여했고, 4대강 중에 낙동강 살리기 사업 취소소송을 담당했거든요. 거기에서 2년 정도 왔다갔다 하다 보니까 그 당시에 환경위원회 위원장님인 박서진 변호사님이 저더러 차기 환경위 위원장을 좀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저는 처음부터 이런 제안을 하면 절대 들어오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들어왔는데 어찌어찌해서 제가 맡게 됐고. 제 생활신조가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즐기면서 하자여서 그냥 열심히,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웃음)

 

김지미 최근에는 예전 새만금이나 태안과 다르게 환경 관련 이슈를 언론에서도 많이 다루지 않고 있어서인지 환경위에 신입회원 유입도 잘 안되는 것 같고 어찌 보면 환경위가 좀 침체되어 있다라는 느낌이 있거든요. 4대강이나 원전은 중요하고 큰 이슈인데도 말이죠.

 

이정일 환경과 관련된 분쟁을 예전에는 민변 환경위에서 전적으로 담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환경단체들이 스스로 상근 변호사를 두고 있어요. 환경운동연합은 환경법률센터가 있고, 녹색연합은 녹색법률센터가 있어서 그 산하에 소속된 변호사단이 또 있어요. 그러다보니까 즉자적인 대응이 바로바로 이루어지는 거죠. 실무적인 단위에서는 환경단체의 수많은 활동가들이 지원을 하고, 그걸 받아서 담당 변호사가 어느 정도 커버를 해주다보니까 민변 환경위의 독자적인 사업을 추진하기가 여건상 어려운거죠. 그러다보니까 4대강 사건 같은 경우에도 진행할 때 민변 환경위가 독자적으로 진행한 게 아니고, 환경운동연합, 녹색법률센터 이런 곳이랑 연대활동 형식으로 진행됐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민변 환경위의 역할이 좀 축소된 거죠. 그렇지만 제가 위원장 되기 전과 후는 조금 달라요. 저는 단 한명이 와도 회의는 한다 주의거든요. 그러다보니 점점 참여하는 회원도 늘고 있고 올해는 원전 관련 이슈가 있으니까 나름대로 활성화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원전 관련해서는 환경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응을 하고 계신가요?

 

이정일 일단은 해바라기 모임, 환경법률센터, 녹색연합, 민변 환경위 이렇게 4개의 큰 단체가 모여서 변호인단을 꾸리고 민변 전체 회원들 상대로 변호인을 추가로 모집하기로 했어요.

 

김지미 구체적으로 어떤 소송을 하는 건가요?

 

이정일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소송 첫 번째는 월성 1호기, 일반적으로는 수명연장이라고 하니까 수명연장이라고 할게요. 수명연장허가처분에 대한 취소소송하고 그 다음에 집행정지 그게 아마 가장 큰 소송형태가 될 거고. 그 다음에 또 추가적으로 고리원전도 아마 똑같은 연장시도들이 있을 것 같고. 그래서 그 연장시도와 관련해서 법률적인 지원, 자문의견을 낸다던지 법률적인 문제점에 대해서 의견을 낸다던지.

 

김지미 저도 사실 잘 모르는데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서 원전의 수명연장이 왜 문제가 되는 건지 설명을 좀 해 주세요.

 

이정일 나도 잘 모르는데.. (웃음) 서당 개 3년 풍월 읊듯이 말씀드리면 지금 원자력 사업의 가장 핵심은 안정성인 것 같아요. 원자력 사업이라는 것은 한 번 가동이 되면 가동의 원리가 핵분열이기 때문에 핵분열은 50년을 가는 거에요. 그러다보니까 이게 중지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중지를 했으면 50년 동안 핵분열을 계속적으로 확장 못하도록 냉각기술을 통해서 냉각을 50년 동안 해줘야 되는 거에요. 그러다보니까 사후 안정성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가 있고. 그 다음에 이 원전 사고는 수습을 못하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체르노빌도 지금 핵분열이 계속되고 있어요. 그래서 유럽에서 1조 5천억 원 규모를 지원을 해줘서 폐쇄를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자기 나라들한테 피해가 오니까. 지금 일본의 후쿠시마 사고도 마찬가지로 사고가 났는데 사고 원인을 규명을 못해요. 원인 규명하러 들어가는 순간 방사선 물질에 노출이 되기 때문에 원인규명이 불가능한 거에요. 그리고 어떤 피해가 얼마만큼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거고. 우리나라는 아마 월성·고리에서 사고가 나면 남한 전체가 영향권에 들어갈 거예요. 일본은 사고가 났었을 때 반경 250km에 있는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다 나가라고 했거든. 250km면 부산에서 대전까지 거리고. 대전에서 공기타고 오면 수도권도 영향권 안에 드는 거지요.

 

김지미 고리원전 같은 경우도 노후해서 더 이상 가동을 하면 안 되는 지경인데 수명연장조치를 통해서 계속 가동을 하고 이게 사고의 상당한 위험성이 있다라고 판단을 하신다는 거죠?

이정일 그렇죠.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 안전기준이 강화가 됐는데 쉽게 말하면 원자로가 가동되는 과정에서 방사능 물질이 배출이 되기 때문에 바깥에다가 격납용기라는 것을 다시 해요. 그런데 체르노빌 이후에 격납용기를 더 강화시키자라는 기준이 나온 거에요. 그런데 월성 1호기는 그런 안정성 시설을 설치를 안 한 거에요. 안했다라고 판단이 되어 지는 거죠. 그런데 원안위의 다른 기술 전문가들은 그걸 설치 안하더라도 안정성에 문제 없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원전 전문가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김익중 교수님 같은 경우에는 이미 국제적인 기준이나 우리 월성 1호기를 수출한 캐나다도 체르노빌 이후에 안전기준으로서 격납용기 시설강화 기준을 마련해서 설치를 했는데, 왜 월성 1호기에 대해서는 안하냐. 후에 사고가 났을 때 방사능 유출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안정성이 없다. 그것에 대해서 충분하게 심의를 했었어야 되는데 심의도 안 된 채로 결정되었다. 그런 게 문제인거죠. 다른 절차적인 문제도 이야기 되어 질 수 있는데, 절차적인 문제는 법률가들이 관심 있는 영역이고, 일반인들은 안정성 부분에 대해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저도 안정성에 대해서는 그 정도만 이야기하고. 많은 분들을 설득할 정도의 능력은 안 되는 것 같아요. 설득이 안 되시죠?

 

김지미 이런 분야로는 워낙 무지해서..사실 좀 어렵잖아요. 과학적인 용어도 나오고.

 

이정일 변호인단 모임을 했는데 변호사들이 모르니까 전문가가 되게 갑갑해 하더라고요.

 

김지미 공부를 좀 많이 하고 들어가야 되겠네요. 소송을 하려면.

 

이정일 그래서 오마이뉴스에서 ‘탈핵이야기’ 라고 지난 3월부터 4회 강의 프로그램이 있어요. 저도 뭐 좀 알고 소송에 참여를 해야 겠다 해서 그걸 수강하고 있어요.

 

김지미 아까 말씀하신대로 한 번 하면 되게 열심히 하는.

 

이정일 그것 때문에 접근해올 사람은 없겠죠?(웃음)

 

김지미 이정일변호사님은 맡기면 열심히 하십니다. 거절도 잘 못하시구요~~. 제가 광고를 했으니 접근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웃음) 민변 환경위원장은 예전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일 수도 있잖아요. 지금의 모습에 대해 만족 하시나요?

 

이정일 아까 제가 말씀 드렸듯이 피할 수 없는 것은 열심히 하자여서. 또 제가 이렇게 돌아보니 환경과 관련해서도 맞다라는 생각이 좀 들었던 부분이, 서울지방변호사협회에서 변호사 추천하는 거 있잖아요. 이달의 변호사 해가지고 추천하는 거. 이영기 변호사님이 저를 추천을 하고, 제가 환경법률센터의 변호사를 추천을 했는데 남을 추천하기 위해서 글을 쓰다 보니까 내가 환경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던가? 있지도 않았는데 그냥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환경위원장 하면서 도대체 환경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뭐 이런 고민을 하다보니까 제 나름대로 정리된 환경에 관련된 정의는 환경은 나의 생명에 관련된 문제다라고 딱 정리가 되더라고요. 나의 생명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영역이다라고 생각을 하니까 스스로 만족하면서 열심히 할 수 있는 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김지미 어찌 보면 철학적인 면하고도 연결이 되는 것 같네요.(웃음)

 

이정일 지난번 신입회원 엠티 때 환경위 소개하면서 돈이 안 된다고 해 가지고. 돈 되면서 환경도 지키면 얼마나 좋을까.

 

김지미 그게 되면 아마 신입회원들이 엄청 많이 몰렸을 텐데요. 신입회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사실 민변의 모든 위원회가 다 고민하는 부분이 신입회원을 어떻게 우리 위원회로 오게 할 것인가 하는 부분인데 지금 원전이나 4대강 같이 사건 위주로 소송을 하는 것 이외에 환경이라는 큰 주제를 가지고 민변 환경위만의 어떤 활동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계획은 없으신가요?

 

이정일 저의 단점이 새로운 일 벌이는 걸 안 좋아하는거라.. 저는 일단은 기존 회원을 잘 챙기는 게 제일 기본적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일을 하면 성과가 있건 없건 그 과정 속에서 배우는 것이 많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에 대해서는 좀 주저하는 성향이 있어요. 그래서 기존에 있는 회원을 참여를 시켜서 소송참여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것에 치중하는 편입니다. 다만 올해하고 내년에 환경 관련 가장 큰 이슈는 원전하고 원전 주변 주민들의 갑상선암 발병 관련한 문제여서 지금 우리 환경위 자체에서는 핵관련 공부를 하고 있어요. 그 다음에 쉽게 탈핵과 관련해서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분을 올해는 한 2명 내지 3명 정도 초청을 해서 민변 전체회원 상대로 강연회를 할 계획이 있습니다.

 

김지미 민변 회원들이 기본적으로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강연회 기획은 괜찮은 것 같아요. 여태까지 환경위 주최의 행사가 잘 없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구요.

 

이정일 김익중 교수님이나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이신 김혜정 위원하고 변호사로서는 김영희 변호사님, 한 3명 정도를 해서 원전·탈핵 관련해서 진행할 생각입니다.

 

김지미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계세요?

 

이정일 강연자들 스케줄도 있고 해서 6월 이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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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이제 거의 막바지인데요, 민변 후배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정일 민변 소속이라기보다 만약에 제 후배가 와서 어떻게 변호사 생활해야 되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잘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할 수 없는 일을 분위기에 묶여서 가는 것은 본인도 괴롭고 나중에 성과도 안 좋으니까.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 만약에 주어졌을 때는 즐겁게 하는 것. 그게 결과가 어떻든 그건 그 다음 문제인거고. 그건 나의 몫이 아니고 나는 그냥 즐겁게 하는 것 자체가 나의 몫이다 이런 말씀을 해드리고 싶고. 환경위원회와 관련해서는 환경위에 오시면 자신의 존재감을 팍팍 느끼게 해드리겠다 뭐 이정도요?

 

이유진 그런데 영상은 따로 공부하신 거에요? 영상 제작하고 그러시는 것 같던데.

 

이정일 네. 사람이 돌아볼 시간이 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자기 자신이나 가족에 대해서. 아무리 밖에 나와서 힘든 일이 있어도 그 힘듦이 자연스럽게 가족 안에서 해소가 되면 바깥에 나와서 또 새롭게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가족이라는 게 마냥 즐겁지가 않잖아요. 즐거움들이 계속 유지될라 그러면 가족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좀 돌아보는 게 필요하다 생각해서 우리 아이들 태어날 때부터 찍어뒀던 사진들을 조금씩 동영상으로 만들다 보니까, 그게 좀 확대가 되어가지고 제가 활동하는 성당 관련해서도 만들게 되었어요.

 

김지미 그러면 어디 나갈 때 캠코더 같은 걸 항상 들고 다니시겠네요.

 

이정일 남한테 민폐끼친다고 생각하면 가져가지도 않지만, 웬만하면 우리가 함께하는 그런 행사에는 다 들고 가죠. 뒤에서 찍기도 하고 앞에서 찍기도 하고.

 

김지미 그럼 이번 총회 때도 한번.

 

이정일 찍어달라고 하면 제가 찍을게요. 그리고 제가 편집 기술이 좀 늘어났어요.

 

김지미 그럼 총회 동영상은 변호사님이 하시는 걸로!

 

이정일 역할 분담 해주시면 제가 할게요.

 

김지미 의외의 수확이네요! 출홍팀 객원 카메라 기자로 위촉하겠습니다. 오늘 재미있는 이야기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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