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작가와 시대정신 – 국민참여재판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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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시대정신 ㅡ 국민참여재판을 바라보며ㅡ

 

                                                                                              글_이혜정 변호사

 

문학이란 무엇일까. 작가는 현실과 유리된 채 문학이라는 고상한 틀 속에 박제되기를 우리 사회는 바라는 걸까. 어떤 삶이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일까…지난 8월 27일 비탈길에 선 문학을, 작가를 무거운 눈으로 마주하였다.

 

2013년 8월 27일 중앙지방법원 대법정에서는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작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작가들이 ‘정권교체를 바라는 젊은 시인 ․ 소설가 137명’ 명의로『강은 결코 역류하지 않습니다. – 우리의 역사도 강처럼 흘러야 합니다.』라는 제목의 신문 광고를 내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기 때문이다. 그들 고유의 표현수단인 ‘글’을 통해 현실을 고발하고 시대의 양심을 기록하며, 올바른 시대정신을 갈구하기 위한 그들의 몸짓에 우리 사회는 처벌해야 한다며 법의 심판대에 세웠다. 선언문은 특유의 문학적 감성으로 현실을 고발하였고, 고통 받는 자들의 아픔을 그들만의 더욱 예민한 촉수로 아파하며 울음을 삼킨 절절한 호소였다. 잠시 펜을 던지고 이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진정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자유롭게 낸 참 소리였다.

 

그러나 그 날 그들이 말하려던 진정성이 이념 속에서, 법의 틀 속에서 처참히 부셔졌으나 나는 알았다. 세상이 말 할 수 없는 것을 규정해 놓고 이에 대해 함부로 말했던 그들의 조급함과 용기는 빛이 났음을…그들은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었음을…그들은 절망이 아닌 희망을 파종하는 세상을 바랬음을…

 

작가들은 법과 금기의 틀을 위협하는 선택과 결단의 순간을 창조하고 그 순간이 요구하는 진실을 오래 되새긴다고 한다. 온 세계가 성공을 찬미할 때 소외된 자, 절망한 자, 고통에 신음하는 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고민하며 세상을 향해 외쳤던 그들의 ‘진실한 문장 하나’는 그 날의 아팠던 나의 마음만큼이나 오래오래 되새겨질 것이다.

      <정권교체 희망선언> 국민참여재판 최후진술서/손홍규작가

 

  저는 <정권교체 희망선언>에 참여한 젊은 시인, 소설가 137명을 대표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럴 수도 없습니다. 선언에 참여한 젊은 작가들은 각자의 생각과 양심에 따라 결심했기에 이 선언이 불러일으킨 논쟁과 법적 처벌이라는 현실을 함께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을 괴롭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이들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문제가 된 한 편의 글에 강렬한 책임의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책임의식을 저는 작가정신의 발로라고 생각합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표현을 빌자면 “작가들은 심사숙고해서 작가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며 “본인 스스로 작가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 그이들은 또한 작가에게 부여된 의무를 감당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진정한 작가는 자신의 글 뒤로 숨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글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기에 한 편의 글이 이처럼 법적 판단에 맡겨진 오늘 이 순간을 저와 마찬가지로 절감하는 것입니다.

  최후진술이란 낱말이 주는 어감에 한동안 사로잡힌 탓에 저는 오래도록 이 글을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최후로 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며 최후로 진술한다 해도 그것이 곧 진정한 최후를 의미하지는 않기에 최후 이후에 도래할 무엇인가마저 이 글에 함께 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박이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써야 하는데 쓸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저는 헤밍웨이의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파리에 머물던 시절을 돌아보며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때때로 새 작품을 시작하려는데 도저히 진전이 없을 때가 있다……. 나는 일어서서 파리의 지붕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걱정하지 마. 너는 예전에도 썼고 지금도 쓸 수 있어. 네가 할 일은 단지 진실한 문장 하나를 쓰는 거야. 네가 아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하나 써 봐.’ 그래서 마침내 진실한 문장 하나를 쓰고 나면 나는 거기서부터 계속 진행해 나갔다.”

  진실한 문장. 그러니까 이 최후진술을 시작할 수 있는 진실한 하나의 문장이 무엇일지 숙고했으나 그 문장은 쉽사리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너무 많아서일 수도 있고 혹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저는 최후진술을 시작했으므로 헤밍웨이의 표현을 따르자면 ‘진실한 문장’이 이미 저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 문장이 무엇인지 명백히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진실한 문장’이 과연 무엇인지를 은유하는 듯합니다. 진실한 문장이란 이처럼 은폐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 모두 아는 것이며 우리 가슴에 깃들었기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타인과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신비로움을 자신의 속성으로 갖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됩니다.

  지난해 겨울 우리가 썼던 한 편의 글에 대해 감히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137명의 젊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진실한 문장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결과입니다. 그것은 137명의 합의에 따른 공통의 언어이면서 각자의 내면에서 솟아나온 개별적이고 자유로운 목소리들의 총합이었습니다. 문학이 가장 사적이며 은밀한 목소리인 동시에 가장 공적이며 공공연한 목소리라는 모순을 내부에 품었듯이 우리가 쓴 한 편의 글 역시 137명의 다양한 목소리가 살아 숨 쉬는 내밀한 문장들인 동시에 이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들의 보편적인 시선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모순을 품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순이야말로 작가의 고통입니다. 창작은 이 모순을 견뎌내는 과정이며 그렇게 해서 탄생한 문장에는 창작의 과정에서 작가들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머뭇거림과 떨림의 흔적이 남게 됩니다. 그래서 파스칼 키냐르는 문학의 본질을 ‘혀 끝에 맴도는 이름’에 비유했으며 폴 발레리는 ‘소리와 의미 사이의 머뭇거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선언을 ‘혀끝에 맴도는 불안’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문학과 현실의 경계에서 느끼는 공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도처에서 죽음과 절망을 목격해야 했고 자유의 영토가 줄어드는 걸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언을 준비하고 실행하던 시간들, 젊은 작가들의 뜻을 모아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고 이 미약한 목소리가 누군가의 가슴을 파고들어 날카로운 울림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가늠하며 전전긍긍하던 시간들은 한 편의 시와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고심하며 밤을 지새던 시간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 선언을 진행하면서 우리는 또다시 불안과 공포를 견뎌야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의아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자유로운 영혼이라 일컫는 작가들이 선언문을 발표했다는 사실을 작가의 본성에 위배되는 일로 받아들이기도 하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특정한 정당 혹은 특정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한 편의 글을 썼다면 그 일은 처음부터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처럼 그 선언문을 문학으로 여겨달라고 호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글에 책임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겨울에 발표한 글에 책임을 질 것이며 책임을 질 수 있기에 발표했습니다. 그 선언의 내용이 부정당한다면 기꺼이 그 글과 함께 몰락하겠습니다. 그러나 특정한 정당 혹은 후보를 지지한 것이라는 판단에 의해서라면 몰락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 글에 담긴 가치를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묘사된 들판은 실제의 들판보다 푸르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현실을 그럴듯하게 왜곡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묘사된 현실이 육안으로 목격한 그것보다 생생하게 만져지고 느껴져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의 글이 현실을 왜곡했다면 기꺼이 비난과 비판을 감수하겠습니다. 우리의 글이 참혹한 현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면 기꺼이 철회하겠습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계의 진면목을 느낄 수 없었다면 그것은 현실이 그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문장이 부족했기 때문일 테니까요.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문장에 쓰인 단어는 사전 속에 있을 때보다 아름다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글이 사전에 실린 단어들처럼 생기가 없다면 언제든 내팽개치셔도 좋습니다. 문장을 이루는 낱말들은 사전이 가리키는 의미망보다 더 복잡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이 미묘함을 글에서 느낄 수 없었다면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가 낱말을 사적으로 소유해버린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 테니까요. 글은 쓰이는 순간 쓰는 자의 손아귀를 벗어나게 마련입니다. 글은 작가의 창작물이지만 작가의 소유는 아닙니다. 만인의 공유물입니다. 만인이 헐뜯어도 좋고 만인이 기꺼워해도 좋습니다. 글은 태어나자마자 그런 운명에 처해져 마땅한 것이기에 만약 우리의 글이 우리의 자족적인 울타리 안에 갇혔다면 누군가가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해도 달갑게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우리가 쓴 한 편의 글에 가해지는 어떤 처벌에도 진심으로 굴복하지는 않겠습니다.

  조선 후기의 문장가 박지원은 자신의 문장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인의 고개 숙인 모습에서 그이가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보고, 턱을 괸 모습에서 그이가 원망하고 있음을 보고, 혼자 서 있는 모습에서 그이가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고, 눈썹을 찡그린 모습에서 그이가 수심에 차 있음을 보고,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그이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파초 잎사귀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고 그이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제가 인용한 이 글에서 ‘여인’을 ‘세계’ 혹은 ‘한국사회’로 바꿔 읽는다 해도 의미가 통할 듯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국을 이해하고 느끼려 애썼고 그러한 생각과 느낌을 글을 통해 전달하려 애썼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시인이 되었고 소설가가 되었으나 시인으로 산다는 게, 소설가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하나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비밀을 발굴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여기, 지금 여기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에 깃든 비범함을 알아보는 사람, 삶의 비밀이 여기가 아닌 다른 어떤 곳에 보물처럼 숨겨진 것이 아니라 뭇사람들이 호흡하는 공기 중에 흔하게 널려있음을 잊지 않는 사람, 진부함 속에서 낯섦을 낯선 것들 속에서 익숙함을 읽어내는 사람, 그리하여 필멸하는 인간의 삶에 불멸의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임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훌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라고 발터 벤야민은 말했습니다. 저는 벤야민의 이 말을 글이 쓰이는 순간 순식간에 글의 속성이 변해버리는 지점을 지적한 것이라 이해합니다. 작가적 행동은 다른 어떤 곳에 있지 않습니다. 작가는 글로써 실현합니다. 작가가 쓴 글이 작가의 행동이며 글을 통해 추구했던 무언가의 실현입니다. 우리가 썼던 한 편의 글은 이미 실현되었습니다. 거기에 젊은 시인, 소설가 137명의 생각이 표현되었고, 표현되는 순간 이루어졌습니다. 무엇을 이루었냐고 묻는다면 ‘진실한 문장 하나’라고 답하겠습니다.

  인내심을 갖고 긴 글을 들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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