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조변호단][과거사위][논평] 공권력의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국가의 법적 책임을 부당하게 제한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비판한다.

2020-03-27

 

 

공권력의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국가의 법적 책임을 부당하게 제한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비판한다.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 합헌 결정에 대하여

 

헌법재판소는 어제(2020. 3. 26.) 반인권적인 긴급조치의 집행으로 기본권이 침해된 피해자들의 국가배상청구를 사실상 가로막은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에 대하여 합헌 결정을 함으로써 공권력의 중대한 인권침해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판결을 하였다.

 

긴급조치 제1, 4, 9호는 대통령 박정희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탄압하기 위하여 헌법에서 정한 요건도 무시한 채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훼손한 것으로서 대법원 전원합의체와 헌법재판소 모두 처음부터 위헌무효라고 선언하였다.

 

박정희 유신체제는 유신헌법의 제·개정을 요구하거나 민주주의를 요구한 시민들을 영장도 없이 체포하여 구속하였고, 교실이나 술자리, 일상의 공간에서 정부에 비판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영장도 없이 구속하여 접견권도 보장하지 않고 강압적인 수사를 한 뒤 기소하여 유죄판결을 받게 하였다. 긴급조치 제1호, 제9호의 발령·적용·집행을 통한 국가의 의도적·적극적 불법행위는 우리 헌법의 근본이념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정면으로 훼손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여야 한다는 국가의 본질을 거스르는 행위이므로 불법의 정도가 심각하며,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 역시 이례적으로 중대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도 긴급조치에 대하여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현대 입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공권력 행사로서 중대한 인권침해에 해당한다’고 진실규명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대법원(이상훈, 조희대, 신영철, 김창석 대법관)은 2014년 10월 27일 ‘법령이 위헌으로 선언되기 전에 그 법령에 기초하여 수사가 개시되고 유죄판결이 선고되었더라도 그러한 사정만으로 유죄판결에 의한 복역 등이 곧바로 국가의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전제한 뒤, 긴급조치에 의하여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구금하여 수사를 진행하고 공소를 제기한 수사기관의 직무행위나 긴급조치 제0호를 적용하여 유죄판결을 선고한 법관의 재판상 직무행위는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하였다(대법원 2013다217962 판결). 위 대법원 판결은 유신정권이 법률도 아닌 긴급조치라는 ‘법’ 형식을 빌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며 무고한 시민들을 감옥에 가두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법 형식논리에 빠진 독단으로 실질적 법치주의 원리에도 위배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번 헌법재판소 사건은, 공권력의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의 경우 국가행위로서 외관을 갖추었다면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을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라도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당연히 배상책임을 부담하여야 한다는 헌법상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5:3의 의견으로 국가배상책임의 성립요건으로서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을 규정한 심판대상조항은 합헌이라는 결정을 선고하였다. 다수의견은 ‘국가의 행위로 인한 모든 손해가 이 조항으로 구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긴급조치로 인한 손해의 특수성과 구제의 필요성 등을 고려할 때 국가가 폭넓은 배상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면 입법자가 별도의 입법을 통해 구제하면 된다고 판시하였다.

 

대통령이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여 초헌법적인 권한으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훼손하면서까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이 사건에서 국가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무슨 사건에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인가. 게다가 과거 유신체제가 긴급조치에 대한 사법부의 판결로 완성되었는바 긴급조치의 인권침해에 대하여 사법부에게도 그 책임이 상당히 있다는 점에서, 입법을 통한 구제를 주장하는 것은 헌법재판소로서 책임 있는 자세라고 보기 어렵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이례적으로 중대한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배상에서도 개별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을 요하게 되었고, 부정의한 규범의 준수에 따른 피해를 사후적으로 회복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로써 법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배상청구에 관한 법률조항이 오히려 법치주의에 큰 공백을 허용하였음은 물론이고, 국가의 기본권 보호의무에 관한 헌법 제10조 제2문에도 위반되는 불합리한 결과가 빚어졌다.

 

헌법재판소가 책임을 회피한 지금, 대법원이 스스로의 과오에 책임을 다해야할 차례다. 대법원은 긴급조치 발동 행위에 대하여 위법성을 인정하는 것을 회피하고 있다. 긴급조치에 따른 공권력의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하여 근본적인 책임을 묻고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조속한 판단이 필요하다. 대법원에 긴급조치와 관련하여 수십 건이 재판 계류 중에 있다. 대법원은 긴급조치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회부하고 긴급조치 발동 행위의 위법성에 대하여 헌법에 부합하는 판결을 해야 할 것이다.

 

헌법재판소 판단의 당부를 떠나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왔다. 이제 긴급조치뿐만 아니라 ‘이례적으로 중대한 불법행위’ 전반에 대하여 법치주의에 큰 공백이 생겼다. 국회는 국가의 조직적 인권침해범죄 등에 대한 시효배제와 긴급조치 피해자들에 대한 별도의 구제절차를 담은 특별법 제정을 신속하게 추진해야 한다.

 

2020년 3월 27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긴급조치변호단 · 과거사청산위원회

 

200327_긴급조치변호단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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