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의 활동] HRBA2J 회의 참석 후기 – 김종우 변호사

2012-06-14 195

HRBA2J 회의를 다녀와서
– 인권에 기반한 사법절차접근(Human rights based approach to justice) –




글_김종우 변호사


 


 


1. 갑작스러운 회의 참석


 


갑작스레 회의 참석자를 모집한다는 메일을 받아보고, 바로 대표변호사님 방으로 달려갔다. 법정 기일에 매여 있지 않은 실무연수기간중의 변호사다보니, 대표님만 허락해주신다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최종 참석자로 선정까지 되고 나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가슴떨리는 두 단어, “경비 지원!”


 


2. 영어


 


법학전문대학원 내내 영어공부를 참 많이 했다. 일주일 중 나흘 이상을 영미법이나 미국계약법, 국제법 공부에 쏟아 부었는데, 가끔은 내가 미국 로스쿨에 유학온 게 아닌가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는 순전히 통상법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준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별 관심이 없었던 국제상사중재대회에 참여하여 비엔나까지 날아가 중재인들 앞에서 영어 변론을 경험해본 것도 영어공부의 일환이었다는 설명이 가능한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영어를 공부하지 않았다면, 감히 민변을 대표하여 발표를 하러 외국으로 떠나겠다고 자원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영어를 잘한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외국인과 의사소통을 잘 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고 말할 수는 있으니까.


 


3. HRBA2J


 


어떤 회의인지, 어떤 발표내용인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회의를 다녀온 지금도 Access to Justice 라는 개념이 어떠한 것인지, Advocacy가 무언지 잘 모르겠다. 인권 활동가들, 특히 아시아지역 인권 변호사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그들의 고민과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일테니, 굳이 그 자리에서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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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코디네이터들과 대회 참가자들



 


4. 발표


 


민변의 ‘회원 1,000명 유지 정책’과 민변이 실천하는 ‘인권에 기반한 사법절차접근(Human rights based approach to justice. HRBA2J)을 위한 활동’의 성공담이나 실패담이 발표 주제였다.


 


우선 회원 유지 관련은, 민변총회에서 얻은 민변 발전전략 보고서가 큰 도움이 되었다. 넘치는 내용을 어떻게 간략히 발표하는지가 문제였다.


 


그러나 성공담/실패담은 쉽지 않았다. 민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공부하고 이를 녹여내는 성공담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결과,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도중에서야 겨우 촛불시위, 강정마을, 과거사 세 가지를 선정할 수 있었다.


 


촛불시위는 민변이 기존에 수행하던 기본적 인권옹호활동에서 한 발 나아가, 정책적 역량까지 강화해야 함을 일깨워준 사건이라고 판단한다. 시민사회의 요구는 그만큼 수준이 높아진 것이다.


 


또한 강정마을의 민변활동은 민변 활동가의 파견과 파견된 활동가를 지원하는, 공간적, 경험적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도였다고 판단한다. 메일링 리스트를 통한 상시적인 의사소통으로 서울과 강정마을, 경험이 풍부한 노장과 패기가 넘치는 신예가 힘을 합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과거사 재심 사건은 공익변론이 단지 민변 활동가의 희생으로 이루어내는 성과만으로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민사 손해배상 소송을 통해 충분히 이윤까지 창출할 수 있는 성공사례로 판단한다. 이와 같은 구도는 다른 집단소송, 예를 들면 아파트 하자 관련 소송이나 임대아파트 분양전환 소송, 비행장 소음 소송 등과 다르지 않고, 공익활동과 수익활동이 일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게 만드는 상상력을 선물했다.


 


5. 다른 나라의 인권활동가들


 


중국 발표자의 장애인권 소송 사례, 필리핀 발표자의 중고등학교용 인권 교육 교재 개발 사례, 캄보디아 발표자의 열악한 국내 인권옹호 상황 설명 등이 계속되었다.


 


특별히 더 기억에 남는 것은, UN의 가장 멋져보이는 기구 중 하나인 OHCHR(Office of the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에서 일하는 직원이 UN의 인권옹호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발표였다. 완벽한 단발 헤어컷과 주름이 잡힌 하얀 블라우스에 검정색 펜슬 스커트, 각이 진 이지적인 검은 뿔테안경으로 치장한, 전직 로이터 기자인 중국계 UN직원이 완벽한 영어로 UN인권옹호절차를 설명하였다. OHCHR 직원이라니 정말 대단한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마치 권고적 효력밖에 없는 OHCHR의 한계를 외향를 통해 상징적으로 웅변해주는 듯 했다. 당장 필요한 인권침해 구제에 대해 설사 UN이 기적적으로 빠르게 대처를 해주었다 해도, 해당 정부가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 다음엔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느냐는 파키스탄 변호사의 질문에, 그 UN 직원은 현재로서는 OHCHR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답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게는 질문이라기보다는, UN이 더 실효성 있게 일을 해야 하는게 아니냐는 촉구로 느껴졌는데. 결국 UN 직원은 인권활동가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그냥 공무원일 뿐이라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이 컨소시엄의 의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는 위와 같은 UN의 인권옹호절차가 한계가 있지만 잘 이용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점 등을 발표를 통해 지적해 주었다. 지나치게 낙관주의로 빠지는 것도 위험하지만, 지나치게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아, 역시 공감은 공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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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임토론 장면


6. 현장 답사


 


대부분의 일정이 회의장에서 발표 및 토론, 조별 토의로 이루어져 있기에, 하루 종일 햇볕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 중 반나절을 할애해 태국의 다국적 기업 공장과 지역주민의 삶의 변화를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 현장 답사를 다녀왔다.


 


지역주민들 및 지역활동가의 이야기를 듣고, 때때로 울리는 폐가스 배출 경고신호를 들으며, 공장과 화학물질 저장탱크를 살펴보았다. 투자로 인하여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은 분명 장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세심하게 계산되지 않는 단점들이 많이 있지 않을까 싶다. cost – benefit 분석에서 주민들의 환경권, 평화롭게 살 권리, 전통을 지키며 그대로 살 권리 등은 코스트로 계산되지 않았을 것이다. 주민들의 얼굴이 많이 슬퍼보였다.


 


그런데 답사 현장은 태국의 동부지역인데, 이쪽으로 이동하는 와중, 갑자기 문자메시지가 도착한다. 태국 남부는 위험한 곳이니 당장 그 곳을 떠나라는 외교부의 메시지였다. 외교부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좋은데, 내 위치를 추적해달라고 부탁한 기억은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해외여행중인 국민들의 위치를 추적해서 보호조치를 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법률이라도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설사 그런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위헌적인 법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7. 문화의 밤


 


나름 고된 3일간의 공식일정이 모두 끝나고, 마지막 저녁에는 참가자들의 춤과 노래, 만담 등을 나누는 문화의 밤 행사가 있었다.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해서 무지한지라, 그리고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바위처럼을 부르며 율동을 하였다. 황필규 변호사님과 듀엣으로 공연을 하였는데, 급히 가르친 율동(그렇지만 가장 단순한 버전이었다!)이 제대로 될 리가 없고, 그 어설픈 율동을 보는 재미가 공연의 90%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는데, 역시 맞아떨어져서 큰 기쁨을 선사한 것 같다. 다만, 분명 한국의 NGO 활동가들이 즐기는 노래와 율동이라고 소개했는데, 그 노래는 K-POP이냐는 질문에 무너졌다.


 


인기가 많은 황필규 변호사님은, 1월의 액운은 2월에 막고, 2월의 액운은 3월에 막는다는 민요를 별도로 불렀다.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고, 내일 할 일은 모레로 미루자~ 로 들려서 엄청 흥겨웠다.


 


8. 계시


 


매일 저녁이 되면 황필규 변호사님과 근처 술집에 가서 맥주병을 밤늦게까지 기울이곤 했다. 동석한 다른 변호사들을 위해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어려운 상황도 있었지만, 둘만 남게 되면 그리운 한국말로 공익변호사의 전망과 계획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나에게 인권이라는 주제는 항상 약간의 거북함과 거리감이 있어서, 항상 지지하고 있고 함께 하고 싶고 지원을 아낄 생각은 없지만, 내가 바로 인권활동가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부끄럽고 남사스러운 일이다. 나처럼 주류에 속하고 어려움 없이 자란 사람이 인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부잣집 도령이 여유를 주체 못하고 자신보다 못난 사람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보는 UN 직원처럼, 나도 그렇게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닐까?


 


그렇지만 나처럼 부족하고 못난 평범한 사람도 인권활동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특히 한국을 넘어서 아시아로 눈을 넓히면 더 할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것도 나 혼자가 아닌, 여러 아시아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며 연대활동을 하는 것은 당장 이러한 회의에 다녀온 내가 가장 제격 아니겠는가?


 


또한 마음의 빚이 있다. 강정마을에 오랜 기간 파견중인 새내기 변호사님들도 이 회의에 참가하고 싶었을 것인데, 그들은 한국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많기에 그 자리에 있어야 했을 것이고, 실무연수 기간으로 인하여 각종 상황에 대처하는데 별 쓸모가 없는 내가 이런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을 것이다. 인생이란게 원래 다 그런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빚은 갚아야 하는 것이고, 어떻게 갚아나갈 것인지는 시간을 두고 고민해야겠다.


 


갑작스럽게 HRBA2J 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갖게 되고, 황필규 변호사님을 만나게 되고, 또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면서, 문득 서울에서 태국으로 출국하기 전날 걷다가 우연히 듣게 된, 소피 마르소가 데뷔한 영화의 주제곡이 떠올랐다. 역시 이런 노래가 괜히 갑자기 내 귀에 들어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묵시론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Met you by surprise [우연히 당신을 만났죠]


I didn’t realize [깨닫지 못했어요]


that my life would change forever [내 인생이 영원히 바뀔거라는 걸]


Saw you standing there [당신이 거기 서 있는 것을 보았죠]


I didn’t know i’d care [신경쓰게될지 몰랐어요]


there was something special in the air [뭔가 특별한 분위기가 있었죠]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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