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 제정을 촉구한다

2003-09-22

아래는, 2003. 9. 8. 민변 명의로 발표한 성명서 전문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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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이 국적포기를 선언하였다. 일제 치하에서 강제 동원된 피해자들은 산업현장과 전쟁터에 끌려가 총알받이가 되고, 성노예가 되고, 혹독한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억압을 받았다. 이들은 나라 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겪어 보았기 때문에 “국적”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광복절에 즈음하여 스스로 대한민국 국민이기를 포기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물론 이들의 선언만으로 법률상 국적포기의 효과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법률적인 효과를 떠나서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의 근거가 되는 “국적”을 포기하려고 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국적을 포기하는 선언까지 하게 만들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우리나라 정부와 국회는 19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 이후 지금까지 일제치하에서 우리 국민들이 입은 피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에 피해자들과 그 유족들은 일제치하에서 우리 국민이 입은 피해의 실태, 피해자가 처해있는 현재의 상황, 그리고 전쟁에 의해 동원되어 지금까지 해외에 잔류하고 있는 위안부를 비롯한 한국인 피해자들 현황 등을 보다 명확하게 규명하기 위하여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마침내 2001년 10월 김원웅 의원 외 67명 국회의원이 위 특별법안을 국회에 발의하였다.

위 법안은 일제 강점하 강제 동원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평화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고령으로 인해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는 상황에서도 이들은 각자의 이해관계를 떠나, 진상규명만이라도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특별법 제정에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의원들의 무관심 속에 위 법안은 2년이 다 되도록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국가가 일제 치하에서 국민들이 입은 피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마저도 마냥 미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대한민국 국민이기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50만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일제가 저지른 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어 갖은 고통을 겪었다. 이러한 피해의 심각성에 비해 정부와 국회의 대응은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무책임하다. 일제치하의 피해사실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부끄럽고 왜곡된 역사를 청산하고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며,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임무이기도 하다.
혹시 정부와 국회는 피해자와 유족들이 모두 고령이 되어 세상을 떠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여 안이한 대응을 하는 것은 아닌가 묻고 싶다. 일제치하의 피해진상규명 작업은 피해자와 유족, 증인들의 고령화로 인하여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이다. 우리는 정부와 국회가 지금이라도 피해자 및 유족들의 국적포기선언이 가지는 절박한 의미를 깨닫고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 및 과거청산 관련 법률을 즉시 제정할 것을 촉구한다.

2003. 9. 8.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 최병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