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랑고시랑] 그녀가 남긴 파편들

2012-03-13 176

그녀가 남긴 파편들

 

글_좌세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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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 일깨우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들을 모아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

– Walter Benjamin

 

1964년 2월 8일 동아일보 호외

 

서울 시내 중학교 합격자 명단이 ‘호외’로 실리던 시절. 성심여중 합격자 명단에 그녀의 이름이 보인다. 아마도 청와대 생활이 막 시작되었을 즈음이 아닐까 싶다. 최근 화제가 된 그녀의 ‘수영복’ 사진은 이로부터 2~3년쯤 뒤에 찍은 것일 게다. 같은 날 동아일보 1면은 ‘군정 하 4대 의혹사건’ 중 하나인 ‘새나라자동차’ 250대가 다시 면세 특혜를 받고 수입되어 조립 중인데 ‘또 하나의 의혹’이 될듯하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그리고 당시는 ‘민생고’의 시절이었으니, “먹어야 산다는 엄연한 현실 앞에 13세 딸과 함께 밤거리의 여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과(경향신문, 2. 12. 2면), 깡통을 주우러 포천의 어느 미군부대 철조망을 넘으려다 머피 일등병이 쏜 총에 왼쪽 어깨를 맞아 즉사한 17세 소년의 사연(동아일보 2. 7.), 이 ‘기막힌’ 사건들 모두 그해 구정을 앞두고 생긴 일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나니 안소니 퀸・그레고리 펙 주연의 ‘나바론’은 단성사에서, 최무룡·최은희 주연의 ‘검은 상처의 부르스’는 을지극장에서 구정 ‘대개봉’ 박두.

1969년 6월 21일 경향신문 7면, ‘세계 최대 유조선 진수, 박근혜양이 테이프 끊어’

 

당시 성심여고에 재학 중이던 ‘근혜양의 요꼬하마 진수식 참가’ 기사다.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흑백사진 속의 그녀는 활짝 웃고 있다. 같은 면 바로 위에 실린 기사는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 의원 초산테러’ 사건. 괴청년 3명이 뿌린 초산으로 김의원 승용차의 차체 페인트가 벗겨졌으며, “배후가 드러나면 엄벌에 처할 것”이라는 기사. 그러나 바로 그날 “박대통령 3선의 길을 터놓는 개헌작업이 민족과 국가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며 국민이 지지해주기 바란다는 당 고위간부의 발언에 대한 반응”을 묻는 공화당의 ‘개헌 앙케트’가 진행 중에 있었으니(6. 21. 동아일보 1면), 공화당 고위 간부의 뜻이 ‘현실’이 되는 데는 채 석 달이 걸리지 않았다. 3선 개헌안이 ‘기습통과’된 것은 일요일 새벽. 신문도 쉬는 날이었다. 바로 그날 일요일 오후부터 전국에 쏟아진 ‘기습폭우’로 185명이 사망했다.(9. 15. 동아일보 7면)

   

1970년 1월 20일 동아일보 3면, ‘박근혜양은 서강대에, 정성혜양은 서울대에’

 

대학 입시가 있던 날이었나 보다. “박대통령의 영애 근혜양이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응시”했고 “정일권 총리의 2녀 성혜양이 서울대에 응시”했는데, “이 두 여학생은 모두 성심여고 출신으로 근혜양이 1위, 성혜양이 2위를 차지했다”는 내용의 기사다. 바로 다음 날자 신문들은 “대학 교양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문교부의 발표를 싣고 있으니, 그 내용인즉 교양 필수과목이었던 철학개론과 자연과학개론을 선택으로 돌리는 대신 교련과 민주주의이론은 교양필수로 추가한다는 내용이다. “민주주의이론을 필수과목으로 한 것은 대학생에게 반공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문교부의 발표문이 실린 바로 그 밑에는 “서울에서만 밤새 9명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졌다”는 기사.(경향신문 1. 22. 3면) 아! 그때를 아십니까?

1972년 10월 23일 동아일보 7면, “박근혜양 스페인에, 유조선 진수식 참석”

 

“박대통령의 맏딸 근혜양이 스페인의 엘페롤 시에서 거행될 대형 유조선 천우호 진수식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22일 빠리에 도착했다”는 기사.

 

1972년 10월 17일 하오 7시,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 국회해산, 헌법기능 정지. 그로부터 4일 후인 “21일 하오 5시, 근혜양은 KAL기편으로 김포공항을 떠났다”(10. 23.자 경향신문 7면) 기사대로라면 그녀는 “24일 뱃머리에 삼페인을 터뜨려” 배를 진수시켰을 것이다. 당시 각 대학은 “일대 유신적 개혁”을 위하여 “당분간 휴교 조치”였으니 스페인으로의 출국은 그녀의 수업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1974년 1월 이공대 수석졸업생이 된다.(1974. 1. 29. 동아일보, 7면)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던 시인이 있었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는 긴급조치 1호가 나온 바로 그때가 1974년 1월이다. 동아일보의 고바우 영감이 ‘입춘대길’을 떼어내고 ‘침묵은 금이다’를 내건(1974. 1. 9. 동아일보, 7면) 그때가 바로 1974년 1월이다.

1974년 8월 15일, 그 후

 

1974년 8월 15일의 ‘비극’ 이후 그녀는 ‘영애’에서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그녀는 2007년에 낸 자서전에서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삶은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었다”는 고백을 한 바 있다.(102쪽)

 

그녀가 청와대 공식행사에 참석한 것은 1974. 9. 19. 오전에 있었던 아시아경기대회 선수단의 청와대 예방 때였다.(동아일보 1974. 9. 19. 1면) 이후 그녀는 ‘구국여성봉사단’(동아일보 1976. 4. 30. 2면), ‘새마음봉사단’ 총재(경향신문 1979. 5. 2. 7면)의 직함과 함께 ‘국익 최우선’이라는 정치신념을 가진 아버지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보게 된다. 그녀에게 ‘다시 찾아든 비극’과 세종로 1번지에서 신당동 62의 43 옛집으로의 주민등록이전(동아일보 1979. 11. 22. 7면), ‘9년 침묵’을 깬 첫 인터뷰에서도 변하지 않은 ‘헤어스타일’과 옷차림(경향신문 1988. 8. 23. 4면), 다시 10년 만에 “아버지의 명예를 지킬 수 있게 됐다”는 그녀의 당선 소감(한겨레 1998. 4. 3.)에 이르기까지.

   

폭풍이 불어오는 곳, 그 곳은 어디?

 

내가 떠올려본 그녀의 ‘파편들’은 여기까지다.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는” 우리들 앞에 놓인 이 일련의 ‘파편들’ 위에서 나는 이 파편의 더미를 미래 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떠밀어 올릴 폭풍을 기다린다. 폭풍이 불어오는 곳, 그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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