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3/26 월례회 – 김수행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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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월례회 : 김수행 교수 강연

            정치경제학의 현재적 의미”

              일시 : 2008. 3. 26. 수요일 7시

              장소 : 민변 사무실











김수행 교수 “美 주도 신자유주의 더는 활로 없다”
입력: 2007년 11월 19일 17:34:34
 
“미국 경제에 대한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해 있습니다. 미국발 경제 위기가 예전과는 차원이 달라 보입니다. 이제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는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한층 강하게 듭니다.”







이번 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임하는 김수행 서울대 교수는 지난 16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마르크스의 공황 이론으로 박사논문을 썼다.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을 새롭게 이해한 부분은 그의 학위논문이 세계 마르크스주의 학계에 특별히 기여한 부분이다. 그는 신자유주의를 이끌고 있는 미국 경제가 이제 벽에 부딪혔다고 진단한다.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 프라임 모기지론)’ 위기와 달러화 하락은 그 상징적 신호탄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이자율을 계속 낮추고 있어 외국 투자자뿐 아니라 미국 내 투자자들이 달러 가치 하락을 우려하는 상황입니다. 미국은 복지국가를 해본 경험도 없고, 해외로부터 일종의 ‘공납’으로 유지해온 나라인 만큼 지금 상황에서 더 이상의 활로가 없습니다. ‘불안(테러)’을 이용해 치안과 군사력으로 자본주의의 새 활로를 찾는 움직임을 보입니다만 전세계적으로 확대되는 평화·반전 담론 속에 이마저도 신통치 않을 것입니다. 무기 팔아먹을 곳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니까요.”

그는 “뉴욕 증권시장이 대폭발하면 세계 전체의 공황이 닥칠 것”이라며 “그러면 세계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가까운 장래에 달러화를 대신해 유로화 주도의 경제가 출현하리라는 예상이다.

퇴임을 앞둔 그는 후배 교수들과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서울대출판부)라는 논문집을 냈다.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원리를 설명해오는 데 치중하느라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던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김교수도 새로운 사회에 대한 모색을 하지는 못했다. 퇴임 후 그가 파고들 과제다.

하지만 학교를 떠나는 그의 마음은 가볍지 않다. 후임을 정하지 못하고 나가기 때문이다. 서울대 경제학부는 김교수 퇴임 후인 내년 3월 후임 교수를 뽑을 예정이다. 서울대에서 유일했던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인 그가 퇴임하면 지금 33대 1의 싸움에서 34대 0으로 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주류경제학 일색의 교수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학생들입니다. 내가 서울대에 교수로 왔던 1989년에도 사정은 지금과 마찬가지였어요. 교수들은 마르크스주의자는 안된다고 반대했지만, 대학원생들이 농성하며 마르크스경제학 전공자를 요구했기에 내가 올 수 있었습니다.”

김교수는 교수들의 성향이 유별나게 더 보수화됐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 유학 출신의 계량경제학 전공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는 한신대 교수로 있던 83년 1학기부터 서울대에서 시간 강의를 했지만 스스로도 서울대에 전임교수로 부임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대학원생이던 신정완(현 성공회대 교수), 류동민(현 충남대 교수), 안현효(현 대구대 교수), 박도영(현 영산대 교수) 등이 농성까지 벌였고, 그 덕에 그는 서울대 교수가 됐다. 47세 때였다.

그로부터 18년. “스스로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학생이 가장 많은 학교가 된 서울대의 학생들은 김교수 후임이 누가 될지에 큰 관심이 없다. 김교수는 “국민들의 세금을 받는 국립대학으로서의 지위가 흔들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말했다. 적어도 국립대학이라면 “지금 당장은 쓸모 없어 보이는 학문이라도 다양하게 펼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대가 부잣집 학생들로 채워지는 것이 큰 문제”라고 했다. “집안 형편이 좀 넉넉지 않은 학생들이라면 전철이나 버스 타고 다니며 구걸하는 사람들도 보고 생각도 좀 하게 될텐데, 돈을 잘 버는 집안에서만 오니 한국사회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학생들이 한국사회의 지도급으로 올라가 버리면 그런 경향은 더 심화되는 거죠. 우리 사회 전반에는 ‘노동자들이 탐욕스러워서 파업한다’ ‘노동자를 착취할 수밖에 없다’ 등의 인식이 뿌리내리겠죠.”

마르크스 연구자인 그는 현실 개입보다는 연구와 후진양성을 통해 그의 몫을 했다. 스스로도 “미련하게 곰처럼 앉아서 10시간이고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였기에 한 우물만 팔 수 있었다. 소련 사회주의 붕괴 후인 90년대 초반 많은 동료 연구자들이 포스트마르크스주의니, 문화연구로 떠나갈 때 그는 자리를 지켰다. 그의 연구활동의 빛나는 부분은 자본론과 국부론, 금융자본론 등의 원서 번역이다. 한 개인이 이룰 수 있는 성취의 폭을 좁힘으로써 더욱 확실히 이 분야에 기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김교수의 가장 든든한 학문적 후원자는 부인 김인자씨(63)다. 그는 김교수의 유학시절 유일한 대화 상대였다. “공부할 때 월 1회 만나는 지도교수 외에는 대화 상대가 없었어요. ‘그 친구’(부인을 지칭) 데리고 펍(주점)에 가서 내 이론을 얘기하고, 이해를 시키자면 쉬운 언어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다른 마르크스 연구자들과 달리 쉽게 말하고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김인자씨는 현재 군포 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김교수는 이제 ‘벤처사업’을 하려고 한다. 바로 마르크스주의 대학원을 설립하는 것이다. ‘사회과학대학원’(가칭) 준비를 위해 몇 해 전부터 오세철 전 연세대 교수, 황동하 박사 등과 함께 일해오고 있다. “이번 학기에는 80명이 등록했어요. 이 분들 가운데 대학생은 세 명뿐이고 대부분이 회사원, 노동조합 활동가, 프리랜서, 회계사 등 생활현장에서 목 말라서 온 사람들입니다. 사회가 자꾸 삐걱거리니까 이것을 어떤 식으로 파악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려고 오는 거예요.”

김교수는 적어도 수십억원이 필요한 대학원 설립이 가까운 장래에 가능하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계기가 생기면 학교를 세우거나 다른 대학과 연대해서 프로그램을 짜는 식도 가능하겠죠. 그러나 아직은 교육운동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으로도 이 학교가 괜찮다, 학생들을 통해서 이런 학문이 필요하다 하는 공감대가 만들어져야죠. 그래야 모금도 가능한 거고. 결국 학생들이 필요를 느껴야 해요.”

〈글 손제민·사진 박재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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