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령 사법시험 합격자 오세범 회원 인터뷰
김지미 : 바쁘신데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게다가 다리까지 다치셨네요. 다리는 어떻게 하다 다치신 거예요?
오세범:아침마다 운동을 하는데요. 운동하려고 뒷산에 오르다가 넘어졌는데 발목을 좀 다쳤어요. 그래도 매일 운동한 덕분인지 다행이 빨리 회복되는 것 같습니다.
김지미: 하루 빨리 쾌차하시길 바래요. 그럼 본격적으로 얘기를 나눠보도록 할게요.
김지미 : 프로필에 보니까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하신 걸로 나오던데, 고향이 인천이신 거예요?
오세범 : 아니에요. 저는 의정부에서 태어났는데, 중학교 때 인천으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나오다보니까 인천 출신이 된 거지요
김지미 : 부모님이 두 분 다 교사이신데, 6,70년대 어려운 상황에서 부모님께서 교사이셨으면 그래도 상대적으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을 것 같은데, 어린 시절은 어떠셨어요?
오세범 : 그렇죠. 그저 다른 집과 다름없이, 평탄하고 화목한, 그런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김지미 : TV나 그 외에 언론에서 인터뷰나 강연을 많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오세범 : 네. (웃음)
김지미 : 여기 인터뷰하러 오기 전에 그 전에 인터뷰 한 기사들을 죽 읽어 봤어요.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아오신 것 같아요. 혹시 지금의 오세범이 있기까지 힘이 되어준 부모님의 가르침이라 던지 이런 것들이 있나요?
오세범 : “사회에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이름도 인간 세(世)에 법 법(範), 세범(世範)으로 지으신 것 같아요. 어릴 적에 저는 공부 잘하는 것이 모범인줄 알고 고등학교 때까지는 공부만 했던 것 같습니다.
김지미 : 역시… 공부를 열심히 해서 74년도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하셨군요. 평소에 언어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오세범 : 이것도 사실 비사가 있는데..(웃음) 그 때 서울대에서 처음으로 계열별 모집을 했었는데, 입학 당시에는 사회계열로 입학했어요. 대학시절이 유신정권 하에 있다보니 그러한 분위기에 법대, 상대 등이 있는 사회계열로 가게 되면 시위를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그것을 안 하면서 살려면 가치판단이 배제된 순수학문 쪽이 좋겠다고 생각을 했고, 언어는 제가 흥미 있는 분야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대학 가서 친구 사귀다보니 대부분이 운동권 친구들인 거예요. 공부하는 곳인 줄 알고 학회에 가입했더니 그것도 아니고.. 그 친구들과 사귀면서도 그다지 운동에 대한 생각은 없었는데, 친구들이 하나 둘 잡혀가는 것을 보니 괴로웠지요. 이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학문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학문을 핑계로 현실도피를 하는 것인지 정말 많이 고민했죠. 그런데 어떤 학문이건 현실도피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그때가 22살이었는데, 일단 한 번 해보자!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거에요.
김지미 : 아.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프로필을 보면서 입학은 74년이었는데, 77년 학내민주화에 가담했다고 나와서 입학 후 3년 동안은 뭐 하셨나 궁금했었거든요. 그러면 77년, 대학교 4학년인가요? 그 때부터 소위 운동을 하시게 된 거네요?
오세범 : 대학교 3학년 때부터 향토개척단 단장을 맡아 농촌활동을 자주 다녔어요. 그러면서 농촌현실과 정치현실 등의 구조를 많이 알게 되었고, 선후배들과도 자주 어울리게 되었어요. (사실 저는 운동권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생활인과 유리된 느낌이랄까..)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학문도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지식은 사회적 산물이고, 지식인도 사회 발전에 기여해야한다. 아는 만큼 실천하고, 실천에 필요한 만큼 배워나가자’라는 게 제 생각이었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고요. 그러다가 대학교 4학년 때 유신반대 운동에 나갔어요. 학내에서 민주화 시위를 주도하려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이 되었어요. 학교도 제적이 되었고요.
김지미 : 77년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처음 구속되셨을 때 심정은 어떠셨어요? 무서웠을 것 같아요.
오세범 : 무서웠죠. 무서울 수밖에 없죠. 하지만 이것이 역사의 뜻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람의 적응력이 대단한 게, 처음에는 0.7평짜리 독방에 수감되었는데 숨이 막히고 쓰러질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1년 쯤 지나고 나니까 적응되더라고요.(웃음)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갑자기 옆방 사람들이 유신철폐 구호를 외치는 거예요. 학교는 달랐지만 유신반대를 외치다 구속된 학생들이었지요. 그래서 저도 따라서 구호를 외쳤죠. 그걸로 징역이 2년이 추가되었어요. 처음엔 2년 받았다가, 2년 다 살고 나서 2년 더 살게 되었죠.
김지미 : 부모님이 굉장히 놀라셨을 것 같아요. 공부 잘해서 서울대에 들어갔는데, 그런 아들이 갑자기 구속이 되었다고 연락이 왔으니.
오세범 : 처음 제가 구속되었을 때 저희 어머님이 쓰러지셔서 보름동안 못 일어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들이 서울대 들어갔다고 좋아하시다가 나중에 무척 놀라셨죠. 그런데 2년 형 살고 나올 만 하니까 또 2년이 추가된 거잖아요. 정말 실망하셨을 거예요.
김지미 : 그러면 총 4년간 수감생활을 하신 거예요?
오세범 : 수감생활을 다 합치면 3년 4개월인데 긴급조치로는 2년 4개월 살고, 79년도 8월 15일날 형 집행정지로 나왔어요. 그런데 2달 후에 10.26이 터졌어요. 많은 국민들의 열망대로 이제 유신독재체제를 끝내고 대통령직선제를 비롯한 민주주의체제로 가야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계엄령이 선포되고 모든 집회가 금지가 됐죠. 다만, 관혼상제는 허용이 되었거든요. 명동 결혼집회사건이라고 들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명동YWCA 건물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하고서는 ‘대통령직선제국민대회’를 열었어요. 그때 제가 나이가 어려 연락이나 등사 등등 잡일을 했는데, 그걸로 수배가 되었어요.
김지미 : 그 당시 기사를 찾아보니 함석헌, 윤보선, 백기완, 한명숙.. 등 굉장히 유명한 분들도 그 날 검거되었더라고요.
오세범 : 네. 그 때 그랬죠.
김지미 : 결혼 집회 사건 때문에 형을 더 살게 되신 거군요?
오세범 : 그렇죠. 그 사건 때문에 계엄법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수감생활을 하다가, 또 8.15 특사로 나왔어요. 두 번이나 8월 15일에 특사로 나와서 그런지 8월 15일만 되면 기분이 좋아요.(웃음)
김지미 : 그렇게 석방이 되셨을 때가 27살, 학교에서는 제적이 된 상태이고 직업도 없고.. 적이 없는 상태가 상당히 불안하셨을 것 같은데, 이후에 보일러기술을 배워서 보일러공이 되셨네요?
오세범 : 말씀하신대로 학교는 제적이 되었고, 앞으로 먹고 살 생각을 하니 갑갑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이것저것 막일을 했는데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겠더라구요. 그래서 뭐라도 하나 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고압가스, 보일러 등 자격증을 5개 취득했고, 보일러공으로 취직했죠. 보일러공으로 취직하면서 결혼도 하고 딸도 둘이나 낳았어요. 남들처럼 ‘생활’을 해보자, 돈도 벌고, 가족들도 챙기고. 그래서 3년 동안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았죠. 그 당시 6월 민주화 항쟁이 있고나서 여기저기서 노조 결성의 움직임이 일어났어요. 정말 많을 때는 하루에 700여 곳이 넘는 노조가 집회를 하는 거죠. 그런 움직임에 동화되어서 우리 회사에서도 노조가 결성이 되었고 거기서 총무부장을 했어요. 처음부터 노동운동을 위한 목적의식으로 취직을 했던 건 아니었어요. 노동조건이 열악하고 힘드니까 바꿔 보려고 했던 거죠. 그러다 해고가 되었어요. 명목은 대학교 중퇴라는 사실을 이력서에 쓰지 않았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게 너무 부당하니까 혼자서 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구제신청을 냈어요. 처음 지방노동위원회에서는 제가 승소했습니다. 당시 결정문에 보면, 대학 중퇴자를 보일러공으로 뽑지 않는다는 규정이 없고, 3년 이상을 별 문제없이 성실하게 일한 사실, 그리고 노동조합 총무부장으로 활동한 것을 가지고 해고시킨 것은 부당노동행위로서 무효라고 하였습니다. 이후 회사는 대형로펌을 내세워 대응하였고 결국 저는 이기지 못했습니다.
김지미 : 언어학과를 나와서 법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셨을 텐데 어떻게 혼자서 구제신청 절차를 진행하신 거예요?
오세범 : 공부하면서 했죠. 노동법을 쉽게 설명해 놓은 책이 있어요. 그것을 보면서 한 거죠. 그 과정에서 석탑노동연구원과도 인연을 맺었고.
김지미 : 여기서 김칠준 변호사님과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김칠준 변호사님 사무실에서 일을 하신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오세범 : 복직소송 중에 김칠준 변호사님을 알게 되었어요. 당시 김변호사님이 수원에서 개업하면서 노동사건을 적극적으로 하시려고 하셨어요. 그 당시 무직상태였고, 또 복직소송을 오래 하다 보니 노동관계에 관한 소송도 많이 알게 되었고, 그래서 김칠준 변호사님 사무소의 상담실장으로 노동사건을 주로 전담하면서 3년 정도 일했어요. 그러다가 93년에 석탑노동연구원 장명국 대표가 내일신문 창간하는 것을 도와주면서 이후 내일신문 업무실장을 맡았죠.
김지미 : 이제 안정된 직장이 있고 나이도 40대에 접어들게 되었는데 97년에 사법시험에 도전을 시작하시잖아요. 여러모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아요.
오세범 : 내일신문 초창기에 자리 잡을 때 힘들었어요. 그래도 어느 정도 틀이 잡히고 나니까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 당시 평균수명이 많이 올라갔을 때라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죠. 언론사도 의미 있다고 생각했는데 안정적인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고민이 들었어요. 대학 중퇴 후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공부를 했고,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나고 나니까, 지식에 대한 갈망도 생겼어요.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고, 그래서 회사도 그만두게 되었죠. 또 하나가 있는데, 김칠준 변호사님이 변론을 참 잘하세요. 변론하시는 것을 지켜보니 변호사라는 직업은 창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가 가진 잠재력을 발휘해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도 했고요. 당시 40대 초반인데 더 늦으면 도전 자체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남들처럼 5년만 하려고 마음먹고 시작했는데, 그게 15년이 되었죠.(웃음)
김지미 : 공부를 하면 당연히 시험에 합격하게 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을 텐데, 생각과는 다르게 1차를 4번 만에 합격하셨어요. 그 과정에서 건강이 많이 악화되셨고.
오세범 : 초반에 너무 달렸어요. 나이도 있고, 빨리 합격해야겠다는 마음에 쉬지 않고 공부를 했죠. 그러다보니 체력에 무리가 오기 시작한 거예요. 결국 시험 10일전에 쓰러져 병원에 가기도 하고, 허리가 아파서 앉아 있지 못할 때도 있었어요. 그래서 달리기를 시작했어요. 매일 조금씩 달리다 보니 벌써 15년을 달리고 있네요.(웃음)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일단 최선을 다해보자.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1차에 합격하더라고요.
김지미: 다음해인 2002년에 다시 1차에 합격하시고.. 그런데 이때도 2차에 두 번 다 불합격하셨어요. 월드컵이 있는 해는 남성들의 합격률이 떨어진다는 말이 있죠 왜..(웃음) 그리고 공부를 잠시 접으셨죠?
오세범 : 저에게는 월드컵이 크게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고 생각보다 공부가 어려웠습니다. 막판 정리도 잘 못 했구요. 공부를 시작한지 7년이 넘었고, 그 과정에서 2차에 4번을 불합격했어요. 그런데 어느새 아이들은 다 컸고 대학에 갈 시기가 되어 있더라고요. 게다가 그 동안 생계를 책임지던 처가 회사에서 구조조정대상이 되었어요.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그래서 일단 예전에 근무했던 김칠준 변호사님 사무소(당시는 법무법인 다산)에 민사사무장으로 취직했어요. 3년을 일했어요. 저는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의뢰인에 대한 현실적인 필요를 파악하는 데 주력을 했어요. 이때도 공부를 완전히 접은 건 아니고 낮엔 일하고 밤엔 공부하는 그야말로 주경야독을 했어요. 실무를 하면서 공부를 하다 보니 공부가 점점 재미있어지더군요. 사무실이 평균 일주일에 3일을 야근을 하는데, 1년 중 초반 6개월은 무조건 10시까지 야근을 하겠다고 일을 많이 달라고 했어요. 그때는 거의 공부를 못하다가 9월부터는 6시에 칼 퇴근해서 공부를 했죠. 일 끝나면 집 근처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어요. 사무실에서 유급휴가를 많이 줬는데, 처음엔 시험 앞두고 1달을 줘서 집중해서 공부했는데, 근소한 차이로 떨어졌어요. 그 다음 시험에는 유급휴가를 2달 줬는데 역시 근소한 차이로 떨어졌어요. 그 다음엔 3개월을 줬는데, 더 떨어지더라고요. 시간이 갈수록 점수가 더 떨어졌어요.(웃음) 그러다가 아이들이 원하는 대학에 모두 진학하고, 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본격적으로 수험공부를 하게 되었죠.
김지미 : 2008년에 1차 시험을 앞두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잖아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아는데, 공부에 집중도 안 되고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오세범 : 너무 슬펐죠. 공부에 집중도 잘 안 되고. 그래서 이번 시험이 안 되면 정리할 생각으로 편하게 1차 시험을 봤는데 합격했어요. 그런데 2차는 붙을 줄 알았는데 성적이 너무 안 나온 것을 보고 충격 받았어요. 그 다음 해에 재시를 보고 다음날 인터넷으로 토익시험을 접수했는데, 그 모습을 보던 처가 화를 많이 내더라고요. 2차를 6번까지 보았으니 이제 사법시험은 그만하라고. 이렇게까지 했는데 안 되는 걸 보니 인연이 아닌 듯하니 다른 걸 하라고 했어요. 저는 중요한 가정문제에 대해 제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기는 하지만 최종결정은 처에게 맡기는 편이예요. 그래서 사법시험을 안 하는 대신 여태까지 공부한 것이 아까우니 법무사에 도전을 해보겠다고 했고, 그 선에서 합의를 했죠. 법무사학원에 가서 학비도 벌고 공부도 무료로 배울 겸해서 스터디 매니져를 했죠. 3, 4개월 법무사 스터디 매니져를 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2차 발표가 나왔어요. 그런데 총점이 0.93점 차이로 떨어진 거예요. 너무 아까웠지만 처음으로 2차 합격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죠. 부랴부랴 다시 공부를 했죠. 점수차를 알게 된 처도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게 되었어요.
김지미 : 그렇게 오래 공부를 하시고, 결국에는 2011년에 최종합격을 하셨어요. 15년 만에 합격을 하셨는데, 감회가 남다르시겠어요. 저희 때는 상원서점 앞에 크게 합격자 명단을 붙여 놓는데, 요새는 인터넷으로 확인하잖아요. 인터넷에서 확인했을 때 기분은 어떠셨나요?
오세범 : 사실 실감이 안 나고, 꿈같았어요. 그냥 멍하니 모니터를 보고 있는데, 그때부터 아는 사람들 전화가 계속 오는 거예요. 전화 받으면서 그제서야 합격했구나 실감을 한 거죠.
김지미 : 울지는 않으셨어요?
오세범 : 저는 울지 않았는데, 전화 받으시는 장모님이 우시더라고요.
김지미 : 합격하기까지 사모님의 도움 없이는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 동안 생계도 챙기시면서 공부 뒷바라지도 하고, 합격소식을 그 누구보다도 사모님이 제일 기뻐하셨을 것 같아요.
오세범 : 제 처가 조금 무덤덤한 스타일이에요. 속으로는 좋았을 것 같기는 한데 표현을 하지는 않았어요. 가족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김지미 : 아버지가 공부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봐온 딸들도 많이 기뻐했을 것 같아요.
오세범 : 2008년도에 다시 1차 합격했을 때에 딸들이 그렇게 좋아했어요. 그런데 2011년 최종합격 때는 이미 딸들이 다 취업을 해서 그런지 그렇게 기뻐하진 않더라고요.(웃음) 그저 아빠 고생 많았다고 했어요.
김지미 : 사모님에 대한 고마움이 남다를 것 같은데, 사모님 이야기 좀 해주세요.
오세범 : 처는 대학교 때 같이 농촌활동을 하면서 만났어요. 결혼은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와서 했어요. 처에게 정말 고맙죠. 제 처는 장비같은 스타일이에요.(웃음) 생활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김지미 : 사법연수원에서 자치회장은 관례적으로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이 맡게 되는데, 변호사님은 그 중에서도 최고령 자치회장이시잖아요.
오세범 : 아, 그게 조금 문제가 있어요. 저는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인데, 최고령이 자동으로 회장된다는 게 민주적 정당성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더욱이 사법연수생들이라면 장래 판검사, 변호사등 우리나라 법조계를 끌어갈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생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기존 회칙에도 직선제라고 되어 있더군요. 보통 자치회장은 나이 제일 많은 사람으로 하고 관례적으로 박수치고 끝나는 거였잖아요. 저는 자치회 준비위원장 자격으로 전체 연수생들에게 이메일을 발송했고,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문제제기를 했죠. 토론 끝에 찬반 투표를 했는데 직선제가 10표, 관례대로 최고령이 하되 총회에서 추인을 받자는 의견이 40표가 나왔어요. 그래서 총회에서 위 과정을 설명하고 결국 추인을 받아 자치회장을 하게 되었죠.
김지미 : 어떻게 보면 기존의 자치회장과는 다른 절차로 선출이 되신 거네요. 역시 민주화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저희가 한 이야기로는 아직까지 변호사님은 고졸이세요.(웃음) 언제 대학교를 졸업하신 거예요?
오세범 : 1994년도에 내일신문에 근무할 때인데 서울대학교에서 복학조치가 발표되었어요. 그 때 다시 학교에 가서 졸업을 했죠.
김지미 : 74학번으로 입학을 해서 94년도에 졸업을 하셨네요. 20년만에.
김지미 : 구속도 되고, 보일러공으로 일도 해보고, 언론사나 사무장 등 다양한 일들을 하셨고, 지금은 변호사가 되셨잖아요. 특히나 사무장으로 일하던 다산에서 변호사로 시작하게 되셨는데, 어떠세요?
오세범 : 기쁩니다. 가끔 지난 날도 떠오르고. 나는 변호사로서 참 행복하다.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좋은 직업인 것 같아요.
김지미 : 민변은 공부를 하실 때부터 나중에 변호사가 되면 민변회원이 되겠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오세범 : 긴급조치로 구속이 되었을 때 어머님이 면회를 오셨는데, 변호사를 선임해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선임료가 그 때 당시, 1,000만원이라는 거예요. 그 때 집 한 채가 3,000만원 정도 할 때인데, 이러다 집이 풍비박산 나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어머님께 절대 수임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때 홍성우 변호사님이 오셔서 무료로 변론을 해주셨어요. 그 때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그래서 그런 일을 하고 있는 민변에 고마움이 있어요. 변호사가 되면 그 빚을 갚겠다고 다짐했고, 변호사가 되면 그런 일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김지미 : 현재 민변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신데 어떤 활동들인지 이야기 해 주세요.
오세범 : 민변에 가입할 때 노동위원회, 국제통상위원회, 민생경제위원회 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민생경제위원회 활동을 주로 하고 있어요. 노동위원회의 활동도 사회적으로 약자가 정당한 대우를 받게끔 사회를 바꾸는 것으로 중요하겠지만,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려면 또한 민생경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민생경제위원회 활동을 열심히 하고, 민생경제위원회 안에 팀이 4개가 있는데, 그 중에 조세재정팀에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김지미 : 현재 세월호 특위에서도 많은 활동들을 하고 계신데, 활동 설명을 해주세요.
오세범 : 변호사가 되고 나서 적어도 1년은 다른 것 안 하고 변호사 업무에만 집중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4월 16일 학생들이 배와 함께 가라앉는 모습을 TV에서 몇 일간 보면서 마음이 무겁더라고요. 제가 마치 방관자로서 공범 같은 느낌도 들고. 그 모습을 보면서 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생각이 잘 안 나더라고요. 그때 민변도 대한변협도 세월호 관련한 활동을 할 사람을 모집하더라고요. 그래서 다 지원했어요. 저는 법률상담팀에 지원했죠. 제가 아직은 잘 모르니까, 일단 가족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아는 부분을 법률상담을 해주고 모르는 부분은 공감이라도 하며 문제의식을 갖고자 하는 마음으로요. 보통은 일주일에 한 번 내지는 두 번 안산에 내려가서 법률상담을 해요. 그러다보니 가족들을 많이 만나게 되고, 많이 친해지기도 하고, 이런 저런 법적요청을 맡아서 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계기로 고양터미널 화재사건도 맡게 되어 단체협상을 통해서 해결한 일도 있었어요. (참고로 YTN에 CJ푸드빌, 맥커리 등 7개회사의 공개사과방송, 사망자 1인당 위자료 3억2,000만원, 일실수입은 법령과 판례에 따르되 양측 변호사가 확인, 추모비 건립 등) 세월호 사건이나 고양터미널 사건을 접하면서 시각이 선명해졌어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기본적인 임무이고, 변호사로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것도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선 동기 연수생들과 함께 ‘생명과 안전을 소중히 여기는 변호사 모임’라는 네트워크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어요. 대한변협이나 민변에도 ‘생명과 안전위원회’ 같은 것이 만들어져서 집단재난에 대해 함께 고민을 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모임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러한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김지미 : 인생은 60부터라는 말도 있는데 열정적으로 사시는 것 같아요, 그 이유나 원칙은?
오세범 : 인생은 한 번밖에 안 사는 거니까. 정말 가치 있게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오류도 많겠죠. 그래도 ‘here and now’, 여기서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존중하자’라고 항상 마음속으로 다짐합니다. 제가 보일러공도 되어보고, 구속도 되어보고, 수배도 되어보고, 살면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해봤는데, 사람은 언제든지 역할이 바뀔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늘 사람을 존중하려고 합니다. 나도 언젠가는 상대방의 역할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의뢰인이 와도 마찬가지의 자세로 이야기를 하죠.
김지미 : 최근 긴급조치위반 재심으로 무죄선고도 받으시고 형사보상, 국가배상 결정도 난 것으로 알고 있어요. 혹시 본인 변론을 하신 거예요?
오세범 : 아니요. 이영기 변호사님이 담당하셨어요. 원래는 본인소송을 하려고 했는데, 그 때가 연수원 2년차였거든요. 시효가 당겨진다는 소리가 들려서 이영기 변호사님께 맡겼죠. 형사보상은 이미 받았는데, 국가배상은 아직 확정된 게 아니라 항소심이 앞으로 진행될 거예요.
김지미: 지난날의 고통이 금전으로 모두 보상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생활이 조금 여유로워지셨겠어요.(웃음)
오세범: 빚을 좀 갚을 수 있게 되었고.. 그건 있어요. 당분간은 생계 걱정 안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거..(웃음)
김지미 : 마지막으로 변호사로서는 후배의 입장이겠지만 인생에서는 선배시잖아요. 민변 회원들에게 인생 선배로서 한 말씀 해주세요.
오세범 : 워낙 잘 들 하시니까.(웃음) 제가 따로 드릴 말씀은 없는데… 조세재정팀도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고, 민변 변호사님들 다 열정이 있으신 것 같아요. 이러한 활동들이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김지미 : 변호사로서 말고 인생선배로서 이야기해주세요.(웃음)
오세범 :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자기 마음이 편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사람에 대한 사랑이 항상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주변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존중하고! 주변사람들과 항상 교류하면서 관심을 갖고 배려하는 삶을 사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다 보면 마음속으로도 충만한 감정이 생겨날 것 같아요. 내가 사람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면서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 말예요.
김지미 : 저는 종교가 없어서 그런 경험이 없지만 오늘 변호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성직자와 이야기를 하면 이런 느낌을 갖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래서 종교를 가지는구나 하는.. 정말 많은 교훈과 감동을 주셔서 감사드리고 다시 한번 다리 다치신 것도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