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청산위] 제주도 4.3 평화기행 후기_양성우

2018-02-27

제주도 4·3 평화기행 후기

양성우회원

올해는 제주 4·3항쟁이 어느덧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이에 「과거사청산위원회」는 제주 4·3항쟁의 참혹한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그 의미를 재확인하는 한편, 4·3항쟁으로 희생된 제주도민들을 추념하기 위해 2박 3일의 일정(’18.1.9.~1.21.)으로 “제주도 4·3 평화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저는 과거사청산위원회의 신입회원으로 이번 평화기행에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짧은 일정에도 불구하고 4·3항쟁의 역사적 현장들을 돌아보며 ‘인권’과 ‘평화’의 가치, 그리고 그 실천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된 동시에 시간을 뛰어 넘어 4·3항쟁으로 희생된 분들의 아픈 역사를 공유, 공감하는 과정에서 4·3의 정신을 기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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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들러봐야 할 4·3 평화공원’

“4·3평화공원”은 이번 평화기행에서 첫 번째로 방문한 곳입니다. 이 곳은 오랜 세월 해원(解冤)되지 못한 4·3 희생자의 넋을 위령하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등의 목적으로 2008년에 설립된 평화·인권 기념 공원으로, 작년에도 20만 명이 넘는 방문객들이 다녀갔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또, 4·3평화공원은 약 10만평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데, 4·3희생자에 대한 참배를 진행하는 위령제단, 위패가 모셔져 있는 위패봉안실, 추념식이 진행되는 추모광장, 시신을 찾을 수 없는 희생자 표석이 있는 행방불명자비원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위령제단 앞에서 4·3 영령들에 대한 묵념과 추모를 하며 본격적인 평화기행 일정을 시작했는데요,

4·3 당시 희생된 희생자들의 억울한 넋을 위로하고 그 사실에 대한 기록의 의미를 담고 있는 위령탑과 위패봉안실, 그리고 각명비 등을 둘러보다 보면, 제주 4·3이 지속됐던 7년 7개월 간 국가 공권력에 의해 너무나도 많은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무참히 학살되었다는 사실이 직접 피부로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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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명비, 4·3희생자 약 1만 5천 ~2만 여명의 성명, 성별, 당시 연령, 사망 일시와 장소 등을 기록한 군집비석)

1세, 4세 등 적지 않은 수의 어린아이들의 이름과 나이도 눈에 보입니다..

또, 시신을 찾지 못해 묘가 없는 행방불명인(여기서 행방불명인은 대부분 4·3사건 와중에 체포되어, 각 지역의 형무소에 수감된 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말합니다)의 이름 석 자만을 빗돌에 새긴 행방불명인 표석은, 유해 없는 이름만이라도 비석에 새겨 부모와 자식을 추모하려는 그 유족과 후손들의 뼈아픈 심정을 고스란히 전해줍니다. 다들 안타까운 마음 탓인지 발걸음도 무거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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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방불명인 표석 주변에 조성된 다박의 비문들은 능히 4·3 희생자들의 유가족과 그 후손들이 반세기를 훌쩍 넘는 긴긴 세월 동안, 상상하기 어려운 질곡의 삶을 살아왔음을 짐작케 합니다. 모두 부디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나는 나즉히 노래합니다. 까마귀 소리 처량한 울음 따라 눈물 마저 말라버린 한 많은 세월 주정공장 수용소 긴 벼랑 붉은 동백꽃이 뚝뚝 떨어질 때 그 고운 사람들은 어디로 어디로 갔나요 <진혼 中>”

“서촌꽃밭에서 이제랑 편히 쉬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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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평화기념관 안의 백비>

4·3 평화기념관 1층 전시관에 들어서면, 관처럼 생긴 눕혀진 ‘백비’라는 이름의 비석 하나를 볼 수 있습니다. 소개 글에는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는 문구도 기재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의미하는 대로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 4·3’이 하루빨리 올바른 역사의 이름을 얻고 세워지길 기원해봅니다.

‘아픈 역사의 현장, 북촌 마을’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4.3 당시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가져온‘북촌리 주민 대학살 사건’이 발생한 북촌 마을,

처음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에서 한 날 한 시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민 300여명이 한꺼번에 희생되었을 그 날을 생각하니 도저히 머릿속에서 잘 그려지지 않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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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마을 노인 회장님의 증언>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만난 북촌마을 노인 회장님의 증언을 들으면서, 당시의 참혹상이 머릿속에 그려질 뿐만 아니라 그 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안고 사시는 노인 회장님의 아픔도 함께 느껴지면서 제 마음도 먹먹해졌습니다.

한편 북촌리 집단학살은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븐숭이 기념관 주변에는 순이삼촌 문학비가 함께 조성되어 있는데요. 몇몇 회원님들은 오랫동안 묻혀있던 사건의 진실을 문학을 통해 세상에 알렸다는 점에 주목해 얘기를 나눴는데,‘펜’이 갖는 힘과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았습니다.

‘제주의 이면, 섯알오름 학살터’ 와 ‘백조일손지묘’

이튿날에는 섯알오름 학살터, 백조일손지묘 등 여러 곳을 방문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섣알오름 학살터(서부지역의 예비검속자들이 집단 학살된 장소입니다)를 따라 걷기 전까지만 해도, 제주 내 오름을 멋진 풍광을 가진 아름다운 장소로만 생각했는데, 4.3사건 학살의 상당수가 오름에서 이루어졌고, 희생자들 대부분은 당시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올라 오름으로 끌려와 학살되었다는 내용을 듣고는 오름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과 눈에 보이지 않는 참혹한 아픔의 역사가 공존하는 오름, 문득 제주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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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일손지묘, 참배사진>

섯알오름에서 학살된 132분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이 백조일손지묘입니다. ‘백조일손’은 ‘조상은 백 명이지만 하나의 자손이다’라는 뜻인데, 이 명칭에는 유족들의 아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처음 200여명의 모슬포 주민들이 총살당해 섯알오름에 묻혔는데, 그 유가족들은 당시의 상황 때문에 시신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6년이 지나서야 희생자들에 대한 유해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물과 함께 썩은 시신들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이 뒤엉켜져 있었습니다. 이후, 뼈를 하나하나 수습해 맞춰 132구의 유골이 수습되었지만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이를 모아 이 곳에 묘역을 마련하여, 위와 같은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한 가지만 부연하면, 이 묘비는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해 묘비가 파괴되었다가 문민정부에서 다시 세워졌는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국가가 파괴했던 묘비를 다시 세우면서 맨 위에 태극기와 무궁화를 올렸다는 것입니다. 묘역을 안내해주신 김남훈 제주다크투어 운영위원의 설명에 따르면, 묘비의 태극기와 무궁화는 유족들의 뜻으로 묘비에 태극기와 무궁화가 있으면 다시 정권이 바뀌더라도 함부로 파괴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 기대에서 조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설명에 아파도 너무 아픈 역사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라도 유족들의 묘비가 잘 지켜지기를 기원했습니다.

 

‘맺으며, 4·3에 정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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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 보니, 너무 사건 중심의 후기가 된 것 같아 민망한 마음이 드네요. 저희 제주 4·3 기행은 술자리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저희는 오후 일정까지 마친 뒤에는 이틀 밤 모두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며 제주의 밤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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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첫 날 저녁식사는 참석하신 모든 분들의 자기소개와 개인적인 소감 등을 듣는 시간으로 진행되었고, 회원 분들의 진솔하면서도 재치 넘치는 이야기들이 많이 오고 가면서 첫 날의 긴장감이 풀려지는 한편 즐거운 대화와 소통이 계속 이어져 나갔습니다.

저는 둘째 날 밤에는 조금 일찍 들어왔는데, 그날 새벽 수없이 잠을 깼습니다. 왜 잠을 깼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르다가 몇 번의 잠을 더 깨고 나서야 그 이유를 짐작해봤는데, 이번 기행 중에 알게 된 제주의 참극, 국가가 자행한 폭력으로 인해 지난 70년의 세월 동안 4·3의 희생자들과 그 유가족들이 겪었던 아픔 일부분이 제게 전이되었거나 그로 인해 부지불식간에 생긴 일종의 부채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서울로 오는 비행기에서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 있고, 그 몫은 4·3의 묻혀진 진실을 찾고, 기억하며, 주어진 길을 두려움 없이 한 발 한 발 내딛는 일이 아닐까 하는… 끝으로 이번 평화기행의 구호이자 회식 때 가장 자주 외쳤던 건배사로 글을 마칩니다.

“역사에 정의를! 4.3에 정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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