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민변 4351일, 그리고 새로운 시작!! 장연희 사무차장 인터뷰

2016년 5월 18일 minbyun 7,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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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석자 : 장연희, 김민환, 안현영, 김지미, 오지은, 이유진

 

안현영 저번에 출판홍보팀에서 하는 이재화변호사님 인터뷰 참관을 갔었는데, 항상 인터뷰 첫 질문은 자기소개라고 하더라고요. 민변에서 12년을 내리 계신 장차장님을 모르는 회원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혹시나 하여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장연희 뭐라 소개를 해야 하죠?(웃음) 저는 장연희라고 하고요. 제 휴대폰에 깔려있는 어플을 보니 처음 민변 활동을 시작했던 2004년 7월 1일부터, 퇴직을 하게되는 2016년 5월 29일까지 총 4351일이 되던데요, 그렇게 민변에서 12년째 상근활동을 하고 있고, 대외협력과 미군문제연구위원회 통일위원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안현영 고향이 진도라고 들었어요. 거기서 꽃다운 18세에 홀홀단신으로 서울에 와서 이렇게 멋지게 삶을 꾸려 내셨는데, 그 과정이 궁금해요. 드라마에 나올 법한 스토리라고 하던데…

 

장연희 저는 아버지가 제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편찮으셨어요. 저희가 2남 4녀인데 왜 2남 4녀이냐면 아들을 낳으려다 2남 4녀가 되었거든요.(웃음) 딸 셋에 오빠가 있고, 아들 하나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제가 나왔고, 딸이 나왔으니까 또 아들을 낳아서, 오빠와 남동생 사이에 제가 끼어 있는 거거든요. 원래 제 꿈은 국어선생님이 되는 것이었고, 국어 선생님이 되려면 사범대에 가야했고, 사범대에 가려면 지금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실업계가 아닌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야하는데, 아버지도 편찮으시고 집안 형편도 어려우니까 어머니가 인문계 고등학교를 못 가게 막으시는 거죠. 동생이 가야하니까. 제가 인문계 지원서를 썼는데 찢어버리셨어요. 그래서 결국 진도에 있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는데 대학을 가려면 국영수를 배워야 하는데 국영수는 완전 부차적인 거고, 맨날 주판 튕기고… 대차대조표 수입지출 이런 거… 그래야 되는 거예요. 그런 생활이 너~무나 무료하고 우울하고 그런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던 찰나에 진도에 전교조 선생님들이 전교조 문화의 밤 같은 걸 하셨어요. 그 문화의 밤 이름이 ‘쭉정이들만 사는 세상’인데, 전단지를 나눠주며 학교 앞에서 홍보를 했었어요.

그 당시에 학생 주임 과장 역할 하시는 선생님이 여기 가지 말라고 주의를 내리셨거든요. 그런데 무료한 일상에 ‘쭉정이들만 사는 세상’이라는 그 표현이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행사를 갔다가 학생과장님을 만났어요. 학생과장님이 너 몇 일간 학교 나오지 마라라고 유기정학을 내리셨어요. 그 때가 고등학교 2학년 봄이었는데 3월 초였나, 그랬던 것 같아요. 고민을 하다가 이 생활에서는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자퇴서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고요. 그런데 도망치듯 나오고 싶지는 않았어요. 엄마도 설득하고, 담임선생님도 설득하고… 3개월에 걸쳐 설득을 했어요. 여기서는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다, 저의 미래는 제가 개척해보고 싶다. 3개월을 설득해서 결국 자퇴서를 내고 그 해 5월에 상경하게 되었어요. 상경하는 날 아직도 기억나는 게 엄마가 너무 속상할 거 아니에요. 18살 딸이 엎어지면 코 베어 간다는 서울에 혼자 간다는데 어떡하나. 걱정하시지만 눈물을 훔치시면서 제 어깨를 다독여주시더라고요. 독하게 살라고. 그 날 엄마가 다독여 주시던 그 기억이 이후 서울 생활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독하게 살아야겠다는. 아무것도 없이 엄마가 10만원 줬거든요.(웃음) 그거 가지고 서울에 올라왔어요.

 

안현영 가방 하나 메고요?

 

장연희 네, 가방하나 메고.(웃음) 서울 와서 사촌 언니 단칸 자취방에서 1-2달 정도 얹혀살면서, 다행히 일자리를 바로 구했는데 그 당시에 동사무소 마다 ‘사환’이라는 일이 있었어요. 사환이 무슨 뜻이냐면, 심부름꾼이라는 뜻이에요. 그 당시는 90년대 중반이었으니까 지금처럼 메일이나 이런 게 발달되어있던 시대는 아니었거든요. 매일 오전 오후에 각 동사무소에서 예를 들면 서초구청이 있으면 서초 3동 동사무소에서 구청으로 보내는 공문 같은 거를 구청에 전달해주고 또 구청에서 각 동사무소로 하달하는 각 공문들을 받아오고 그런 일을 하루에 2번씩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한 달에 30~40만 원 받았나? 접수도 하고 동사무소 각 담당자에게 배정도 해주고 우체국도 가고 은행 심부름도 시키고(웃음) 그랬었는데 그렇게 월급 받아서 월세방을 구했죠. 저는 그때 고등학교 자퇴생이니까 검정고시를 봐야 하잖아요. 검정고시 학원 등록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검정고시 학원에서 검정고시 준비하고 그런 생활을 했고요.

그 시절을 돌아보면 저 스스로도 기특한게 아침은 6시 굿모닝팝스로 시작했고, 8시까지 동사무소 출근해서 사무실 청소하고, 하루 두 번씩 구청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도 공부하고, 저녁에는 학원가서 10시까지 수업 받고… 월급은 방세와 학원비, 교통비, 대학등록금 자금으로 써야 하니까 동사무소에 점심때 주는 밥 한 끼 만 먹었어요. 돌도 씹어먹을 나이에 밥 한 끼를 허기로 먹다보니 거의 흡입 수준으로 먹었죠. 그 습관 때문인지 아직도 사람들하고 밥을 먹다보면 밥을 빨리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종종 있어요. 나름 천천히 먹는다고 노력하는 데도요. 그런 생활하면서 검정고시 준비하고 수능준비해서 20살에 대학에 갈 수 있었고요.

 

이유진 와~ 한편의 드라마가 머릿속을 쭉 훑고 지나가네요. 정말 대단하세요. 서울살이가 힘드셨을 것 같은데, 어떻게 버티셨어요?

 

장연희 어머니의 독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과 책이었어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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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 대학은 문예창작과에 들어가신 거죠?

 

장연희 네.

 

김지미 원래 문학에 대한 꿈이 있었던 거에요? 문예창작과를 갔을 때는 보통 국문과를 가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잖아요. 정말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겠다라는 생각이 있었을 것 같은데.

 

장연희 앞에서도 잠깐 애기 했지만 제 꿈은 국어선생님이었어요. 국어를 특히 좋아했었고 국어선생님이 또 첫사랑이었고(웃음). 중간에 그만두고 서울에서 생활을 하다보니까 책들이 저에게 위로가 되었거든요. 그러면서 저도 글을 쓰고 누군가에게 따뜻함과 힘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돼서 문예창작과로 가게 된 것 같아요.

 

김지미 문창과는 실기 보죠?

 

장연희 실기를 봤어요.

 

김지미 어떤걸 봐요?

 

장연희 시나 수필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어요. 저는 ‘시’로 합격했어요. 제목을 줘요. 제목을 주면 거기서 바로 써야하는 거에요. 그때 제목은 ‘문’이었어요.

 

김지미 그때 어떻게 쓰셨어요? 한 구절이라도 읊어 주세요.

 

장연희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도시의 문, 도시의 단절되어 있고 그런 것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안현영 사범대 진학할 고민있을 때 학비문제도 있어서 포기하셨다고 하셨는데, 문예창작과 진학하실 때는 사환하시면서 번 돈으로 가신거에요?

 

장연희 네. 제가 모아서 갔어요. 다행히 대학 다닐 때는 대학신문사에서 기자로 일을 할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학비보전이 됐었어요. 등록금 반 정도는 보전이 되고 반은 아르바이트 하고.

 

이유진 어머님이 차장님 되게 자랑스러워하실 것 같아요.

 

 장연희 어머님이 대견해하세요. 어쨌든 나쁜 길로 안 빠지고. 18살에 서울상경해서 엄한 길로는 안갔으니까.

 

김지미 지금 서울예대이고 예전에 서울예전이었잖아요. 제가 알기로는 그 학교가 문예창작이나 연예인들이 많이 배출되는 학교이고, 학생운동이라고 불리우는 그런 활동이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 학교를 나오셔서 통일운동이나 평화운동을 어떻게 시작하게 된건지가 항상 궁금했어요.

 

장연희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 전남대 졸업하고 오신 신입 선생님이셨는데, 선생님 풍금에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라는 악보가 있더라구요. 어린 저에게는 가사가 너무나 충격이었어요.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어머니의 눈물이 가슴깊이 사무쳐오는 갈라진 이 세상에 민중의 넋이 주인되는 참세상 자유 위하여…’ 너무 충격이었는데 작사 작곡을 보니까 안치환이라는 사람이 그 노래를 만들었더라고요. 그래서 안치환 노래를 사서 듣고, 안치환 노래를 듣다보니까 노래 가사에 ‘김남주 작시’ 이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어, 김남주라는 시인은 뭐지?하고 김남주 시인의 책을 사서 읽어봤거든요. 그랬더니 저한테는 굉장히 충격이었고, 책을 읽다보니까 뒤에 보면 다른 책들 소개가 되어 있잖아요. 김남주 시인 책은 주로 창작과비평사에 발간이 되었는데 관련된 창작과비평사 책들을 계속 사서 보게 됐어요. 그러면서 아, 나도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내가 누군가의 책을 통해서 이 시기를 버텨낸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글을 써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대학을 문예창작과를 택해서 가게 된 것이었거든요. 그런 과정들이 있었고, 계속 그런 책들을 읽다 보니까 시간나면 혼자 집회도 가보고 제가 다녔던 동사무소가 외대 앞에 있는 동사무소였거든요. 그 당시 외대가 열심히 데모했어요. 최루탄 막 터지고… 그런 곳을 혼자 찾아다니고 그러는데 어린 마음에 저도 깃발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대학 진학해서도 그런 활동하는 동아리 선배들이나 학술 동아리 같은 데 찾아서 들어가서 활동하고 통일 문제나 미군 문제에 대해서 계속 관심 갖고 공부하고 활동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민변도 미군위 통일위(웃음)

 

이유진 차장님하면 나라사랑청년회 활동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가입하시게 된거에요?

 

장연희 제가 대학 다닐 때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민가가 나오는 학사주점에서 했는데 단골손님이 나라사랑청년회 회원이었어요.

 

김지미 위치가 어디였어요?

 

장연희 혜화동이요. 1주일에 한 번씩은 왔어요. 그래서 나라사랑청년회가 있구나, 졸업하면 저기에 꼭 가입해야지. 해서 제가 졸업하고 바로 찾아 간 거예요. 22살에 나라사랑청년회에 가입해서 쭉.

 

김지미 그래서 회장님까지.

 

장연희 네. 22살에 가입했더니 막내라 엄청난 사랑을 받고 무럭무럭 자라나서. 청년회는 주로 평화와 통일운동, 지역운동을 많이 했고, 주요 현안에 대한 연대투쟁도 많이 했지요. 그때는 주 7일중 반은 청년회 회의, 반은 민변 회의, 주말은 투쟁 일정으로 보냈던 거 같아요. 99년부터 2012년까지 청년회 활동을 하며 교육국장도 하고, 사무처장도 하고, 회장도 4년을 역임했어요.

 

김지미 대권을 잡으셨군요(웃음). 거기서 남편도 만나시고. 어떻게 만나신 거에요?

 

장연희 2007년 7월엔가, 이랜드그룹의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 대량해고 사태 때문에 청년단체들도 상암동 홈에버에서 연대투쟁을 계속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남편을 만났어요. 저는 나라사랑청년회 회장으로, 남편은 관악청년회 신입회원으로…. 밤샘투쟁 마치고 첫 지하철로 집에 들어가는데 마침 남편과 제가 같은 방향이더라구요. 그렇게 첫 만남이 있었고, 그 후로는 각 청년회 회장단 회의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씩 서울청년단체협의회 사무실에 갔었는데, 그때 남편이 관악청년회에서 파견을 나와서 청년단체 실무지원을 하고 있었어요. 그냥 회의 때 오가며 얼굴 본게 전부인데 그해 초가을 무렵, 청년단체 주최로 재일한국청년동맹 초청 교류회가 있었어요. 행사 끝나고 뒤풀이를 하는데 술도 잘 못 먹는 남편이 술이 이만큼 취해서 빨간 얼굴로 저한테 고백을 하더라구요. 회장님 너무 좋아한다고…. 그런데 신기한게, 남편이 고백하기 일주일 전에 제가 꿈을 하나 꾸었어요. 제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남편이 구해주는 꿈을…. 참 개연성 없는 꿈이었는데, 그 꿈을 꾼 후의 고백이라 그냥 운명인가 보다 하고 만났어요. 남편의 뜬금없는 고백이 이상하게 싫지는 않더라고요. 만나기 시작한 후 한 6개월은 하늘의 별이라도 따줄 듯 자상한 남자였어요. 뭐 이런 남자가 나한테 왔나 싶을 정도였지요. 그 6개월에 속아서 결혼까지 하게 된거죠.(웃음)

 

안현영 처음에 저희 자원활동가들에게 소개하실 때도 한글이 엄마라고 소개하시고, ‘한글이 엄마^^’라고 되어있으신 카카오톡 프로필을 보았습니다.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워킹맘으로 살아가기 너무 힘들잖아요. 일과 가정의 양립에 대한 질문도 여성 노동자에게만 주어지는 질문이 아닐까 싶어 조심스럽지만, 워킹맘 활동가로서 살아간다는 건 사무차장님께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장연희 워킹맘 활동가로 살아가기… 힘들어요.(웃음) 제가 아이를 8개월 때부터 어린이집에 맡기고 민변 복직하고 계속 활동하고 있는데 보통 가정식 어린이집 정원이 20명인데 실제 정말 순도 100프로로 육아를 하는 맞벌이 부부는 저희밖에 없었어요.

 

안현영 순도 100%라는 의미가 뭐죠?

 

장연희 온전히 엄마와 아빠의 힘으로. 보통 엄마가 쉬거나 할머니나 할아버지 이모가 찾아주거나 하는데, 순도 100% 맞벌이 부부는 저희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린이집은 어린집대로 저희를 빨리 찾으러 오라고 압박해오고. 저희 아이가 찾으러 가면 늘 꼴지였거든요. 민변 끝나고 아무리 빨리 가봤자, 민변은 민변대로 주 평균 2~3회 저녁 회의가 있고… 육아를 하면서 힘들었던 건 누구든 그 위치에 있지 않으면 100%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아요. 지금 저 사람 상황이 어떨 것인가. 복직하고 얼마 안 되서는 아직 젖을 먹이고 있던 단계여서 모유수유를 안하면 흐르고 이렇거든요. 근데 야근은 해야 하고, 그러면 젖이 흐르고, 변호사님들은 뒷풀이 안하고 간다고 서운해하시고.(웃음) 제가 20명의 어린이집 아이들 중 순도 100% 맞벌이 부부가 저밖에 없었던 것처럼, 아마 변호사님들도 저랑 비슷한 경험은 많지는 않으셨을 것 같아요. 누군가의 도움을 받거나. 가끔 그런 부분들이 아쉬울 때가 있었어요. 밤 11시~12시에 들어간다는데, 벌써 들어가냐고 하시고(웃음)…. 저는 그때 들어가면 바로 자는게 아니라 아이 빨래며 밥이나 반찬 이런걸 준비해 놓아야 하는데… 그런 게 좀 힘들었고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아이가 아침에 열이 나면 병원에 들려야하고 그러는데,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물론 민변 상근자 분들이 많이 배려해 주시지만 괜히 눈치 보이고 미안했던 게 컸던 것 같아요. 그나마 민변이니까 그나마 이만큼 배려가 되었지, 다른 직장에서 정말 힘들 것 같아요. 일반 직장 여성들은.

 

김지미 현영씨가 얘기한 것처럼 지금 장차장님 카카오톡 프로필이 ‘한글이 엄마’로 되어 있고, 저번에 자원활동가 오리엔테이션을 할 때도 자기를 표현하는 단어로 ‘한글맘’이라고 쓰셨잖아요. 저는 차장님 보면서 보통의 워킹맘하고는 조금 더 특별히 누구의 엄마라는 정체성이 굉장히 강하다라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저는 어디서 ‘주현이 엄마’ 이렇게 안하거든요. 차장님은 그런 정체성이 유독 강하다는 생각이 있는데, 장차장님에게 있어 한글이는?

 

장연희 한글이요? 저는 한글이 엄마로 불리는 게 너무 좋아요. 어느 카톡글을 보고 약간 뭉클했던 것이 있는데 어떤 딸과 엄마가 대화를 주고 받는 게 있었어요. 결혼 앞두고 고민하고 있는 딸이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라고 물어보니까 결국 남자는 똑같고 결혼하려는 순간에 옆에 있고 그래서 아빠랑 결혼했다, 이런 얘기 하다가 딸이 그러면 나중에 다시 태어나도 아빠랑 결혼할 거야? 그렇게 물어보니까 엄마가 ‘그럼, 그래야 널 낳지.’ 이렇게 답을 한거에요. 그런 마음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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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다시 태어나도 지금 남편과 결혼하실 건가요? 한글이를 낳기 위해서?

 

장연희 아… 그러게요. 한글이만 어떻게 안될까요?(웃음)

 

안현영 변호사단체인 민변에는 어떠한 계기로 오시게 되었어요?

 

장연희 민변은, 제가 원래 전국대학노동조합, 그러니까 대학에 교직원들 노동조합이 있었거든요. 그곳에서 노조 활동가로 일하고 있었는데. 사학비리가 있는 학교에 계속 노조와 사측과 완강한 투쟁을 벌이고 있던 도중 그해는 사측, 그러니까 재단에 가까운 어용노조가 노조를 잡게 된 거죠. 그 곳을 4년 반 만에 나오게 되었고, 그 때 마침 민변 미군문제랑 통일위 상근활동가를 채용한다고 해서, 원서를 넣고 면접을 통해서 민변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때 면접에 심재환 변호사님이 통일위원장으로 들어오셔서 저로 최종 결정해 주셨다고 들었어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민변이라는 단체는 이름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잖아요. 국가보안법 사건 피해자들 많이 변론해주시고, 시국사건 변론 많이 해주시고, 그래서 막연한 호감의 대상, 막연한 존경의 대상 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여기에서 일을 하게 될지 몰랐고 더군다나 12년을 하게 될지는 몰랐어요.

 

김지미 옛날에 정은경 간사가 중간에 쉬고 다시 왔었잖아요. 근속으로 따지면 차장님이 더 오래 하신건가요?

 

장연희 아니요. 정은경 간사님이 14년인가 일을 하시다가 그만두고 다시 와서 2년 정도 더 하셨어요. 기록갱신은 안되네요.

 

안현영 단체활동가라 하면 일단 힘들다는 느낌이 있잖아요. 민변만 봐도 상근자로 오신 활동가들의 수명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변호사단체에서 비변호사로서 12년 넘게 꾸준히 활동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장연희 미군위·통일위 변호사님들의 따뜻한 격려?(웃음) 정말 미군위 통일위 변호사님들을 생각하면 친정 식구들, 오빠, 언니,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그런 분들이 제가 민변 활동에 지치고 힘들 때 언제나 곁에서 격려가 되어 주셨고요, 그래서 그 분들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안현영 미군위·통일위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시다고 들었는데, 혹시 관심 가는 다른 위원회는 없었어요?

 

장연희 같은 맥락에서 미군·통일문제가 해결되려면 과거사도 잘 알아야 하고 과거사가 청산되어야 하니까 과거사청산 이런 부분에도 관심이 있고요, 최근에는 제가 아이엄마니까 아동인권문제에도 관심이 있고 그랬어요. 그래서 기회가 되면 더 공부해보고 싶었던 분야인 것 같아요.

 

안현영 이제 곧 민변을 떠나신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장차장님하면 ‘민변의 살아있는 10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민변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고 계실 것 같아요. 민변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활동은 무엇인가요?

 

장연희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대표적으로 뽑으라면 아마 많은 분들이 이야기 하겠지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2008년 촛불이 있고요. 또 하나는 저 같은 경우에 2005년도에 민변 참가단을 조직해서 평양에 갔었어요. 그 당시에 평양 유적지도 답사하고 북에 유명한 배경대 공연, 카드섹션 공연이라고 하죠, 아리랑 공연을 관람했었어요. 그게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안현영 또 그런 기회 없나요? 저도 가고 싶네요.

 

장연희 있어야하는데 지금은 남북이 가로막혀 못가고 있네요.

 

안현영 사무차장으로서 사무처를 운영하시면서 생겼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장연희 에피소드라기 보다는… 사실 제가 간사 사무차장이 1호에요. 사무차장은 간사가 그 동안 없었었고, 제가 민변에 오래 있다 보니, 간사에게 사무차장이라는 직급을 부여하는 시기에 1호 간사사무차장이 된 건데요. 사실 그 때까지는 간사사무차장에 대한 전형이라던가 역할 이런 것들이 딱 정비되어 있는 시점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 속에서 간사 사무차장으로서, 사무처 일원이고 민변의 일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만들어가야 하는지가 저도 계속 고민이었는데, 앞으로도 민변이 같이 고민해서 풀어가야 할 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무래도 변호사가 아닌 상근활동가 사무차장이다 보니 그런 고민들이 많이 더 되었던 것 같아요.

 

안현영 그동안 많은 회원들을 만나왔을 텐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회원분이 계시다면요?

 

장연희 아, 이거 조심스러워서(웃음) 누굴 딱 꼽아서 말씀드리기가… 어쨌든 저는 미군위 통일위 변호사님들이랑 12년 동안 같이했기 때문에 미군위 통일위 변호사님 한 분 한 분이 제가 12년을 민변에서 버틸 수 있게 해주신 버팀목, 나무그늘 같은 분이셨던 것 같아요. 늘 그 분들께는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고요. 그 중에서도 꼭 꼽아야 한다면 심재환 변호사님이나 장경욱 변호사님, 그리고 말 안하면 서운해 하실 것 같아서(웃음) 조영선 변호사님. 이 세 분이 늘 힘들 때 조언도 많이 해주시고 힘든 순간 생각나는 분들이셨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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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영 이제 민변을 떠나시기는 하지만, 민변에서 첫 번째 경선이 있었잖아요. 좀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장연희 누구를 뽑았냐고 하는 건 아니죠?(웃음)

 

안현영 제가 민변 자원활동가로 와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최초의 경선’이란 거였어요. 민변 28년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고, 그러다보니 오랜기간 민변과 함께 해오신 분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이번 경선을 보면서 느낀 것들을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장연희 저도 경선을 12년 동안 있으면서 처음 봤는데요, 그 동안은 민변 회장 선거가 추대를 위한 다소 형식적인 수단이었다면, 이번에는 활동력 있게 선거운동도 많이 다니시고 정책들에 대해서도 얘기하시고… 지부순회, 사무실 순회도 하시면서 회원들과 많은 이야기들 나누고 이런 것들이 보기 좋았던 것 같고요. 외부에서 바라보기에도 민변이 건강하게 경선을 치뤘구나 생각해주시는 것 같고, 그런 평가만큼 회원들의 기대만큼 회원 천명시대에 더 활동력 있고 주목 받는 민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안현영 현명하신 답변이네요. 현재 저희가 15기 자원활동가인데, 1기부터 쭉 많은 자원활동가들을 만나오셨을 것 같아요. 자원활동가는 이래야 한다라는 활동상이나 기억에 유난히 남는 자원활동가가 있을까요?

 

장연희 민변 활동이라는 것이 자기가 아는 만큼 보이는 것 같아요. 얼마나 내가 열심히 애정을 가지고 활동하느냐에 따라서 얻는 것도 달라지는 것도 느끼는 것도 달라지는 것 같고. 그래서 소극적 주어지는 일만 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민변 상근자들하고도 어울리고 변호사들하고도 어울릴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그런 자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자원활동가들에게 좋은 것 같고요. 특히 초기 자원활동가가 촛불 국면에서 탄생했거든요. 일반 청년 시민들의 자발적인 요구에 따라서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 당시에는 인턴제도가 만들어졌었고, 초기 20명 25명이 자원 활동을 했었어요. 원서접수를 하면 20명 뽑는데 150명씩 지원하고 이랬었거든요. 그때 그 열정들이 부러웠고, 그 젊음이 부러웠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갈수록 사회 현상인지 분위긴지는 모르겠지만 민변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민변 같은 단체들의 자원 활동 지원자들이 감소하고 있는 현황인 것 같더라고요. 그런 것들은 아쉬운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자원활동가는.. 아무래도 제가 미군위 통일위 담당했으니까, 미군위 통일위 자원활동가들과 많은 교류를 했었는데, 몇몇 친구들이랑 아직도 연락하고 가끔 집근처에서 술도 한잔하고 그렇거든요, 서로 인생상담도 해주고. 그 당시에는 간사와 인턴의 관계였다면 지금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날 수 있더라고요. 그런 관계들이 좋은 것 같고, 응원해주고 그런 친구들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김지미 10년 넘는 기간 동안 활동가로서 한 단체에서 특히나 민변이라는 단체는 다른 NGO단체와는 다르게 층위가 확실하게 나누어진단 말이에요. 변호사와 비변호사로 나누어지는 특수성이 있는 단체인데, 이 법률가단체에서 법률가가 아닌 사람으로 10년을 넘게 활동을 하면서 그리고 이왕 그만두는 마당이니까 내가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다. 차장님 표현으로 ‘민변, 이런 점이 제일 아쉬웠어요!’

 

장연희 사실 간사들의 업무는 민변이 법률가 단체로서 자기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서포트해 줄 수 있는 역할들을 하는 거죠. 저희가 직접 전면에 나서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보면 변호사들이 활동을 잘 할 수 있도록 조력을 해주는 조력자의 역할 또 어떤 활동을 기획하는 기획자의 역할, 이런 것들인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마음이 헛헛할 때가 종종 있어요. 제가 오지은 간사님에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참여연대에서 본 지 얼마 안 된 간사가 2-3년 지나니까 팀장이 되어서 그 팀과 관련된 입장이라든가 토론회라든가 기자회견의 발언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좀 헛헛해지는 것 같아요. 민변이 가지고 있는 단체의 특성, 그리고 말씀드렸지만 제가 연대사업과 대외협력을 담당하고 있는 팀장으로서 연대단위 회의에 가면 다음에는 변호사님들이 오시나요? 변호사님들이 오셨으면 좋겠어요. 이런 얘기들을 많이 듣는 거죠. 그랬을 때 좀 민변에서의 활동에 대한 고민들을 많이 하게 된 것 같고요.

 

김지미 문제의식은 분명한 건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면 민변이 변해야 하는 것도 있고, 간사님들이 변해야 하는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두 부분에 대해서 차장님이 고민했던 결과가 있을 것 같아요.

 

장연희 일단 간사들 같은 경우는 정말 왕년에 학생회나 단체에서 한가닥(^^) 하셨던 경험도 있고, 큰 역할을 하셨던 분들이 민변에 오시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데 민변 구조 속에 흡수되는 모습들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 민변 내에서 간사들의 역할을 높이기 위한 우리 스스로의 적극적인 노력과 목소리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아쉬움도 있고요. 민변도 조직적으로 그것을 더 강화해주기 위한 고민을 했으면 좋겠어요. 간사는 그냥 민변활동을 보조하는 개념이 아니라 어쨌든 간사들도 민변을 함께 꾸려가는 수레바퀴의 한쪽이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랬을 때 간사들도 능동적으로 일 할 수 있는 거구요. 간사들이 저절로 분위기에 젖어드는 건 아니라고 봐요. 간사들의 적극성과 활동성을 살려줄 수 있는 고민들을 구조적으로 많이 했으면 좋겠구요, 그래서 민변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간사들에게 팀장도 주고. 아무튼 요즘 얘기되고 있는 직급에 대한 검토가 적극적으로 현실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유진 제가 2006년도에 민변에서 근무할 때 평택 미군기지 투쟁이 한창이었거든요. 저도 인권단체 활동가들과 몇 번 내려가 함께 투쟁을 하기도 했었는데요. 차장님도 열심히 투쟁했던 기억이 나요. 연행까지 되시고… 그때 얘기를 좀 해주세요.

 

장연희 그때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 운동이 정말 완강하게 진행이 되고 있었고, 민변도 인권침해 감시단을 구성해서 거의 매주 내려가기도 했었고 특히 미군위는 평화상담소를 평택 내에 만들었어요. 매 주말마다 평택 대추리 주민분들 필요한 법률자문 이런 것들을 조편성 해서 내려갔었어요. 그때 송상교 변호사님 신혼초에 내려오셨던 기억도 나고, 정연순·백승헌 변호사님도 오시고, 많은 분들이 주말마다 고생해주셨는데, 결국 5월 4일에 행정대집행이라는 걸 해서 마을이 헐렸거든요. 그리고 투쟁의 거점이었던 대추분교도 포크레인이 와서 헐리고, 수 천명 병력이 와서 여명의 황새울이라는 작전명으로 해서 새벽 6시 무렵엔가 검은 무리들이 저만큼 몰려 들었던 것 같아요. 그날 전날 밤에 설창일변호사님이랑 저랑 설창일 변호사님 차를 타고 내려갔었어요. 설창일 변호사님은 차에서 주무시고 저는 다른 단체 활동가들이랑 평화상담소에서 잠을 청하다가 병력들이 들어온다고 해서 급하게 나갔는데 결국 밀리고 밀려서 대추분교 안에서 연행이 되었고요, 설변호사님은 밖에서 잡혔어요. 그래서 저는 48시간 구리경찰서에 잡혀 있었어요.

 그때 제 유치장 동기가 최병모 변호사님 따님이어서 최병모 변호사님이 따님 접견 오셔서 사식을 넣어주셔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고요, 조영선 변호사님이 접견을 오셨었어요. 밥을 시켜주고 가셨나? 그렇게 해주셨고, 기억에 남는 것이 그때 500명이 한꺼번에 연행이 됐었잖아요. 민변 사무처가 난리가 난거죠. 서울·경기 모든 경찰서에 다 들어가 있으니까 수십군데 접견을 조직하느라 이 사람들은 초비상 근무를 하는데, 저는 48시간 동안 잘 쉬다가 나와서, 그 당시에 정인식 간사님이 피부가 왜 이렇게 좋아졌냐고(웃음). 기름기 줄줄흐른다고 막.

 

이유진 아, 그때는 접견조직하느라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안현영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연행이었어요?

 

장연희 연행은 대학 1학년 때도 한 번 됐었어요. 97년인데, 815대축전 가기 전에 통일선봉대가 국민대로 들어온대요. 그래서 통일선봉대 환영대회를 국민대에서 한다고 해서 거기로 갔는데, 학교 안까지 전경들이 치고 들어왔어요. 그래서 학교 안에서 국민대 뒷산으로 막 도망가다가 거기서 다 잡혔고요. 종암경찰서에서 또 48시간, 815대축전 끝날 때 내보내주더라고요. 그때 기억에 남는 게 종암서가 악명이 높다고 하더라고요. 그쪽에 대학들이 많아서. 고대도 있고. 정말 황당했던 것이 경찰서에서 진도 마을이장님한테까지 전화를 해서 ‘당신 동네 빨갱이 살고 있다’고 얘기를 했더라고요. 그리고 차라리 유치장에나 넣어주면 좋은데 48시간 동안을 조사할 때 빼고는 계속 벽보고 앉아있으라고, 니가 그토록 존경하는 김일성 장군님 생각하라고…. 정말 인권유린이 엄청났어요.

 

김지미 진도 마을이장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요?

 

장연희 모르겠어요. 나중에 저희 엄마가 깜짝 놀래서 전화 오고 그랬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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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영 제가 서치를 해보니까, 안산고 학생들이 걷기 행진할 때 당시 어떤 현수막을 발견하셨고 그거에 대해서 이준석이랑 설전을 벌이셨다고.

 

장연희 아~ 설전은 아니고요. 그때 세월호 도보행진하고 있는데, 새누리당에서는 연평해전을 잊지 않겠다고 하는 현수막을 당사 건물에 내걸었더라고요. 그래서 잊지 않겠다는게 세월호가 아니고 연평해전이냐고 제 페북에 올렸는데 그것을 로이슈 신종철 대표님이 기사화해서 엄청나게 리트윗이 된거에요. 그걸 보고 이준석이 왜 연평해전 추모하면 안되냐고 반응을 보였다는.

 

안현영 아무래도 진도 출신으로서 세월호 참사가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 같은데.

 

장연희 진도 앞바다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니까 정말 깜짝 놀랐고, 아직 진도에 가족들도 있고 하니까 걱정이 많이 되더라고요.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수장당하는 걸 몇 일간 지켜봤던 거잖아요. 그 시간들이 너무나 힘들었었던 것 같고. 특히 진도 같은 경우는 남한에서 3번째로 큰 섬이고 아름다운 섬이었거든요. 보배진의 섬 도, 보배섬이라고 해서 아름답고 관광지도 많고 그랬는데, 세월호 이후로는 죽음의 섬 악마의 섬 이런 이미지가 되어버려서 한동안 진도 사람들은 생업도 어려웠었어요. 제가 4월 16일 세월호 있었고 다음 달에 진도에 내려갔었는데 그때만 해도 진도 곳곳 앞바다에 혹시라도 시신들이 떠밀려오지 않을까 해서 계속 수색작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몇 달을 살았던 거니까. 물론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에 비하면 백분의 일도 안 되겠죠.

 

김민환 과거와 현재의 얘길 했으니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시고 싶으신지. 어디로 가시는지 정해진 것 같으니까.

 

장연희 시의 적절한 질문이네요(웃음). 다 아시겠지만 이재정 국회의원 당선자님과 함께 국회라는 곳에 가서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어요. 국회라는 곳을 제 인생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고민도 많이 했는데, 민변 12년 장기근속을 하다보니까 이후 활동에 대한 고민이 많이 있었고, 어쨌든 국회는 대한민국 입법의 중심이니까 거기에 가서 대선도 앞둔 시기에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는 것으로 결정을 하게 되었어요. 물론 아직도 많이 두렵고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도 되는데요, 그래도 두려움보다 설레임이 조금은 더 크니까 설레임을 가지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유진 대학에서 그리고 민변에서 10년이상을 평화통일 운동을 지향하며 활동하셨는데, 새로 가는 국회에서 차장님의 지향을 어떻게 발현할 지에 대한 고민을 좀 해보셨을 것 같은데.

 

장연희 가는 위원회가 제가 그동안 해왔던 평화통일 분야 쪽은 아닐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재정 변호사님 가시는 상임위원회가. 그래도 국회활동이라는 것이 물론 상임위원회 활동 중심으로 하겠지만 모든 사회현안에 맞닿아 있는 거고 지금 개성공단 문제나 이런 것들 더 민주당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통일위 변호사님들이 계속 제안하실 것 같아요. 우리 미군위·통일위 변호사님들과 협력할 수 있는 부분들을 이재정 변호사님과 협의해서 잘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 까 생각하고 있어요.

 

오지은 입법로비해도 되나요? 긴급조치특별법(웃음).

 

김지미 엄청난 전화공세에 시달릴 것 같은데. 너도나도 장차장님에게 전화해서.

 

장연희 어제 시민사회단체 간담회를 했는데, 거기서 단체 분들이 걱정하시더라고요. 제 전화번호를 단체에서 많이 아는데, 괜찮겠냐고. 엄청나게 전화가 갈 건데, 중간에 살짝 바꾸면 안된다고.

 

오지은 국회에서 이제 적어도 4년은 있으실 거고, 고민이 많으실 것 같은데.

 

장연희 사실 정치도 잘 모르고 대선도 있고 또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거 잖아요. 어쨌든 공부를 많이 하려고 생각하고 있고요, 당장은 헌법과 국회법을 공부하고 있고요, 또 더민주에서 보좌진 교육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교육도 신청해놓고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고요, 국회가 어마무시한 곳이란 말을 많이 들어 솔직히 겁이 많이 나지만 그래도 민변 12년의 경험이 큰 자산이 될 것 같아서 민변 경험을 바탕으로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민변 변호사님들을 귀찮게 하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즐겁게’ ‘행복하게’ 일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