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 “사서 고생하고, 배워서 남 주자.” 이덕우 변호사 인터뷰

2018년 12월 17일 minbyun 255

[회원인터뷰] “사서 고생하고, 배워서 남 주자.” 이덕우 변호사 인터뷰

 

– 작성 : 심재섭 변호사

올해 마지막으로 실릴 인터뷰에는 민변의 초기부터 함께 하신 선배님을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꾸준히 약자의 편에서 한 길을 걸어오신 이덕우 변호사님 말고는 달리 떠오르지가 않았습니다.

지난 목요일 갑자기 내린 눈과 서초동의 부족한 주차공간을 원망하며 약속시간을 훌쩍 넘겨 법무법인 창조에 도착했습니다. 변호사님께선 감사하게도 저의 지각을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고, 바로 인터뷰가 시작되었습니다.

심재섭 (이하 “심”) : 소개는 달리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법원에 가시고 싶은 마음도 가지셨다고 읽었는데, 변호사를 선택한 이유가 어떠신지요. 당시로서는 공직에 가지 않는 수료생이 소수이지 않았습니까.

이덕우 (이하 “이”) : 소수는 아니고, 절반 정도였던 것 같아요. 원래는 판사를 하고 싶어서 시험을 준비했죠. 87년도에 시험에 붙고, 88년부터 89년까지 2년 동안 연수원을 다녔어요. 교수님들이 다 판사, 검사님이시잖아요. 그런데 법원 교수님들도 맘에 안 들고, 검찰 교수님들도 맘에 안 들고. 연수원 입소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법원은 답답해서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국제통상 이런 것을 공부하는 학회가 있었나……. 잘 기억이 안 나요. 제가 19기인데, 18기까지 제대로 된 학회는 노동법학회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도 하나 만들자 해서 동기들하고 ‘기본권학회’라고 만들어서 학회 활동을 했어요. 그게 이후에 인권법학회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학회 활동을 하니까 더욱 변호사를 해야겠다 싶었지요.

심 : 그 즈음이 민변이 만들어진 때이지 않습니까. 연수원에 민변의 존재가 잘 알려져 있었나요.

이 : 다 알지는 못한 것 같고, 일부. 노동법학회나 기본권학회 회원들, 학교 다닐 때부터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들은 알고 있었죠. 당시 민변 창립할 당시, 창립회원 선배들과 연수생들이 만나서 정보도 듣고 했어요.

지금도 기억하는데, 성공회대 들어가는 데에 있는 덕수궁 쪽에 레스토랑. 시국선언도 많이 하고 했던… ‘세실’인가 하는 레스토랑이에요. 돌아가신 황인철 변호사님이라고, 선배님께서 우리 기본권학회와 노동법학회 회원들을 불러서 식사를 사주셨어요. 부자인 연수생들은 그런 곳을 자주 가 봤겠지만, 나처럼, 허허 여튼 우리들은 거창한 코스요리 양식을 먹고 참 좋았지요. 아, 변호사 되면 돈도 잘 버는구나 생각을 했고.

황인철 변호사님, 조영래 변호사님 만나면서 그때 동기들 10여 명하고 민변에 가입을 했어요. 제 동기가 김칠준이 있어요.

(지금 김칠준 변호사님께선 우리 공익변론센터의 센터장으로 계십니다.)

심 : 알기로 후배 변호사님과 방을 같이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것에 거리낌은 없으신지요.

이 : 어, 이용우. 아주 좋은 친구를 실무수습 때부터 소개를 받아서 그 인연으로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어요. 성격이 너무 좋아서 전혀 어려움이 없어요.

예전엔 그랬어요. 과거 변호사들은 여기 상담실 정도 되는 방을 혼자 쓰지요. 큰 공간 하나를 변호사가 쓰고, 다른 직원이 나머지 공간을 쓰고. 그런데 지금은 아니죠. 법원에 가면 판사들도 방 같이 쓰잖아요. 방을 같이 쓰면 서로 수시로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서 일할 수 있으니까 좋지요.

(제가 쓸데없이 권위적인 그림에 익숙했었나 봅니다. 과연 이용우 변호사님 입장에서도 같이 있는 것이 좋을까요, 하는 드립은 꾹 참았습니다.)

심 : 제가 변호사님을 처음 뵌 것이, 416재단 압수수색 있었을 때 박래군 소장님 영장실질삼사에서였습니다. 그때 변호사님께서 다른 공동변호인들 변론 후에 마지막으로 박래군 소장님 옆에서 판사를 정면으로 보고 최후 변론을 하셨어요. 공동변호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방청석에 있었던 저는 백발의 변호사님이 고개를 들고 변론하는 뒷모습과 5분가량 법정을 울린 중저음의 목소리가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재판을 다니면서 보니 그런 변론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더라고요. 경력이 많으신 변호사님께서는, 출정하는 일이 드물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재판에 직접 가는 것을 꺼려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 재판 직접 가는 것이 당연하지요. 유현석 변호사님이라고 계셔요. 이돈명 변호사님하고 비슷한 세대이신데, 쓰러지시기 3일 전까지 법원에서 내 옆자리에 앉으셨습니다. 70세가 넘어서까지 재판 다니시고. 변호사는 당연히 재판 직접 가야 합니다.

심 : 변호사님께는 김훈 중위 사건을 여쭈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사건은 간단하게라도 설명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 천주교 인권위원회 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에요. 김척 장군이 연락을 해 왔는데 그때 내가 상담을 하고 맡게 되었지요. 예비역 3성 장군이고 아들도 육사 출신으로 능력을 인정받아서 JSA로 발령 받았는데, 자살할 이유가 없었지요. 아무리 해봐도 군대 내부에서 판단한 것과 같은 자세로 자살을 할 수 없어요.

큰 사건이고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어요. 그 이전까지는 군대 내 사망 사건이 제대로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으니까요. 사회적으로 주목을 끌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뾰족한 방법이 안 떠올랐어요. 그래서 그때 연이 있었던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팀에 제보를 했지요. 이런 일이 있는데 제대로 취재를 해 달라, 이렇게요. 다행히 잘 다뤄 줬어요. 장군의 아들인 중위의 사망 사건도 이렇게 넘어가는데, 보통 희생자들은 어떻겠느냐 하는 점이 잘 부각된 것 같아요.

취재 중에 노여수 박사를 만났어요. 국내에서는 군대 말고는 총상을 다루는 케이스가 거의 없어서 총기사건을 잘 아는 법의학자를 찾기 어려웠는데, 이분은 미국에서 저명한 총상 부검 전문가였지요. 그분에게 자료를 전달하니 절대로 자살이 아니라고 했어요.

이런 여론이 형성되었고, 특히 노여수 박사로부터 타살 소견이 나오면서 김대중 정부 시절에 국방부 차원에서 합동조사단이 꾸려졌어요. 한 점 의혹 없이 철저하게 밝히겠다고 했지만, 결국에는 다 자살로 처리가 되었지요.

당시 수사 담당했던 수사관들하고 기록을 하나하나 다시 살펴보다가 결정적인 증거를 봤어요.
유족들이 이 전에 머리 바깥쪽 사신을 봤는데 사진에는 머리 바깥쪽이 깨끗했어요. 권총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은 총과 머리를 밀착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두개골 안쪽에 까맣게 그을음이 남게 됩니다. 바깥은 깨끗하더라도요. 그런데 내가 직접 본 사진은 바깥쪽에 그을음이 심하게 있었던 사진이었어요. 이걸 안 보여줬다는 거에요. 군의관이 깨끗하게 닦아낸 사진만 보여줬다는 거지요.

이런 점들 외에도, 이건 자살이 아닌 게 맞아요. 그런데 결국은 자살로.

(이 말씀을 하시면서 눈에 힘이 들어가셨습니다. 변호사님이 말씀하신 몇 명의 실명 언급은 생략하기로..)

유족들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죠. 이후 2006년에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초대 위원장님이 이해동 목사님, 그렇게 출범을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도 군대 내 협조도 제대로 얻을 수가 없었고, 최종적으로 진상규명 불능, 즉 자살인지 타살인지 어렵다고 결론이 났어요.

이제 남은 방법은 민사소송밖에 없지요. 판사들 데리고 JSA에 가서 현장검증을 했어요. 판사님들이야 직접적으로 자살, 타살의 결론을 내릴 수는 없고,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지요. 그렇지만 표정에서 다 보여요. 이걸 자살로 덮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요. 직접적으로 타살이라는 결론을 내진 않았지만, 초동수사에서부터 잘못이 있었고 이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문이 나왔죠.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어요.

나중에 국민권익위원회에서는 자살이라 하더라도 순직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요.

김훈 중위 사건이 98년도 일이에요. 누군가 총을 쏴서 사람이 죽었는데, 내가 쏜 거 아니면 남이 쏜 거잖아요. 자실이 아니라면 살인이란 말이지요. 살인범을 안 잡은 것인지 못 잡은 것인지.

그래도 이 사건을 붙잡으면서 긍정적인 효과들도 있어요. 다 알겠지만 84년 허원근 일병 사건, 자살하려는 사람이 M-16 소총으로 가슴을 두 번 쏘아 자살을 시도하고도 죽지 않자 머리에 대고 쐈다는,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한국전쟁 휴정 이후 있었던 수많은 사건들. 재판도 없이 죽이고. 이렇게 우리나라 군대 내 사망 사건이 심각했었는데, 그래도 이 김훈 중위 사건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잘못이 부각되고, 검토해서 밝혀낼 수 있는 부분도 있었고, 아울러 군대 내에서의 구타 등 인권 침해 사례가 줄어들기도 하고.. 어느 정도의 진전은 있는 거지요.

심 : 그런데 유족들로서는 원하는 결론이 아니었겠습니다.

이 : 결국은 사인이 판명되진 않았지만, 유족들이 지쳤어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정신적인 충격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으로도 너무 힘드니까요. 김척 장군이 95년 정도에 예편해서 대기업에 잠깐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 일 하면서 일을 못하게 되었고, 연금 말고는 생계 수단이 없지요. 그런데 진상조사든 인터뷰든 취재든 교통비, 식대 다 드는 거잖아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에요. 순직처리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어요.

심 :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어떤 계기로 활동하게 되셨나요.

이 : 김형태 변호사님, 유현석 변호사님, 황인철 변호사님 이렇게 몇 분이서 천주교인권위원회를 만들었어요. 실무를 김형태 변호사님이 했지요. 같이 어울리긴 했지만 전 천주교인원위원회에 들어가진 않았는데, 문익환 목사님 돌아가셨을 때 김승우 신부님께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어이 이덕우, 왜 인권위원회 안 들어와?” 이렇게 말씀하시면 이제 해야 되는 거죠.

심 : 최근 젊은 변호사님들 보면 인권 수호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사건을 많이 해보고 싶은데 기회가 많지 않고, 그러다가 월급 주는 사무실에서 주어지는 일을 하다보면 조금씩 민변 가입 초기의 마음이 옅어져 가는 것에 고민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가입 당시 마음먹었던 변호사로서의 마음을 놓지 않으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이 : 현문에 우답일 수 있겠지만, 내 경험을 보면 운이 좋았습니다.

(어? 이런 질문을 많이 했고, 운이 좋았다는 답변을 정말 자주 듣네요.)

변호사를 하겠다고 생각했던 연수원 당시, 서준식 선생이 쓴 ‘나의 주장’이라는 책을 연수원 동기들의 돈을 모아서 300명 연수생과 같이 돌려 보았던 경험도 있고, 조영래 변호사를 연수원으로 초청해서 특별 강연을 했을 때에는 120명이 넘는 연수생이 참여하기도 했어요. 사회안전법, 국가보안법 이 두 법의 위헌성을 묻는 설문조사를 기획했을 때 사회안전법에 대해서는 90%,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70%의 연수생이 위헌이라고 답하여 한겨레에 보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연수원에서부터 요건사실이나 증거법 공부 말고도 이런 많은 경험을 하면서 정말 좋았고, 그 과정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당시 활동했던 김칠준 변호사님 같은 동기들, 황인철 변호사님 같은 민변 선배들, 천주교인권위 활동하면서 만난 문 브라더스, 문규현, 문정현 신부님들 이런 분들은 만나게 된 것이 행운이지요.

이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힘들고, 시간 뺏기고, 돈 쓰고……. 그렇지만 그게 가장 좋은 일이에요. 그리고 난 그게 맘이 편해요. 제일 중요한 것이 내 마음 편한 건데, 물론 옳지 않은 일 하면서 자기 합리화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도 혼자 있을 때 맘이 편하지는 않을 것 같아.

심 : 그런 활동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완성된 송무 사건을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문제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관여함으로서 필요하다면 송무도 하게 된다는 말씀이시겠지요.

이 : 그래요. 우리 주변에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디 말할 곳 없는 사람이 많아요.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면 할 일은 엄청 많아요. 관심가지고,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하면 할 일은 많지요.

예를 들면 철거민, 예전에 봉천동 쪽 달동네에 계신 분들을 그대로 광주에 옮겨 놓은 일이 있어요. 자재 주면서 집 짓고 살라고. 그때 말 들어줄 변호사가 없었어요. 지금은 익숙한 상가임대차 보호법, 이것도 상인들 억울한 이야기 귀 기울이면서 시작된 거잖아요.

민변에서 2,3년 있다가 할 게 없다, 이렇게 단정하기 보다는, 관심 있는 위원회, 현장에 가서 일단 달려들어 보았으면 좋겠어요. 사건은 고구마줄기처럼 나올 거예요.

심 : 정당활동에 대해서도 여쭙고 싶습니다. 정치를 오래 하셨는데, 출마에 관해서는 생각이 없으셨는지, 또 후배들이 변호사로 일하면서 정치활동을 하는 것은 어떤지에 관해서요.

이 : 출마나 공직에 대해서는, 첫째 난 부지런하지 않아서 못하겠다, 둘째 그 수많은 사람, 특히 보기 싫은 사람을 어떻게 보냐, 난 못하겠다. 그래서 출마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리고 정치라는 것이 그렇지요. 각자의 역할이 있잖아요.

한승헌 변호사님께서 오래 전부터 민변 회원들 자랑스럽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사서 고생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또 하나의 생각은 공부해서 남 주냐고 하지만, 공부는 남 주려고 해야 한다는 것도 있고요.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면, 하나님과 동급인 분을 빼면, 가장 존경스러운 분은 세종대왕이라고 생각해요. 사대부들이 한문으로 지식을 독점하니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자기주장을 못한다, 그래서 한글을 많든 거잖아요. 어렵게 배워서 남 주는 것이고, 사서 고생한 거고.

정치 혐오가 있어요. 정치는 나쁜 놈들이 하는 것이라는.. 그러나 임명직 공직, 예산 편성부터 우리 생활 중 어느 것 하나도 정치와 무관한 것이 없지요. 연동형비례대표, 맨날 요구만 할 게 아니라 누구라도 직접 일을 해야 되는 거잖아요. 다만 들어가서 ‘그 나물에 그 밥’이 아니면 되지. 정치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에요. 어떻게 모두가 비슷하게 잘 살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정당활동을 해야 해요. 민주노동당 창당 때부터 들어가서 활동한 것이 이런 이유입니다. 지금 바라는 꿈은, 제대로 된 사회주의 정당, 좌파정당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최근 불행한 사건들이 끊이지 않을 겁니다. 정치만 제대로 되어도 공장에서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해요.

정치가 제대로 되어서, 적어도 노동사건, 시국사건들이 없어지길 바랍니다. 우리 민변이 할 일이 줄어들긴 하겠네요. 우리 젊은 회원분들도 배워서 남 준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으로 시민단체든 정당이든, 아래부터, 지역사회부터 하나하나 활동해 나갔으면 좋겠어요.

심 : 변호사가 일만 제대로 해도 충분히 공익적이라고 하는 분부터, 전업으로 공익활동을 하시는 변호사님까지 다양합니다. 각자 나름의 균형을 찾는데 참고가 되도록 질문을 드리는데요, 공익사건과 일반 사건의 비율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 : 글쎄요. 세어보진 않았는데 반반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의식적으로 비율을 조절하려고 한 적은 없어요. 사무실 운영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면서, 또 변호사로서 해야만 하는 일을 만났을 때는 보수를 크게 따지지 않고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공익이 무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일부 무료가 있기도 하지만. 재심 같은 경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적절한 보수가 돌아오기도 하고.

심 : 저는 실속이 없이 바쁜 느낌이라 가끔 지치기도 하는데, 스트레스 관리 팁이 있으실까요.

이 : 스트레스 안 받는 사람이 있겠어요? 스트레스는 당연히 있는 거지요.

법원 못가겠다고 결심한 이유 중 하나가 출퇴근이에요. 만약에 월요일 쉬고 화요일 재판하고, 알아서 판결문 쓰고 남는 시간 운용할 수 있으면 법원 가고 싶었을 거예요. 그거 안 하려고 변호사 하는 거거든. 저와 같이 있는 우리 이용우 변호사님도 일찍 퇴근하겠다면 전혀 문제가 없지요. 난 좋아요. 그런데 그 친구가 자주 밤을 새서 오히려 그게 걱정이야. 머리가 꽉 차서 일이 안 된다 싶으면 훌쩍 나갔다 오는 것도 좋아요.

예전엔 술을 많이 마시기도 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힘들고, 이건 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저는 그때그때 내키는 것을 해요. 음악을 듣고 싶으면 청계천에 가서 LP 몇 장 사서 음악을 듣기도 했고, 문득 하체가 좀 부실한가 싶으면 서울에 가까운 산 많잖아요. 청계산이든 관악산이든 짧게 네 시간, 넉넉하게 여섯 시간 정도면 다녀올 수 있지.

여기에 건강까지 좀 이야기하자면, 먹는 게 중요해요. 좋은 것 먹자 이거에요. 비싼 것이 아니라, 조미료 많이 안 들어간 집밥 같은 거요. 가급적이면 인스턴트 이런 것 피하고요.

심 : 30년차의 변호사님으로서 또 한 해가 저무는 때에, 새해 소망을 여쭙는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이 : 제가 아까 출퇴근시간, 이런 거 구애받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시간도 그래, 새해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것뿐이라, 무슨 계획을 세우지는 않아요. 계획 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여쭙고 싶은 것도 많고, 듣고 싶은 말씀도 많았는데,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부지런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지만, 여간 부지런해서는 하기도 힘든 많은 일들을 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섣불리 게으름을 제 삶에 적용하는 우를 범하진 않을 겁니다.

선배님을 찾는 것은 어떻게 30년 넘게, 민변 변호사로서 현직에 계실 수 있느냐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변호사님께도 비슷한 질문을 자주 드리는데, 운이 좋아서 그렇다고 말씀하셨지만, 영 추상적이어서 감이 잘 안 온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이덕우 변호사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게 정답인 것 같습니다.

결국 활동을 계속하는 데에는 반드시 동료가 필요하며, 이러한 동료가 옆에 있다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기 때문에, 오래토록 초심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혼자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