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경계도시2> 관람 후기

2010-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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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에서는 3월19일(금) 저녁, 다큐멘터리 <경계도시2>를 단체관람했습니다. 송두율 교수 사건과 이 사건에 비친 한국 사회의 모습을 7년 만에 다시 떠올리며, 영화 관람을 마친 후에도 민변에서는 오래도록 <경계도시2>가 화제에 올랐습니다. 영화는 당시의 ‘광기’와도 같았던 당시 상황을 차분히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변의 김주성 인턴과, 주인호 인턴이 영화를 보고 쓴 감상문을 게재합니다.







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준 영화 「경계도시」



 영화 관람에 임하던 때에, 남북관계에 대한 나의 인식은 하찮을 정도였다 – 남과 북이 대치하는 정전상태라는 점, 북한은 반국가단체인 동시에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을 동반자라는 것만이 관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러한 바탕으로 ‘경계인 송두율’을 이해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었던 것 아닐까. 해당 사건이 벌어질 당시에도 이러했으니, 이는 작가가 말한 레드컴플렉스의 인자를 통해서만 사건을 보았던 것이다.



 <경계도시2>는 <경계도시1>의 뒤를 이어, 본격적으로 송두율 교수 귀국과 국정원의 수사와 공소제기, 그리고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한 재판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영화는 법리적인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영화가 조명하려한 것은, ‘거대 언론과 여론’ 그리고 ‘송두율 개인과 진보집단과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첫 번째 점과 관련해서 영화는, 송 교수의 귀국 이후 여론 변화의 추이를 기간별로 나누어가며 설명한다. 그리고 여론이 급작스레 변하는 지점에서는, 한국 사회의 레드컴플렉스가 절정에 다다랐다고 말하며, 감독 그 자신도 함께 혼란스러워한다. 이러한 여론의 악화는 송 교수가 김철수(노동당 간부)라는 이름으로 북한에 입국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부터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보수진영에서의 공격은 살기를 띤다. 그에 대해 진보진영은, 송 교수가 북한 체제의 신봉자가 아니며 국가보안법이 위헌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관용을 요청하는 말로 대응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아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 심지어 그의 귀국을 도왔던 사람조차 ‘하나의 선택’을 강요한다. 남한이냐 북한이냐, 남한사회의 법질서냐 강제출국이냐, 이것은 결국 송 교수에게 ‘경계인이기를 포기하라’는 의미였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송 교수에게 훈계 두기를 좋아했다’라는 말에도 잘 묻어난다.

 감독은 이를 레드컴플렉스로 정의한다. 극한의 지점에 다다랐을 때에 북한은 우리의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가 될 수 없다. 그들은 반국가단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노동당의 입당은 반국가단체의 가입에 지나지 않는다. 끊임없는 이분법이 낳는 순환의 고리에서 송 교수는 말한다.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이다.


 
다음은 송두율 개인과 집단의 충돌 문제인데, 이는 송 교수가 마지막 기자회견을 하기 전날 밤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총선도 얼마 남지 않았고 진보진영의 총체적인 위기가 왔으니, 집단을 위해 경계인이기를 포기하라고 윽박지르는 사람들…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리(公利)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송두율이라는 개인을 희생하여 진보진영이라는 집단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면, 진보 측에서는 그걸로 좋은 것이다.

 그런데 ‘진보(進步)’란 무엇인가? 집단 전체의 이익인 공리만을 중시하는 자들을 모아 진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집단의 구성원인 각 개인의 소중함을 알기에,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진보 세력은 뭉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송두율 교수의 희생-그가 평생에 걸쳐 쌓아온 신념의 희생, 학자적 양심의 희생-은 진보적 가치에서 볼 때 합당한 것인가? 아니, 적어도 숭고해질 수는 있는가?

답은 명확하다고 생각하기에, 착잡해졌다.



글 / 김주성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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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짐을 강요받은 경계인, 무너짐을 강요한 경계도시
 




경계인, 그가 왔다.


  2003년, 37년 만에 송두율은 부인과 함께 귀국한다. 군사 독재 시기, 독일에서 유학하던 그는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다가 반체제인사로 낙인찍혀 귀국하지 못했다. 이후, 남과 북의 화해를 위해, 민족을 위해 ‘경계인’으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민주화를 말했던 그로서는 적대적 공범인 박정희와 김일성 둘 중 어느 것이든 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경계인을 남에서는 받아주지 않았지만 북에서는 받아주었다. 그래서 한, 두 차례 북한에 방문한다. 이 사실이 소위 민주사회라는 대한민국에서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줄이야.


  근 40년 만에 귀국을 결정한 그에게, 법원은 체포영장을 발부했고,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최대 거물간첩’이 한국에 왔다며 정치인, 언론 할 것 없이 포문을 열었다. 그가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고, 남과 북의 평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모두 잊어버리고 ‘노동당 정치국 후보 김철수’라는 것에 집착하며 그를 절벽 끝으로 밀어갔다.





강요되었던, 경계인의 무너짐


  애당초, 송두율의 귀국을 추진했던 것은 국내 민주화 운동 세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수사와 언론의 압박, 여론의 악화라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송두율을 또 다른 방향에서 압박했다. ‘대국을 위해 한발 물러서자. 진정으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테크니컬’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전술적인 측면으로 이해하자. 수비를 하다가도 공격으로 치고나갈 수 있는 것 아니냐.‘라는 말에서부터, 선거 국면이라는 측면을 이해해달라며 마치 송두율이 사과하지 않고, 전향선언하지 않기 때문에 소위 ’진보 진영‘의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다는 뉘앙스로 까지 이야기한다. 심지어는 ’어떻게 대오를 생각하지 않고 개인만 생각하느냐.‘라며 화를 내기도 한다. 송두율은 결국 자신이 살아온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정면에서 부인하는 기자회견을 한다. 그를 켜켜이 둘러싸고 있던 이들(언론, 정치인, 소위 ’그의 친구들‘)에게 백기투항한 것이다. ’전체‘ 앞에 ’개인‘이 항복한 것이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송두율이 사실상의 전향선언을 하기 전날 그의 숙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기자회견 장면까지, 즉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을 보며 나는 불편하고 불쾌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엠마 골드만이 말했고, 한국에서 출판된 책의 제목으로도 사용되었던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혁명도 운동도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모든 과정, 나의 역사를 부정하고, 나를 부정한 뒤에 얻어진 공간, 그곳에서 무슨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미 나를 버렸는데 말이다.





죽지 않은 국가보안법



  또 하나, 이 영화가 다시 한 번 제기하는 것은 국가보안법에 대한 이야기이다. 수년 전 국가보안법 철폐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했을 때, 국가보안법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이미 사문화된 법안을 끌어안고 갈 필요가 없다.’ 하지만 ‘경계도시 2’에서 보듯, 국가보안법은 죽지 않았다. 여전히 국가보안법 상 찬양고무, 이적단체 구성 등의 이유로 수사를 받고 처벌받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우리 속의 레드 컴플렉스는 살아있다. 동계올림픽에서 보듯, 국가주의도 우리 속에 버젓이 살아있다. 이미 죽은 법이기 때문에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을 반드시 치워내야 한다.




     글 / 주인호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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