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민변 아이돌, 강문대변호사를 만나다.

2016년 4월 11일 minbyun 1,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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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오늘은 강문대 변호사님 모셨습니다.

 

강문대 안녕하세요, 저는 변호사 17년차(연수원 29기)이고 현재 법률사무소 로그의 대표로 재임 중인 변호사입니다. 민변에서는 현재 노동위원장을 맡고 있고, 최근 총회준비위원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2000년 변호사 개업하면서 바로 민변에 가입하여 민변 이력도 17년차입니다.

 

김지미 강변호사님하면 흔하지 않은 이력이 있으신데 그 중에 우선 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셨잖아요. 저는 처음에 신학대를 나오셨다고 그렇게 들었었거든요. 그런 오해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은데 종교학과에 진학하신 이유가 무얼까 궁금합니다.

 

강문대 고등학교 때는 종교성이 많이 발현이 됐던 것 같아요.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여러 가지 의문점이 들었는데 그걸 신학적으로 정리를 해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신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바로 신학대학에 가는 방법도 있지만 학자가 되려면 일반 대학을 거친 다음에 대학원으로 신학교를 가는 경우가 일반적인 패턴이어서 그러면 학부는 관련 있는 학과로 가고 대학원은 신학대학원으로 가야되겠다 이런 마음으로 종교학과를 가게 됐던 것이죠.

 

김지미 어떤 의문점이 들어서 신학자의 길을 가야겠다라고 결심하게 된 걸까요?

 

강문대 그때는 집도 가난하고 현실감각이 없지는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시기별로 발현되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다닌 교회가 대학생들하고 연결이 돼서 약간의 겉멋 같은 것도 있어서 세속적인 길이 아닌 학자적이고 이론적인 길을 가봐야 되겠다라는 생각들을 했었어요. 법대하고 경제학과에 가는 것은 세속적인 인간이다 그 시기에 그런 생각들을 했었죠. 기독교 관련해서는 신을 믿기로 마음을 먹고 있는데, 현실적인 사고의 기반 속에서는 잘 납득이 안 되거나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계속 나오니까 의문점들을 해소를 해봐야 되겠다이런 식으로 생각의 방향이 움직였죠. 그래서 끝까지 가본다라는 그런 마음이 들어서 신학 쪽으로 가게 됐죠.

 

김지미 공부 잘하는 아들에 대한 기대 때문에 부모님 반대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강문대 부모님도 같이 교회를 다녔으니까 대놓고 반대하기는 어려웠던 점도 있고 막연한 걱정은 분명히 했을 것 같은데 아들이 한다고 하니 알아서 잘 하겠거니 하고 그냥 놔두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대학을 안 다니셨으니 대학에서 특정 전공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기도 하셨을 겁니다. 그냥 서울로 대학을 가고 대학생이 되니 알아서 하겠지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제 학비 등 지원을 제대로 못해 주셔서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는 일에 대해 간섭을 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지원도 없고 간섭도 없었던 셈이지요. 부연해서 말하면 어쨌든 그 시기에 제가 생각하는 바가 안 꺾였기 때문에 대학교에서 그런 생각들을 충분히 소진할 수 있었고 후에 이제 세속적인 길을 가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라고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부모님께서 그 때 제재를 안 하고 반대를 안했던 것이 나로서는 큰 도움이 됐다라고 생각을 해요. 지금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런 생각할 때가 많이 있어요. 시기별로 발현되는 것이 있는데 그게 좌절이 되면 나중에 훨씬 더 강하게 거기에 집착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일이 안 생기게 하려면) 믿고 기다리고 자연스럽게 소진되도록 두고 볼 필요도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김지미 경험에서 나온 교육철학이네요.

 

강문대 그 때 만약 부모님이 반대를 하고 법대나 경제학과를 가라고 하셨다면 그 시기에는 내가 그걸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반발심으로 인해서 내 지향 자체에 왜곡도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김지미 어렸을 때부터 학구적이거나 논리적 성향이 있으셨던 거 같아요. 삶에 대한 의문, 종교적인 것에 대한 의문이 들었을 때 성직자가 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보통 종교 안에서 이 의문점을 풀어 봐야겠다라고 생각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이것을 학문적으로 풀어보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신 것을 보면요.

 

강문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려는 경향이 어느 정도는 있는 것 같아요. 애니어그램 식으로 말하면 머리형의 기질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학구적이냐라는 부분은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어떤 문제점들에 대한 답을 빨리 찾고 싶어하고, 구체적으로 찾고 싶은 경향은 강하지만 지긋하게 오랫동안 분석하는 것들을 썩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그렇다고 말하기가 주저되네요. 나이가 들면서 이런 성향들을 알게 됐는데 저도 제가 학자적이면서 은근과 끈기를 가지고 문제를 바라보고 이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런 스타일을 적절한 시점에 잘 알아차린 것도 제 삶에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이런 것들에 대한 지향은 아주 강한 편이긴 한 것 같습니다.

 

김지미 그런 생각으로 종교학과를 가셨는데 중간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사법시험을 보시게 된 건가요.

 

강문대 종교에 대한 탐구를 대학교 가서 마음 놓고 했죠. 학과 공부와 종교성의 발현이 구분이 안됐기 때문에 아주 신나게 공부를 많이 했었어요. 제가 86학번인데, 호기심과 학문적 일치 이런 것들이 86년도 가을쯤이 가장 절정기였어요. 그때 아시안게임 방학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아시안게임을 하니까 학교가 문을 닫아버려서 기억으로는 자취방에 앉아서 하루에 책 한권씩 읽는다고 하면서 관련 책들을 막 읽어나갔던 기억들이 많이 납니다. 그런데 대학교 학생운동에서 요구하는 헌신성이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지향 이런 것은 기독교에서도 요구되는 것이고 저것들과 기독교성 이런 것들을 종합을 해볼 수 있지 않는가 하는 데까지 생각을 하게 됐어요. 기질적 보수성은 있어서 기독교를 박차고 다른 운동단체에 간다거나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뭘 도모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생각들을 하는 기독교인들과 함께 뭔가를 해보자 하는 것까지는 마음이 열렸었고 마침 학교 안에서 그런 것을 도모하는 사람들을 서로 알게 되는 계기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과 함께 대학교 2학년 때부터 기독교 서클을 만들어서 활동을 하게 된 것이죠. 그게 기독교문화연구회라는 곳입니다.

 

김지미 이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졸업을 할 때까지 빈민촌에 들어가서 사신 거죠?

 

강문대 우리가 학생운동권처럼 정치적인 이슈파이팅을 할 능력은 안됐지만 종교단체 특유의 헌신성은 있었고 또 약간의 순진성도 있었고 또 그 당시 해방신학·민중신학의 영향도 있고 해서 말로만 뭘 하거나 학생들끼리만 뭘 하거나 해서는 안 되고 현장에 가야된다 하는 요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서클 일부는 빈민촌에 가서 살고 일부는 공단지역에 가서 살았어요. 해방신학에 보면 BCC라고 해서 기본공동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공동체를 만들겠다 이런 취지에서 저는 계속 빈민촌에서 살게 됐던 것이죠.

 

김지미 어느 지역이죠?

 

강문대 그때 신림 6동, 7동이었던 난곡에서 살다가 그 다음에는 봉천 5동. 지금은 다 재개발 되어서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그때는 다 빈민촌이었습니다. 거기서 그 동네 야학과 두부공장, 청소년들 지도, 지붕수리 그런 것들을 실제로 하면서 살았습니다.

 

김지미 그게 방학 때 잠깐 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거기서 같이 살면서 하는 거였던 거죠?

 

강문대 그렇죠. 그런데 저는 불편한 게 전혀 없었어요. 왜냐하면 빈민촌에서 가장 불편한 것이 수세식 화장실이 아니라는 것하고 씻는 것이 불편하다는 건데 제 고향이 그런 곳이었기 때문에 저로서는 전혀 불편한 것이 없었고 빈민촌에서 산다는 생각조차도 잘 없었어요. 당시에 우리 지도하시는 교회전도사님 부부가 같이 살기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불편했을까 싶어요. 그 때는 전도사 남편이랑 결혼해서 남편 따라 빈민촌에 들어왔으면 이 동네에서 같이 좀 섞여서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정말 철없는 생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들어요.

 

김지미 이 때 빈민촌에서 활동하신 것 때문에 나중에 구속되신 건가요?

 

강문대 네. 우리는 종교적인 열정으로 활동을 하는 거라 사회적으로 누군가가 우리를 주목하면서 문제를 삼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안했습니다. 물론 학생 운동권에서 나오는 책들도 같이 공부를 하고 유인물 들고 다니면서 보기도 했지만 이걸 누군가가 불온시하게 생각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안했는데, 경찰은 이걸 주목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공단지역과 빈민지역에 대학생들이 잠시도 아니고 떼를 지어 살면서 대주민 접촉활동을 한다 이런 식으로 파악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자기들 내사 정보 자료에 그걸 넣었던 것 같고 그러다가 90년대 초반 노태우 정권 때 신공안정국이라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안기부나 경찰청 이런 데에다가 지침이 내려가면 뭐든지 하나 만들어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작 우리는 당시에 내부의 피로도도 있고 생각의 다름도 있고, 대학교 4학년 이제 졸업할 때도 되고 이러니까 진로고민 때문에 그 활동이 썩 잘되고 있지도 않아서 다 흩어져 있던 시기였거든요. 저 같은 경우엔 군대도 가야했기 때문에 고향에 가 있었는데, 이걸 조직사건으로 만든 거예요. 기독교문화연구회라고 하기에는 자기들도 좀 약해보였던지 기독교노동문화운동연합이라고 하는 이상한 단체 이름을 만들어서 조직 사건화 했죠.

 

김지미 그러면 이게 국가보안법 위반인가요?

 

강문대 네, 국가보안법으로 들어갔지요. 이게 실형을 살 정도는 아닌데 구속 만기 6개월을 채우고 나왔어요. 저는 형사소송을 몸으로 배웠어요. 지금은 첫 재판을 2주 정도면 잡는데 옛날에는 첫 재판을 한 3개월쯤 뒤에 잡았어요. 그래서 구속 기간을 다 채우고 나온 거죠. 제가 지금도 기억나는 게 2000년에 변호사 처음 됐을 때 대법원에서 무슨 지침이 변경됐다 이러면서 2주 이내에 첫 기일을 잡으라고 하는 걸 봤었어요. 그때서야 옛날에 내가 3개월이나 잡혀있었던 것이 완전히 부당한 구금이었구나, 신속한 재판을 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구나 알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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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이때 구속되신 것을 계기로 형사사법절차를 내가 몸소 체험하면서 너무 답답하니까 공부를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신 건가요?

 

강문대 아뇨. 그때는 사시가 뭔지도 몰랐고 워낙 멀게 느껴져서 생각도 안했어요. 제가 고시촌에서도 잠깐 산 적이 있는데 그 때 태학관에 ‘채권’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는 걸 보고 저게 뭔지, 난 채권장사만 알았기 때문에 저기에 왜 저런 걸 붙여놨는지 의아하게 생각한 적도 있으니까요. 재판이 끝난 후에 다시 군대를 현역으로 가게 됐어요. 당시엔 실형 2년을 선고받지 않으면 군대 면제가 안됐거든요. 그 때를 생각하면 참 힘들었어요. 방위라도 되면 좋겠다라고 했는데 눈도 안 좋고 체격도 왜소한 나를 굳이 현역으로 보내가지고(웃음). 그 젊은 시기에 갇혀있다가 또 군대에 가고. 군대에서는 사회성에 대한 훈련을 하게 되는데 그런 것들을 폭력적으로 배우게 되니까 대단히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늘이 정말 노랳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군대 폭력이나 자살 사건이 발생하면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집니다.

 

김지미 군대 제대하고 나서 진로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하셨겠네요.

 

강문대 네. 제대하고 나서 기존에 생각한대로 신학대학을 갈 것인가 고민했는데 식견도 좀 넓어지고 제 스타일을 알게 되니 내가 학자적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해볼 수는 있겠지만 그거는 너무 끝이 없는 것도 같고 또 궁금증도 많이 해소가 됐거나 궁금해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이런 인식도 많이 들었어요. 또 하나는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사람들과 접촉을 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주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헌신적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거나 할 자신이 정말로 없었어요. 그래서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에 일단 접었는데 그걸 접고 나니 일반 직장인으로 살 수 밖에 없는데 그건 하기 싫기도 했지만 종교학과 나오고 국가보안법 전과를 가지고서는 원하는 직장에 가기도 힘들었어요. 그러면서주변을 보니까 사시 공부하는 사람들이 보이더라구요. 재판 과정을 몸으로 한 번 겪어 본 적이 있어서 그걸 하면 할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최소한 무시를 당하지는 않겠다, 생계 걱정은 안 하면서 사회활동을 할 수 있겠다, 이런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죠.

 

김지미 연수원 29기신데 변호사가 되시고 나서 한울합동법률사무소에 조금 계시다가 민주노총 법률원이 만들어지면서 거기로 가셨어요. 예전에 하셨던 빈민운동하고 어떻게 보면 맥이 닿아 있기도 하지만 노동변호사를 하게 되신 건 어떤 계기로 인한 건가요?

 

강문대 대학교 때 빈민활동을 하긴 했지만 운동의 주류에 들어가 본 적이 없고 제대로 한 번 해본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해서 변호사가 되고 난 후 제대로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당시 운동을 한다는 것이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노동운동 정도가 가장 친밀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연수원에 다닐 때부터 노동법을 전공을 하면서 노동 쪽 변호사를 해보자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죠. 당시 상황이 좋았던 것이 29기 때 김지형 전 대법관님이 연수원 교수로 재직하고 계서서 노동법 수업 체계가 갖추어지기 시작 했고, 또 권두섭 변호사가 동기인데 노동법학회 총무를 하면서 같이 잘 놀고 공부하고 그런 분위기들이 좀 있었습니다. 한울합동에 들어갔던 것도 당시 민변 노동위원장님이시던 이경우 변호사님이 계시는 사무실이어서 노동 쪽 일을 하기 위해서 들어갔던 거예요. 그러다보니 조금 더 깊이 관여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법률원이 처음 만들어졌거든요. 권두섭 변호사가 인연이 되고 이러다 보니 가서 한번 해보자 해서 가게 된 것입니다.

 

김지미 처음에 법률원은 몇 분이 시작하신 거죠?

 

강문대 2002년도에 만들어졌는데 저, 권두섭, 권영국, 지금 다산에 계시는 김영기 변호사님 이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우리가 권위적이거나 이런 것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이도 많고 전과도 많은 권영국 변호사님을 원장으로 옹립을 했죠.(웃음)

 

김지미 전과가 많은 것도 고려지점이군요(웃음).

 

강문대 권영국 변호사님이 그런 걸 사양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바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변호사 되자마자 원장이 된 것이죠. 초고속 승진입니다(웃음). 어쨌든 멤버가 잘 맞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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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그렇게 2년 정도 법률원에 있으시다가 2004년에 단병호 의원 보좌관으로 가셨는데, 공식적으로는 변호사로서는 보좌관 1호신 거죠?

 

강문대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얘기들 하고 있습니다. 법률원에서 2년을 하면서 사건은 계속 지고 내가 개성을 발휘하는 지점보다는 벌어진 일을 수습·처리하는 것들이 계속 많아지면서 힘이 들더라고요. 그때 마침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진출을 하면서 노동 쪽 변호사를 구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단병호위원장이 민주노총 위원장이시기도 했고 제 감방 동기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인연도 있고 제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은 욕구도 있고 그래서 가서 또 열심히 2년 일을 했었죠.

 

김지미 이때 진보정당이 원내 진입을 하면서 뭔가 새로운 희망이 솟구치는 듯한 사회분위기가 있었죠. 민주노동당에 거는 기대도 굉장히 많았었고. 되게 일하기가 신났을 것 같아요.

 

강문대 신나게 일을 했어요. 기존에 원외에서 떠돌아다니던, 시험으로 치면 일종의 족보같은 노동계 쪽의 모범 법률안들이 있었는데 그게 국회에는 제대로 제출조차 안 되고 있었어요. 그것들을 다 모아서 체계적으로 정리를 해서 법안 형식으로 제출을 했었어요. 그때 생각해보면 기존에 원외에 있던 것들을 원내로 진입을 시키고 전선을 정확하게 형성한다는 점에서는 제가 최대 역할을 했다고 자임을 합니다. 다만 아쉬운 건 저도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못 했었는데 그 때 노무현 정부 때 노동부 공무원들도 진보적인 사람이 전진 배치되어 있는 상황이어서 조건이 좋았거든요. 서로 다른 점을 자꾸 확인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것들은 빨리 다져서 해놨어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생각을 못했던 것이 정말 지금도 안타깝습니다.

 

김지미 그때는 누구도 몰랐죠.

 

강문대 그러니까요. 왜 몰랐을까? 지금도 저는 ‘지금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은 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점검해 보고 그럽니다. “내가 지금 아는 것을 그 때 알았더라면” 뭐 이런 제목의 시집이 있는데, 좀 더 나아가서 “나중 내가 알 게 될 것인데 지금은 모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자문해 보는 것이지요 .

 

김지미 그런 생각 들 때가 있죠. 그때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많이 했어야 하는데 그냥 보내버린 건 아닌가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럼 이제 민변 이야기를 해 볼까요? 민변에는 언제 가입하신 거예요?

 

강문대 저도 변호사 시작과 민변 시작이 똑같습니다.

 

김지미 법률원에 계실 때나 보좌관 하실 때는 민변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던 상황은 아니었던 거죠?

 

강문대 민변에 가입을 했지만 저는 민변에 가입했다는 것이 민변 노동위에 가입했다는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민변 자체는 좀 멀리 있게 느껴지고 아주 친근감 있게 잘 안 다가오는 때였습니다. 노동위도 재미가 있지는 않았고요(웃음). 그러다가 민주노총에 가고 국회로 가고 그러면서 서초동을 떠나니 민변 활동 자체에 아주 충실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서초동에서 송무를 하는 변호사의 모습으로 있는 게 아니어서 조금 결합도가 약했던 시기였습니다.

 

김지미 민변 활동하기는 개업변호사가 제일 좋은 것 같기는 해요. 그러면 2006년도에 보좌관을 그만 두고 개업을 하면서 노동위원회 활동도 적극적으로 시작을 하신 거죠?

 

강문대 네. 개업변호사로서 민변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또 노동위라는 울타리 내에서 변호사 활동들을 쭉 해오고 있습니다.

 

김지미 민변 활동이라는 게 결국은 노동위원회 활동이 주를 이뤘던 거고, 2014년부터 현재까지 노동위원회 위원장님이시잖아요. 노동위원회가 그 당시에는 재미없었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재밌다는 말씀이시죠?

 

강문대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는 얘기할 수 있어요. 후배들이 오면 구체적인 정보도 주고 커피도 마시고 새로 오면 전화라도 해주고 하거든요. 이게 다 교회에서 배운 거예요(웃음). 저는 그게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는데, 변호사들이 그 당시에는 다들 무게감들이 조금 있었고, 또 변호사 자체를 존중하는 마음이 컸던 것도 있어요. 알아서 잘 하겠지, 누가 누굴 돌보랴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노동위원회 부위원장을 오래했어요. 권영국 변호사님이 위원장 활동을 할 때 제가 부위원장이었는데, 권영국 변호사님이 외부 활동을 주로 담당했다면 나는 부위원장으로서 내부를 챙기는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진짜로 그게 재미도 있었고 마침 후배들이 많이 들어오기도 하면서 그런 역할을 하려고 했었죠. 후배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옛날하고는 분위기가 좀 부드럽고 편해졌다는 얘기는 하더라고요.

 

김지미 노동위가 민변 안에서 최대 단위이잖아요. 따로 5만원이라는 적지 않은 회비를 낼 만큼 충성도도 남다른 위원회이기도 하구요. 민변에 가입하는 분들 중에 노동위원회 활동을 원하는 분들이 제일 많은데, 그 이유가 뭘까요?

 

강문대 예, 일단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보적 변호사가 된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쉽게 떠올리는 것이 노동변호사가 되는 것이니 그런 차원에서 많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또 가입까지 해서 지원을 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입한 분들 중에서 노동변호사로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는 분은 생각보다는 많지 않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노동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막연히 우호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가 구체적인 문제에 봉착하면 기존의 생각들이 유지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또 생각은 그대로 유지하지만 그걸 실현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지기도 합니다. 민변 노동위는 이런 현실 속에서 노동문제에 대해서 전문가로서 더 치밀하게 고민하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민주노총을 단순 대변해서는 안 되고 또한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 소외된 노동자들 위주로 하는 활동들이 더 진지하게 모색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노동계의 대표선수라고 할 수 있는 민주노총이 공권력과 자본에 의해 당하는 탄압이 워낙 크고 사회적으로 계속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일단은 그런 활동을 우선시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노동기본권의 문제는 양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깐요. 그렇다고 해도 새로운 관점에서 노동문제에 대한 틀을 제시하고 노동운동의 방향을 조금씩 발전시켜 나가는데 우리가 특별히 기여할 점들을 계속 찾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내부의 토론과 연구가 더 충실하고 활발해져야 하는데 아직은 좀 미흡한 것 같습니다. 너무 재미만 추구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있습니다.(웃음)

 

김지미 이제 곧 노동위원장 직을 내려놓으실 예정이시잖아요. 노동위원회가 앞으로 이런 부분을 좀 더 강화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내가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이런 부분은 좀 아쉬웠다 하는 점이 있을까요?

 

강문대 노동위원회 전체 숫자 중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숫자가 만족할만하지는 않다, 그래서 그 숫자를 계속 좀 더 늘리고 다양한 활동에 더 많이 개입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한다라는 것이 하나이구요. 노동기본권적 관점에서 보면 그건 답이 다 정해져 있거든요. 헌법에 보장되어 있고, 최대치를 추구해나가야 된다는 것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데 현실에 있어서는 그 얘기만을 하기가 조금 어려운 점들이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노동자 자체가 너무 많이 분화가 됐어요. 옛날에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해서 노동자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되었었는데, 지금은 노동자를 구분하지 않으면 어떤 문제에 대한 구체적 답을 내기가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어떤 노동자는 좀 자제해야 하고, 어떤 노동자는 더 올려줘야 하는데, 전체 노동자를 가지고 하나로 말을 하기 시작을 하면, 상대 진영의 반격에 취약점을 노출하게 되고 전체 국민을 설득하기도 어렵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점들을 노동위 활동 과정에 충분히 반영시키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민변은 어떤 노동자들을 대변해야 하는 것인가. 조직 노동자를 적대시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조직노동자는 조직노동자의 틀을 많이 갖추고 있으니 그 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정도로 해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미조직 노동자들을 더 많이 지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미조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고민하다 보면 경제정책적인 문제와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노동기본권의 문제를 경제정책 속에서 잘 녹여내서 조금 새로운 틀을 제시하는 이런 것들을 하고 싶었는데 내가 학구적이질 못해서(웃음). 일단 친목을 다지면서 장기적으로 그쪽으로 나아가야지 했던 것인데, 미완으로 그쳤죠. 이제 학구적이고 추진력이 강한 다른 위원장님이 오셔서 그에 대한 답도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지미 최근 변호사님의 활동 중 두드러지는 것 중에 하나가 재심이 아닌가 싶어요. 지금 무기수 김신혜 재심 사건도 하고 계시고 얼마 전에 새로 생긴 대한변협 재심법률지원소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되셨잖아요.

 

강문대 저는 변호사로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정치적인 문제가 아닌 구체적인 형사사건에서 억울함을 풀어주는 문제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또 스스로 생각하기에 사실관계 파악이나 집요하게 당부를 판단하는 이런 부분에 약간의 장점도 있는 것 같고요.

 개인적으로 그런 바람이 있었는데 지난 해에 대한변협 인권위원으로 있으면서 김신혜 사건을 지원을 하게 됐고 지원을 하다 보니 대한변협에서 필요성을 느끼고 재심소위원회를 만들었는데 내가 주창한 바도 있고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경력상으로나 나이상으로 제가 조금 앞서 있고 해서 위원장까지 맡게 됐습니다.

 저는 민변이 책임져야 할 전선 중에 하나가 사법분야이고 사법적 피해자들에 대해서 우리가 잘 돌보지 못하는 측면들도 분명히 있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민변 활동의 전략적 측면에서도 국민들의 신뢰를 얻고 국민들과의 간격을 좁힌다는 차원에서 우리도 그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를 지원하고 시국 사건의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또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일반시민의 권리구제도 우리가 열심히 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신뢰를 쌓아야 우리가 하는 고유하게 하는 활동들에 대해서도 더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에는 적은 인원으로 특화된 활동만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숫자도 많이 늘고 했으니 활동 범위를 점점 넓혀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한변협에서 재심 소위를 만들지 않았다면 민변 내에서 구금서신팀을 확대·강화 하자고 주장하려고 했는데 마침 대한변협이 그 역할을 하겠다고 하니 민변은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도 재심소위 위원 대부분은 민변 회원입니다

 

김지미 마침 얼마 전에 사법위원회에서 재심사건에 관심을 가져보자. 사법위에서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있었거든요. 이 기회에 민변에서도 일반 재심 사건을 통해서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사법위원회 역량도 강화하구요(웃음).

 

강문대 재심사건을 통해서, 하나는 구체적인 사건에서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재심과 관련된 규정과 법령의 정비가 있을 수 있는데요, 구체적 사건을 감당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여건이 마련이 되어야 합니다. 시간과 인력이 투여가 돼야 하는 일이지요. 민변이 당장 그 일을 하기엔 여의치 않은 점이 있는데, 그렇다면 사법위원회에서 재심과 관련된 규정과 제도를 정비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지미 아까 말씀하시기를 민변의 가입은 변호사 시작과 동시에 했지만 사실 약간 거리감이 있었고, 노동위원회 활동을 민변 활동으로 오랫동안 생각하시다가 위원장이 되면서 민변의 집행위원회도 참석을 하시고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민변 사안에 참여를 하시게 된 거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민변의 안살림을 총 책임지는 사무총장으로 내정이 되셨어요. 어떤 마음으로 수락을 하신 건가요?

 

강문대 저는 아직도 제가 적격자인지 또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 정말 의문이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제가 집행위원회 들어가기 전에는, 민변 단위로 생각을 하고 민변 단위로 실천을 하는 것을 잘 하지 못했습니다. 위원회 단위로만 활동을 주로 해왔고 막연히 민변을 책임지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갑자기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집행위에 참가하면서는 민변 일에 관심을 가지고 논의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그 점을 당선자께서 좋게 보아주신 것 같습니다. 제안을 받고서는 한편으로는 주저도 되고 두려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생각하는 민변의 상들과 틀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한 번 구현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사무총장이 큰 틀의 방침을 정하고 대외적으로 책임을 지는 자리는 아니지만 주어진 권한 내에서라도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라고 보았습니다. 이에 감히 제안을 지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민변 언저리와 변방에 있어 보기도 했고 비주체적인 회원으로 있어 본 적도 있어 다수의 회원들과 소통하는데 장점이 있을 수 있겠다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약간 궤변 같기는 하지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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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 이것저것 고민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변방에 있는 회원들 입장에서는 물론 잘하는 것도 보이지만 내가 직접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왜 저렇게 밖에 못하지, 저런 건 저렇게 안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들을 훨씬 많이 할 수밖에 없거든요. 변호사님이 생각하시기에 민변이 이런 것은 기존에 부족하지 않았나. 앞으로 내가 이런 점을 중점적으로 챙기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나요?

 

강문대 제가 법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학생운동을 한 것도 아니며 사무실도 단독 개업을 오래 하고 있어서 민변에서 열심히 활동한 분들과 긴밀히 소통해 오지 못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외부자적인 지위에 나를 놓고서 민변을 생각했던 측면이 있는데 제가 변방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런 점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런 점이 총장 일을 한다면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겠다, 가장 많은 민변의 구성원들은 이런 상황에 있을 것이다. 즉, 아는 사람이 잘 없거나 사무실 단위로 조직적으로 민변에 결합해 있지 않거나 이럴 것이기 때문에 일반 회원들에게 동질성을 가지고 편하게 다가설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회원들도 그 점을 알아주고 편하게 생각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좀 있습니다.

 기존의 부족한 점 이런 것들은, 제가 저년차였을 때를 생각해보면 조금 다가가기가 힘든, 그리고 안착하기가 부담스러운 그런 점들이 분명히 있었거든요. 그래서 조직 자체를 편안하게, 누구나 쉽게 다가올 수 있는 그런 조직으로 만들고 싶구요. 또 하나는 어떤 구체적인 정보들이 공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마침 그것은 요즘 변론센터가 생기면서 일정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고, 총장으로 기여 한다면 그런 점들을 더 많이 확대를 하는 쪽으로 해보고 싶습니다.

 사업과 관련해서는 민변의 역할이나 위상에 대한 논란들이 많이 있는데 민변이라는 조직자체로서 단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점은 한계가 있지 않나. 대신 민변에 개별적으로 훌륭한 변호사님들이 많이 있고, 어차피 변호사는 개별적으로 활동들을 많이 하니까 그 개별적 활동들을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1차적인 민변의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소송의 형태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거나 여건상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우리가 그 역할을 수행해야만 할 것인데, 그 역할이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으로나 1회적 대응을 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변론 투쟁의 의미를 극대화하고 변론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민변이 진보적인 시민사회 단체를 대변하는 정책 전문가로 인식되고 있는 측면이 있으므로 그런 점에 대한 대응 시스템도 갖추어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시민 사회 단체와 언론의 요구에 발맞춰 신속 정확하면서도 책임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도 방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결국 상근 인력의 역할 조정과 회원 변호사들의 참여도 제고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스템을 어떻게 갖출지 회장님과 함께 방안을 마련해서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노동위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현안 문제가 생겼을 때 변호사가 옆에 있으면서 같이 해 주는 것이 활동하시는 분들에게는 큰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변호사가 결합하는 것이 극한 탄압의 1차 저지선이 될 수도 있고, 상황이 어려워졌을 때 우회하는 것을 결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 본연의 임무이냐 또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우리가 현안에 연대한다는 신뢰를 주는 것은 대단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역할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직은 변호사가 ‘호민관’의 역할을 해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김지미 변호사님 입장에서는 새로운 일 두 가지가 동시에 출발을 하게 돼서 설레기도 하고 긴장이 되기도 하고 그러실 것 같아요.

 

강문대 제가 아주 적극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주어지는 역할을 마다하는 스타일도 아니데 나이가 들면서 한 자리에 있다 보니 생각지도 않은 과중한 역할들이 자꾸 부여가 되는데 그것도 현재로서는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역량이 되는지 의문은 가지고 있지만 최대한 잘 해보려고 하고 또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고 여러 명이 같이 하니까 역할 배분하고 소통하고 하는 것은 제가 조금 배운바가 있어서 잘 운영을 해보겠다 이런 정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지미 앞으로 2년이 민변 대내적으로는 30주년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고 대외적으로는 대선 정국이 시작되는 시기라 정말 할 일이 많고 바쁘실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앞으로 2년 동안 사무총장으로서의 각오를 말씀해 주세요.

 

강문대 저는 ‘민변의 아이돌’이 되겠습니다(웃음). 회원들 특히 후배 변호사들을 두루 우르고, 자랑스러운 선배들이 만든 우리 민변의 역사를 어나가고, 박근혜 정부 임기 말기의 퇴행적 상황을 파해나가겠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돌’입니다. 총장직을 수행할 때 기본 지침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 이런 말을 함 만들어 봤습니다. 제가 말 만드는 것을 좋아해요(웃음). 이런 마음가짐으로 잘 해보겠습니다. 기존에 회원들 각자가 스스로를 변방이라고 생각하고 누군가가 회무를 책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저도 역시 그랬었는데 이제 그런 사람이 총장으로서 성실하게 또 굳건하게 역할을 해서 후배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야겠다, 그리고 경선회장 1기의 총장으로서 회원들이 선출한 회장님이 지도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실무를 잘 지원해야 하겠다, 이런 마음 가짐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장은 회원과 역사 앞에 책임을 지는 것이고, 총장은 실무를 책임질 뿐입니다. 곧 민변 총장은 ‘실무 총장’일 뿐입니다. 총장에 대해 다른 위상으로 논하는 것은 최소한 경선 이후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상근 인력과는 요란하고 부산스럽게, 회원들과는 조용히, 회장님과는 긴밀하게 소통하면서 일해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