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평화활동가 셀림의 고군분투 민변 활동, 이동화님 인터뷰.

2015-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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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우선,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동화 저는 이동화 혹은 셀림이라고 하구요. 민변에서는 2007년 1월부터 근무하고 있고, 국제연대위와 국제통상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무처에서는 회원팀, 입법감시TF 등 여러 가지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안혜성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요르단 대학에서 아랍어를 공부하셨다고 하는데, 방금 한 자기소개를 아랍어로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동화 아 진짜 이거 몇 년 만에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مرحبا، اسمي سليم، وأنا أعمل في minbyun منذ عام 2007 باعتباره المنسق الدولي. تشرفت بمقابلتك. وداعا. (앗 쌀람 알라이쿰 이쓰 미 셀림. 아나 다라쓰투 루가 아라비아 피 마르카주 루가 피 알 아루두니야. 알 안 아나 알 아말 피 민변 민 투싸나아 세바하. 슈크란 좌질란……)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셀림입니다. 저는 2007년부터 민변이라는 곳에서 국제연대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뭐 이런 뜻입니다.(웃음)

일동 우와~ (웃음)

안혜성 2007년부터 민변에서 일하셨다고 했는데, 민변과 함께 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동화 요르단에서 공부도 하고, 캐나다에서 자격증도 따고. 그러다 2006년 10월 경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 때, 오래전부터 제 ‘길이자, 꿈이자 계획‘이라고 생각했던 국제연대 활동, 그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물색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국제연대 활동을 하며 단체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지는 않았고, 민변과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정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둘 모두에 합격했지만(웃음) 민변으로 오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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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코이카와 민변 중 왜 민변을 선택하셨나요?

이동화 아무래도 제가 활동할 수 있는지를 따져 봤을 때, 민변이 훨씬 더 유리할 것 같고, 민변에 대해 이전부터 좋은 일을 하는 단체라고 생각했기에 여기서 활동하기로 결정했죠. 그땐 제가 뭘 잘 몰랐던 것 같아요.(웃음)

안혜성 국제연대 활동이 왜 본인의 ‘길이자 꿈이자 계획’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대학교와 대학원 시절, 교수님의 말씀 및 여러 시민사회 활동가분들과의 교류를 통해 국제연대의 중요성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 전에는 국내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가장 처절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눈을 한번 돌려보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정말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국제연대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계기는 이라크 전쟁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그 사건이 저한테 길을 보여준 것이죠.

박재홍 전쟁을 지켜보셨던 당시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동화 저는 전쟁이라는 것이 처절한 이미지로 다가왔어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려오는 느낌이랄까요. 사람이 죽고, 부상당하고, 삶이 쪼개지는, 사람의 상식과 논리를 뛰어넘는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진행되죠. 그래서 치열하게 반전을 외쳤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전에 세계 곳곳의 반전 여론을 보며, 전쟁을 시민과 민중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정치적 논리로 전쟁이 발발하고야 말더군요.

구체적인 활동 이야기를 하자면, 제 대학원 선배 중에 전쟁을 막기 위해 ‘인간방패 운동’에 참여한 선배가 있었어요. 세계 각지에서 활동가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이라크에 들어가서는 포격 대상이 될 만한 시설에 투입되는 방식의 운동을 말하는데요. 이게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방식은 아니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꽤나 참여를 했습니다. 저 역시 ‘저렇게라도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생각하며 출국 일정이 잡았었습니다. 그런데 이라크 전쟁 전에는 입국이 가능했었는데, 개전 이후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포기해야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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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직접 참여는 못하셨지만,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들겠다고 결심하신 건데요. 그에 따른 두려움은 없었는지, 두려움을 이기게 한 원동력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동화 철없음? (웃음) 현지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보다, 당장의 참혹한 일을 막아야겠다는 절박함이 컸기에 그런 두려움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앞서 가있는 사람들이 있었고요. 또 당시에 저는 당시 싱글이었죠. (웃음) 지금 가라고 하면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박재홍 ‘인간방패 운동’이 좌절된 이후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라크에 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이동화 이라크는 예상보다 빠르고 쉽게 몰락을 해요. 이후에는 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했습니다. 재건 노력을 시민사회가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었고, 이에 동의했던 저는 2003년 6월 4일에 이라크에 입국을 했습니다. 도시가 예상보다는 황폐하지 않았지만 미국이 주요 관공서, 도로 등을 정밀하게 타격해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폭격의 상흔이 남은 도시에 사람들이, 그 말도 안 되는 공간에서 그대로 살고 있더라고요. 그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매우 빈곤했던 한 마을에 들어가 어린이를 위한 시설과 진료소를 지었습니다. 당시 한겨레신문을 통해 모금 받은 금액으로 진행을 했고요.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사고도 있었고, 금전 문제도 있었던 바람에 함께 했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떠나갔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시에 시간적 여유도 있었고, 거기가 너무나 좋아서, 혼자였지만 남아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예상과 정말 다른 매력, 사람이 주는 매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골 사람들 보면서 순박하고 정이 많다고 하죠. 그 사람들이 정말 그랬습니다. 또 그 때가, 셀림이라는 이름을 받은 계기이기도 한데요. 제가 당시 시설을 지을 때 일을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그때 사람들이 저를 셀림이라 불렀어요, 친구한테 그게 무슨 뜻인지 물었더니, 한국의 마당쇠, 돌쇠처럼 우직하게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지금까지도 저를 그렇게 불러달라고 합니다.

안혜성 그 때 셀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셨군요. (웃음) 이라크에서의 나머지 이야기도 마저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이라크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게 됩니다. 너무 더워 지붕에 앉아있는데 총알이 날아다니는 게 보이더군요. 폭탄이 터지는 게 일상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더 최악이었던 건, 2003년 12월에 한국에 들어왔다가 2004년 6월에 다시 이라크에 들어가는데, 그 때부터는 외국 사람들이 인질로 납치가 되는 게 유행이 되고 있었던 겁니다. 2004년 정도부터 현지에서는 NGO나 언론, 혹은 외국 기업 관계자를 납치하고 각국 정부와 협상을 벌여 외화를 버는 형태의 범죄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고 김선일씨의 일도 그 때 당시의 일이었어요.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습니다. 활동가로서 현지에서 죽음을 당한다는 데는 두 가지 차원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내가 죽는 것을 넘어 현지 사람들에게 힘듦을 안겨줄 수도 있고, 운동의 의미도 많이 깨지게 되니까요.

바그다드에 있는 허름한 호텔에 머물렀을 때, 어느 날 새벽에 무장괴한이 사람들을 끌고 가는 모습을 바로 맞은편에서 목격했었습니다. 그 일을 겪고 대사관에서 머물렀었습니다. 활동을 보장해준다더니, 아예 나가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같이 있던 형이 대사관 담을 넘으려고도 했었죠(웃음) 그러던 중, 여권법이 개정되었습니다. 현지 정부의 승인 없이 체류한다면 영구적으로 추방될 수도 있게 된 거죠. 다시 이라크에 가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했었습니다. 이후 이라크는 여행 금지국으로 지정되더군요. 그렇게 이라크에서의 생활이 끝났네요.

안혜성 간사님께 큰 영향을 미쳤던 이라크에서의 생활을 마친 소회와 그 이후 중동 유학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이동화 한국에 돌아와 저는, 이라크에 있을 때 왜 사람들과 소통이 생각만큼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을까에 관해 고민했었습니다. 언어의 문제 때문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당시 영어를 썼는데 아무래도 현지에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대학교육을 받은 남자라는 대단히 소수집단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중간 매개자를 끼고 소통을 한다는 건 내용이 변질되는 부분도 있고 전달이 잘 안 되는 부분도 있잖아요. 저는 어쨌든 다시 가서 활동을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랍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 돈이 좀 필요해서 반월공단에서 7개월쯤 일하기도 했었어요. 그러고서 요르단에 가서는 아랍어를 공부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처음 간 것도 그때였어요. 원래는 이라크 옆이라서 요르단을 간 건데요. 가보니까 요르단 옆에 이스라엘이,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있더라고요. 물론 팔레스타인은 지도상에 없지만 요르단 인구의 1/3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 지역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대개 한국 활동가들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입문하는 방식이 저와 비슷해요. 요르단을 통해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접하는데, 현지에 가보면 새로운 문제들을 알게 됩니다. 기회가 생겨 저도 팔레스타인에 가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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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팔레스타인에 가셔서 어떤 걸 보고 느끼셨나요?

이동화 팔레스타인은 1948년부터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지날 수밖에 없는데요. 이라크에서는 높은 벽이 있는 경우 그 내부에는 미국 대사관 같이 무언가 지켜져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높이 10m의 두꺼운 벽이 800km 길이로 팔레스타인을 감싸고 있어요. 여기를 들어가려면 이 장벽에 있는 체크 포인트를 한 명씩 들어가야 해요. 이렇게 들어가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벽 안에도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정착촌이 있어요. 그러면 그것들을 연결해서 또 블록으로 싸죠. 이것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총을 발사하거나 폭탄을 투하하는 것과는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동의 자유를 제한받는 것이죠. 어떤 사건만 생기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사가 아닌 처벌의 목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활에 불편함을 가중시켜 왔습니다.

또한 2006년 초, 팔레스타인은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하마스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선거감시인단의 감독 하에 민주적으로 치러진 선거였으나 이스라엘은 이 정권이 테러정당이라고 발표한 뒤 통화 제재를 시작합니다. 팔레스타인은 자체 통화를 갖지 않고 원조를 받거나 송금을 받아 사용하는데, 이스라엘이 이를 막습니다. 또한 이외로도 수도를 막고, 나무를 베고 하는 식으로 삶을 옥죄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떠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말해주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사정을 알려 달라!”며 입을 모아 말하죠.

박재홍 그래서 알리셨나요?

이동화 글쎄요. 현지 활동가도 많아졌고 우리나라도 예전만큼 팔레스타인에 부정적이진 않지만 세상을 바꿀 정도 수준은 못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팔레스타인이 제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 거기도 하고요. 이라크나 팔레스타인이나 모두 무슬림이고, 모두가 피해자죠. 당시 저는 ‘미 제국주의’ 이런 용어를 즐겨 썼는데요. (웃음) 지금은 그 정도로 날 서 있지는 않지만 강대국에게 핍박받는 부분들에 대해 많이 공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당시에는 말도 못할 수준의 억압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대부분 무슬림들이더라고요. 제가 원래 종교를 안 믿는데 당시엔 그들 때문에 무슬림이 되기도 했었어요. 두 국가, 두 나라가 제 시선을 붙잡았고 제 길이 되었습니다.

박재홍 그러다가 이제 한국으로 들어오셨고요?

이동화 그렇죠. 그리고 이제 민변 활동가가 됐죠.

박재홍 민변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을 해 오셨나요?

이동화 처음에는 국제연대위원회와 민생경제위원회, 사법위원회를 담당하는 활동을 했어요. 이후에 민변 사무국이 사무처로 개편이 되면서 위원회는 국제연대위원회와 국제통상위 그리고 사무처에서는 회원팀, 그리고 입법감시 tf 활동을 하게 되었고 또 사무처에서 일어나는 단기적 사업(총회나 인권보고대회 등)에도 다른 상근자와 함께 진행하였어요. 연차가 조금씩 쌓이면서 주어진 일 외에도 여러 일을 담당했던 것 같아요. 회원분 들에게는 주로 문자나 메일로 각종 행사나 회의에 참석 및 회신을 요청하는 ‘스팸문자’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어요.

박재홍 민변에서 8년을 지내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을 꼽으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동화 아무래도 광우병 고시무효 헌법소원과 이어지는 촛불집회인 것 같아요. 민변차원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활동일 것 같은데, 광우병 헌법소원은 정말 별다른 고민 없이 제안되었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1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여를 해주었어요. 그 와중에 서버도 몇 번이나 다운되고, 시민들이 사무국으로 문의하는 내용에 답변을 주면 바로 다음 아고라에서 Top으로 논의되고.. 조금 무섭더라고요. 그리고 2박3일간 20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밤낮으로 도장작업을 했던, 지금 생각하면 조금 기이한 현상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리고 헌법소원 이후 매일 밤 이어진 촛불집회, 정말 많은 민변 회원들과 함께 노란색 인권침해감시조끼를 입고 광화문과 종로를 누볐던 기억이 나요. 거의 한달 이상을 거리에서 시민들과 함께 했었던 정말 가슴 뜨거웠던 기억인 것 같아요.

안혜성 현재 회원팀장을 맡고 계신 걸로 아는데 1,000명이 넘는 민변 회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혹은 가장 인상 깊은 회원이 있을까요?

이동화 너무 난감한 질문인데요. 솔직히 너무 많은 회원 분들과 현재도 친분을 나누고 있기에 누군가를 한명 찍기가 너무 어렵구요. 다만 가장 가슴이 아팠던 회원은 같은 상근자이기도 했던 故 어중선 간사입니다. 같이 근무하면서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저를 많이 따랐고 저도 늘 마음이 갔던 동생 같은 녀석이었어요. 뜻한 바 있어 귀농을 했는데 몇 개월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죽기 1주일 전에 저희 집에서 진탕 술을 먹고 같이 곯아 떨어졌는데 그 다음 주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안혜성 자원활동가 1기부터 쭉 지켜봐 오셨을 텐데 간사님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원활동가의 상은 어떤 것인가요?

이동화 무엇보다 민변의 자원활동가(이전 인턴)분들은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을 민변에 쏟아주시는 분들이기에 기본적으로 훌륭하신 분들이고, 반면에 민변이 조직적으로 그 분들의 노력과 활동에 비하여 제대로 된 평가와 인정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분들에게 무언가를 더 바라는 건 조금 죄송스러운 기분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생각하는 자원활동가의 상은 자원 활동하는 그 기간 동안은 민변에 한 번 깊이 빠져드는 그런 자원활동가인 것 같아요. 민변은 정말 다양하고 많은 활동을 하잖아요. 저도 잘 모르는 부분이 있을 정도이기에, 많이 경험하고 체험하려 노력하는 자원활동가면 더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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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성 민변은 변호사 단체인데요. 변호사가 아닌 활동가로서 생활하면서 한계를 느끼신 점 혹은 불편한 점은 없으셨나요?

이동화 이거 얘기 잘해야겠네.(웃음) 활동가는 기본적으로 organizing(조직)과 coordinating을 담당해야 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물론 전문성도 필요한 거죠. organizing을 하고 coordinating을 하는 것에 있어서는 다른 단체와 별반 차이점이 있지는 않아요. 어디에서 활동하던 회원들의 활동을 끌어내고 행사를 조직하는 역할은 비슷합니다. 법률 전문가 단체에서 법률 전문가가 아닌 상태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어려운 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비전과 연관이 된다면 사실을 활동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민변 활동의 한계로 작용하지는 않아요. 민변이 변호사 협회거나 학술단체이면 법률에 대해 전문성이 없는 우리가 비전을 갖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민변은 인권단체이고 운동단체이기 때문에 그 활동의 대상은 변호사가 아니라 피해 받는 일반, 다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민변에 있으면서 순간 순간 어려운 점을 겪기도 했지만, 내가 많이 부족해서 제대로 안 된 거지 내가 변호사가 아니기 때문에 안 됐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아요.

게다가 민변의 활동은 굉장히 다양해요,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해도 기자회견, 토론회, 집회 내부 행사, 시위 선전, 기고, 면담 등이 있네요. 상근자들이 잘 해야 되는 것들은 1000명을 넘는 회원 분들의 역량을 끄집어내는 영역이죠. 저는 회원 분들의 힘들을 끌어내는 일, 그것이 조직 내 활동가가 가져야 할 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박재홍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에 계시다가 한국에 들어오셨고, 민변으로 들어와서 활동을 하게 되셨는데요. 그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2007년 이후로 지금까지 하고 계시는 일, 그리고 그것이 중동지역에서 겪으신 일들과 어떤 맥락에서 이어지는 것인지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기본적으로 단체로 일하는 활동가이기 때문에 그 정체성 측면에서 이전 활동들이 다 민변 활동의 밑거름이 되죠. 민변은 2008년 이후로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됩니다. 특히 시민들과 만나고 하면서 촛불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그 틈에서 밀알이 되었던 것 같아요. 잇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저는 스스로가 행사를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일부러 일을 만들기도 했고, 열심히 했었어요. 민변의 국제연대위 소속으로서 연대활동을 하면서 제 활동, 활동의 정당성 등을 보장받을 수 있었구요,

또 운동이라는 것들이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이 중심에 있지만, 사실 그것들만 볼 수는 없어요. 아시아 지역에도 다양한 문제점이 있어요. 예를 들어 필리핀에서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했다고 길거리에서 총에 맞아 죽기도 하고요. 말레이시아에서는 승려들이 기름 값 올랐다고 시위하다가 총 맞아 죽었습니다. 티벳과 같은 경우는 중국과 종교적으로 달라 중국에 독립을 요청했는데, 또 총을 맞는 거죠. 이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 정말 많은 인권침해 사례이 있어요. 이러한 사례들로 제 시야가 넓어지면서 이러한 일들에 대해 회원들과 함께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시아 인권 팀도 생겼고요. 한국 내에 있는 해외 대상 단체들과 연계해서 일하는 것도 시작되었습니다. 필리핀 연대, 버마 연대 등등 말이죠.

박재홍 활동가로 한 단체에서 10년 가까이 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상근활동가로서 반복되는 업무에 지칠 때도 있었을 텐데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가요?

이동화 언젠가 아내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도 있지만 저는 민변과 잘 맞는 거 같아요. 위원회 내에서 많이 배우기도 하고 제 활동에 대한 인정과 배려도 있고, 사무처 일도 보람 있고, 특히 제가 활동한 시기가 대체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겹치기 때문에 민변이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했고, 하고 있거든요. 그 활동의 어느 지점에 저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면 활동가로서 만족도 있고요. 결국은 민변에서 좋은 사람들 만나서 지금까지 즐겁게 활동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안혜성 2014년 안식월을 가지셔서 팔레스타인에 가신 것으로 아는데, 그 이야기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이동화 아, 이 얘기 해야겠네요. 민변은 7~8년을 근무하면 3개월간 유급 안식월을 주는 제도가 있습니다. 아주 감사하고 좋은 제도에요. (웃음) 저는 언제부터인가 셀림이라는 말을 쓰기가 많이 창피해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너무나 고통 받고 잇는데, 지금 나는 내 안위를 위해서 너무 편한 활동만 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미안한 생각 이 커졌기 때문이에요.그래서 민변에서 7년 딱 있다가 생각한 것은 다시 현장을 가보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안식월에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향했습니다.

예전과 달리 그 당시에는 현지에 ISM이라는 국제 활동가들이 가입해서 자원 활동하는 단체가 있는데요. 물론 저도 가입을 했고요.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을 막는 활동, 장벽 반대 활동을 했었고 또 야간 공습이 있으면 그걸 카메라로 찍는 활동 등을 했어요. 당연히 활동 중에 죽는 사람들도 여럿이고요.

현장은 늘 그런 것 같아요. 예전처럼 울컥하는 느낌도 있지만, ‘어쨌든 제 평생 안고 갈 주제인데… ’ 라는 생각도 들고. 거기 있는 사람들도 또 다 굳건하게 일상을 살아내고 있거든요.

박재홍 지금 카톡 프로필을 보니 ‘다시 그 길 위를 걷다’라는 상태 메시지를 설정해 두셨네요. 살아오신 길과 관련하여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동화 카카오톡까지 보시다니, 무슨 제 뒷조사 하시나요? (웃음) 이라크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으면서, 이 얽힌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낼까 계속적으로 고민해왔었어요. 결론은 이건 내가 평생 가면서 풀어내야 할 문제, 평생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평생 활동을 하려고 해요. 거기에 있어서 민변 활동들이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지만 자칫 하다간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다시 팔레스타인을 다녀오면서 그게 명확해졌던 것 같아요. 나는 혼자 울컥했다가 가라앉았다가 오르막 내리막을 겪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평생을 계속 거기서 살아내고 있더라고요. 그 때 든 생각이에요. 이제는 그 간격을 좁혀서 길을 나아가야겠다는 거에요. 또 중요한 것은 나는 비록 갈지자로 가고 있다고 느끼곤 있지만 어쨌든 나도 이 길을 가고 있다는 거. 지금 당장 내가 현장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고요. 예전만큼 예봉이 날카롭진 않더라도, 운동이 제 평생의 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안혜성 지금 가정도 있으신데, 이번에 다시 팔레스타인에 들어가실 때 아내 분의 반대 등은 없었나요? 저희가 알기로 아내 분이 참여연대 활동가시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이해를 많이 해주는 편인가요?

이동화 와이프가 제 걱정을 가장 많이 하죠. 와이프랑 함께 살아오면서 서로의 길과 꿈에 대한 인정과 이해가 있어 왔다는 생각을 해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고 이해를 해주지 않았나 합니다. 물론 약간의 뻥도 쳤죠. 안 위험하다고. 그런데 가자마자 폭격이. (웃음)

김서영 아내 자랑 좀 해주세요!

이동화 참여연대가 민변보다 훨씬 힘든 곳이에요. 내부의 날선 비판도 많고요. 무언가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문화가 있죠. 그런데도 아내는 10년 이상 버텨온 저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전형적인 외유내강 형이라고 보면 돼요. 사실 저랑 살기로 한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모험이었을 거에요. (웃음) 늘 고맙고요. 이쁘고 사랑스럽고 착한 사람이죠. 현명하고…

김서영 두 분은 어떻게 만나신 건가요?

이동화 소개팅이요. (웃음) 절박했죠.

김서영 술을 엄청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주량은 얼마나 되시나요?

이동화 편차가 크긴 한데, 굳이 말하자면 소주 2병정도인 것 같네요.

박재홍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 보면 대부분 사람을 좋아하더라고요. (웃음) 이라크 복구사업 당시 그 곳에 홀로 남았을 때도 아이들이 좋아서 그랬다고 하셨고. 인터뷰를 하면서 간사님께서 매우 일관된 삶을 살아오셨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동화 저는 사람 각자가 주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만났던 이라크,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른 것을 생각하기 힘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어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조건 속에서도 정말 평화롭게 살거든요. 제가 처음에 이라크에 있던 7개월 동안은 제가 살았던 시간 중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어요. 역설적으로 너무 좋았다. 그들 속에 마약과 같은 느낌이 있었고요. 그들과 떨어지니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방황도 했던 거죠.

거기는 돈 많고 힘 있는 것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곳입니다, 전기도 없고, 시장, 학교 가려면 목숨 걸어야 될 때도 있고요. 폭탄이 어디서 터질지 모르니까요. 그럼에도 가족끼리, 마을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선 다들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은 정말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제가 살면서 뭘 하고 있더라도 그걸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아요. 그들과 함께 있든 그렇지 않든 저는 항상 그곳을 생각하고 있을 거에요.

김서영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먼저 활동을 하셨던 선배님으로서 로스쿨을 꿈꾸는 사람들이나 활동가 지망생들, 혹은 저희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어떤 걸까요?

이동화 진짜 현장운동을 많이 하신 선배님들도 많아 제가 선배로 이야기하는 건 적절치 않고, 함께 활동하는 측면에서 이야기 하자면, 나중에 활동가가 되건 법률가가 되건 끊임없이 눈과 귀는 현장에 두라는 거죠, 한국이든 팔레스타인이건 이라크건, 제가 갔고 봤고 들었기 때문에 알 수 있던 문제들이었어요. 사람은 자기 주변을 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본인을 현장에 둬야할 필요성이 있는 거죠. 국회 앞에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농성을 해요. 그럼 가서 봐야죠. 기자회견을 한다, 농성을 한다, 가서 직접 보고 이야기를 들어봐야죠. 여러분이 나중에 변호사가 될 수도, 기자가 될 수도, 사업을 할 수도 있을 거예요. 다만 민변을 거쳐 가며 얻어야 할 것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대단히 많은 차원이 얽힌 채 존재합니다. 현장과 함께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느끼려고 하는 것이 그래서 필요한 거죠. 신념과 열정만 가지고서는 알 수 없는 차원들이 있어요. 끊임없는 자극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함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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