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헌법 제22조를 반추하다-법, 예술을 그리다 후기 – 조은파 인턴

2013-06-05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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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헌법 제22조를 반추하다-법, 예술을 그리다
 
글_조은파 10기 자원활동가
 
페스티벌 “불온한 예술들”
 5월 9일,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는 표현의 자유 확대를 위한 페스티벌 “불온한 예술들”이 열렸다. 페스티벌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광화문을 찾아갔다. 페스티벌의 시작으로 ‘표현의 자유 연대’에서 플래시몹을 벌이면서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다고 한다. 박근혜와 고흐가 악수를 하고 줄넘기를 하고 있는 풍경에 광장은 놀라고 있는 게 아니라는 관리자의 제지가 있었다고 들었다. 열려있지만 놀면 안 되는 광장과 헌법에서 자유를 보장받지만 정치는 하면 안 되는 예술을 연결 지으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가볍게 내리는 봄비 속에 생각은 빗방울처럼 튀어 오르고, 발걸음을 재촉해 세종문화회관에 도착했다.
 
예술을 둘러싼 정치적인 논의; 예술의 탈정치성
 도착했을 때는 예술의 자유와 법의 구속을 주제로 한 토론 “예술, 헌법 제22조를 반추하다”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법학, 미학, 문화적 측면에서 예술·표현의 자유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 토론에서 예술에 대한 탄압은 국민을 탈정치화, 반정치화하려는 의도의 연장선이라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우리사회에서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예술을 ‘예술답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간단한 예로 사회문제에 대한 의견을 표명한 연예인, 소설가, 만화가 등에게 ‘폴리테이너’라는 말은 그들을 ‘비(非)호감’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며 비난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들라크루아의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7월 혁명을 묘사하고 있다. 작품의 전면에는 ‘자유, 평등, 박애’를 의인화한 인물 마리안느가 한 손에는 총을, 한 손에는 프랑스의 국기를 든 채 자리하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직접적인 방식으로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 샤를 10세의 왕정에 대한 분명한 반대. 예술이 탈정치적이어야 한다면 너무나도 ‘정치적’인 이 그림은 예술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그림을 ‘예술’, 그것도 예술의 가장 고전적인 영역인 ‘순수예술’이라고 칭한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대한 찬사는 그림의 미적·예술적 가치를 향한 것인가, 작가의 명성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그림이 소장된 루브르 박물관을 향한 것인가. 탈정치성을 예술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지배층인 양반의 위선과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 박지원의 ‘호질(虎叱)’은 문학으로 논할 수 없다. 관리들의 폭정과 군역의 문란함을 사실적이고 처절하게 그려낸 정약용의 ‘애절양(哀絶陽)’ 또한 마찬가지다. 4·19를 노래한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 역시 그렇다. 이렇듯 예술의 탈정치성에 대한 논의는 모호하며 정당성이 없다. 정치, 나아가 삶과 분리된 ‘순수한 예술’을 이유로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하는 논리가 더욱 ‘정치적’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기본권으로서 문화권과 보호 정책의 함의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 영상물 등급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그리고 셧다운제까지 최근 몇 년 사이 ‘규제’를 내용으로 하는 일련의 정책들이 다방면에서 등장하였다. 이들은 정책의 근거로 보호를 주장한다. 청소년의 건강을 위해, 때로는 영상물에 충격 받을 성인을 위해, 건전한 사회를 위해 유해한 것들은 차단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정책의 근저에는 예술을 창작할, 혹은 향유할 자유는 부차적인 권리라는 사고가 깔려있다. 예술의 탈정치성에 대한 주장은 예술과 정치를 인간의 본질이 아닌 부수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러한 사고와 궤를 같이 한다. 토론에서는 예술이 부수적 행위로 치부되는 현상의 원인으로 우리사회에서 통용되는 예술의 정의가 편협하다는 사실을 들었다. 예술을 인간의 삶의 근저에 자리한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행동으로 파악한다면 예술 표현의 권리로서 문화권은 부차적인 영역이 아닌 최우선 과제이다.
 나아가 토론에서는 문화예술정책에 내포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규제는 국가의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과 맞닿아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청소년보호법과 청소년인권법에 대한 비교였다. 문화연대에서 주장하고 있는 청소년인권법은 청소년보호법의 대체입법이다. 두 정책 모두 목적은 청소년을 위한 것이지만 한쪽에서는 ‘보호’를 한쪽에서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보호는 힘이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울타리를 제공한다는 것으로 시혜적인 입장을 전제로 한다. 청소년을 우리사회의 주체로 인정한다면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보호’하는 쪽보다 정당하고 실효성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에 대한 권리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이라면 응당 누려야 할 예술의 자유, 사회구성원이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정책과 법의 역할일 것이다.
 
법, 예술을 그리다
 흔히들 ‘법’은 보통의 언어와 다르다고 말한다. 법은 명확함을 추구하며 지켜야 할 영역과 배척해야 할 영역을 경계 짓기를 요구한다. 보통 처벌에서 법의 힘이 작용한다고 생각하지만, 법의 언어에 포섭되는 순간부터 힘은 발휘된다. 적어도 사회가 법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러하다. 사람들은 법에 규정되지 않은 것들은 훼손하고 규제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심한 경우 사람들은 법이 그 훼손을 허용했다고 생각한다. 근래 부쩍 늘어난 광주민주화운동 폄하발언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한 글은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판단한 대법원의 판결을 주장의 근거로 들고 있다. 대법원의 당혹감은 차치하고, 사람들에게 법이 가지는 의미와 파급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예술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외연과 깊이를 확장해왔다. 창조를 기반에 둔 예술은 언제나 새로워야 하기 때문에 항상 불명확할 수 밖에 없다. 법과는 그 성격이 너무도 다르다. 그래서 법의 관점에서 예술을 바라보고 탐구하는 것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예술을 끊임없이 그려야 한다. 개방과 폐쇄의 속성을 동시에 가진 까닭에 법은 보수적이면서 동시에 진보적이어야 한다. 가장 진보적이고 또한 개방적인 예술은 분명 법을 풍부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면 법의 명확함 또한 예술의 자유를 지키는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닫힌 광장
 돌아오는 길, 대한문이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문에서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농성촌이 화단으로 변한지 오래다. 그 화단의 꽃들이 시들어버렸다고 한다. 제대로 된 토양에서 자라지 못한 탓이라던 한 자원활동가의 말이 떠오른다. 청계광장과 시립미술관, 시청이 있는, 볼거리 많은 서울의 중심부지만 그곳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라진 곳, 문은 열려있으되 광장이 아니다. 광화문은, 그리고 지금 우리사회는 부채의 사북자리마냥 좁다. 다양한 것들을,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이 말하고, 노래하고, 그리는 진짜 광장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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