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행 후기] 드디어 지리산 주능선 종주

2009-06-11


* 지리산을 찾은 지 네 번째


대한민국에서 산을 올라갔다고 말하려면, 극기의 체험을 했다고 말하려면, 산세(山勢)의 웅장함을 맛보았다고 말하려면 반드시 갔다 와야 하는 코스가 바로 지리산 종주다. 벼르고 벼르던 지리산 주능선 종주를 이제야 다녀왔다.


지리산은 네 번째다. 첫 번째는 사법시험 2차를 보고 결과를 기다리던 1985년 가을이다. 대학 선배 2명과 함께 2박 3일 일정으로 뱀사골(골짜기가 뱀처럼 심하게 곡류한 데서 비롯된 이름)에서 시작해서 천왕봉에 오른 후 중산리로 내려오는 코스를 선택했다. 당시는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것이 가능했기에 야영하였다. 그런데 둘째 날 비가 많이 와서 야영하는 것이 마땅치 않아 중산리까지 내려와 버렸다.


두 번째는 2008년 7월에 무박 종주에 따라갔다. 아내도 같이 갔는데, 연하천대피소에서 아침을 먹은 후 아내의 무릎에 이상이 와서 1시간 반이면 갈수 있는 벽소령대피소를 2시간 반 만에 갔고, 결국 제1탈출로라 할 수 있는 벽소령에서 삼정마을로 내려왔다. 택시를 불러 중산리로 가서 버스에 탑승했다.


세 번째는 2008년 11월 22일 무박으로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올라 백무동(百巫洞, 백 명의 무당이 살았다는 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에 참여했다. 운 좋게도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을 완벽하게 보았다.


그리고 네 번째 만에 주능선 종주를 하게 된 것이다. 사실 무릎이 좋지 않아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 마지막 몇 시간은 왼쪽 무릎의 통증으로 굽히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어쨌든 종주에 성공했다. 유명산우회 팀에 합류했다.



*다양하게 구성된 멤버


애초에 종주산행은 서어(瑞語)팀에서 기획했다. 민변에서 같이 할 사람들을 알아봤다. 의외로 지리산종주를 해야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처음 본 변호사에게 같이 가자고 권유했더니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면서 바로 승낙했다.


중간에 변화가 있기도 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최종 확정된 인원은 13명이었다. 당일에 한 명이 긴급한 일 때문에 불참해서 같이 출발한 인원은 12명이다. 지리산 종주를 몇 번 해본 사람은 1명이고, 나를 비롯해서 나머지는 모두 첫 번째 종주다.


전체 사진을 산에서 찍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돌아오는 길에 신탄진휴게소에서 단체 증명사진을 찍었다. 한 명이 몸 상태에 문제가 있어 벽소령대피소에서 자고 하동으로 가서 먼저 서울로 올라오는 바람에 전체 사진에서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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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코스


양재동(22:20) → 반선(조식, 02:00) → 성삼재(姓三峙, 03:20) → (2.5㎞) → 노고단(老姑壇, 04:00) → 돼지령 → (4㎞) → 임걸령(林傑嶺, 05:19) → (2㎞) → 노루목(05:50) → {반야봉(般若峰)} → (2㎞) → 삼도봉(三道峰, 06:14) → (2㎞) → 화개재(6:30) → 토끼봉 → (4㎞) → 명선봉(明善峰, 총각샘) → 연하천(煙霞泉)대피소(09:00, 식사) → 삼각고지 → 형제봉(兄弟峰, 10:40) → (6㎞) → 벽소령(碧宵嶺)대피소(11:25) → 덕평봉(德平峰, 선비샘, 12:45) → 칠선봉(七仙峰, 13:55) → 영신봉(靈神峰, 14:50) → (6.3㎞) → 세석평전(細石平田, 15:20) → (3.5㎞) → 촛대봉(16:55) → 삼신봉(三神峰) → 연하봉(煙霞峰, 18:15) → 소일출봉(05:00) → (3.4㎞) → 장터목대피소(18:50, 숙박) → 출발(04:00) → 제석봉(帝釋峰) → 통천문(通天門, 04:49) → (1.7㎞) → 천왕봉(天王峰, 05:15) → 중봉(中峰, 05:55) → 써리봉(07:00) → (4.8㎞) → 치밭목대피소(08:00) → 무제치기폭포(09:15) → (1.8㎞) → 갈림길 → 한판골 → (4.4㎞) → 유평리(油坪里, 12:15) → 버스 탑승(14:30) → 양재동(18:40)



*지리산 종주코스


성삼재에서 천왕봉까지 25.5㎞의 주능선이고, 천왕봉에서 대원사까지는 11.7㎞, 합계 37.2㎞의 대장정이다. 유평리에서 끝냈으므로 35.7㎞를 걸은 것이다.


성삼재까지 도로가 난 1988년 이전에는 구례 화엄사에서 종주를 시작했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는 7.0㎞의 거리에 오르는 시간이 4시간으로 소개되어 있다.


한편 지리산 태극종주는 성삼재 이전에 인월-덕두봉-바래봉-팔랑치-부운치-세동치-세걸산-고리봉-정령치휴게소-만복대-묘봉치-작은고리봉-성삼재의 24㎞ 구간이 추가되고, 중봉 이후에 천왕봉-중봉-하봉-국골사거리-청미당고개-쑥밭재-새재-서왕등재-동왕등재-도토리봉-밤머리재-853봉-웅석봉(熊石峰)-어천․청계고개의 26㎞구간이 추가되어 장장 75.5㎞에 이르는 대구간이다.


주능선 종주코스는 태극종주코스의 절반이다. 군대생활을 할 때 유격훈련 끝나고 100㎞를 24시간에 주파는 행군도 몇 번 했었는데, 지금은 불가능하겠지?



*지리산(智異山)의 의미


지리산(智異山)은 말 그대로 풀면 “지혜로운 이인(異人)의 산”이다. 신라 5악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롭게 달라진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많은 은자(隱者)들이 도를 닦으며 정진하여 왔으며, 골짜기에 꼭꼭 숨어든 은자가 그 수를 추정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멀리 백두대간이 흘러왔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옛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으로도 알려져 있다. 남해바다에 이르기 전 잠시 멈추었다 해서 두류산(頭留山)으로 적기도 한다. 지리산의 전체적인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고 두루뭉술하며 또 사방으로 산들이 첩첩이 둘러 있기 때문에 이를 뜻하는 순수 우리말 ‘두루’, ‘두리’, ‘둘러’가 한자로 표기, 정착되는 과정에서 ‘두류’로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원래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지(智)’자와 ‘리(利)’자를 따와 지리산이었다고도 한다. 여기서 무수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갖가지 다른 몸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지혜로운 이인이 많이 계시는 산’이란 뜻으로 지리산으로 적는다고 한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민족적 숭앙을 받아 온 민족 신앙의 영지(靈地)였다. 지리산의 영봉인 천왕봉에는 1,000여 년 전에 성모사란 사당이 세워져 성모석상이 봉안되었으며, 노고단에는 신라시대부터 선도성모를 모시는 남악사가 있었다. 반야봉, 종석대, 영신대, 노고단과 같은 이름들도 신앙을 상징한다.



*지리산의 개요


지리산은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 등 3개 도와 1개 시, 4개 군, 15개 읍․면에 걸쳐 있다. 1967년 12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총면적은 472㎢이고, 둘레는 320㎞이다. 천왕봉, 반야봉, 노고단이 3대 주봉이고, 해발 15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 개 있다.


계곡도 20여 개가 있는데 동쪽의 칠선계곡, 한신계곡, 대원사계곡과 서쪽의 피아골, 뱀사골, 심원계곡이 특히 유명하다. 특히 칠선계곡은 한라산 탐라계곡, 설악산 천불동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 중의 하나다. 지금은 출입통제이고, 별도로 허가를 얻어야만 갈 수 있는 난(難)코스로 알려져 있다.


지리산에서 자라는 식물은 137과 536속 1500여 종인데, 지리산에서만 자라거나 지리산에서 발견된 종에 ‘지리’ 혹은 ‘지리산’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다. 지리대극, 지리대사초, 지리괴불나무, 지리산싸리, 지리산하늘말나리, 지리개별꽃, 지리고들빼기, 지리오리방풀, 지리바꽃, 지리말발도리, 지리터리풀 등등


지리산은 10경으로 유명하다. 제1경 천왕일출(天王日出), 제2경 노고운해(老姑雲海), 제3경 반야낙조(般若落照), 제4경 직전단풍(稷田丹楓), 제5경 벽소명월(碧宵明月), 제6경 세석철쭉(細石철쭉), 제7경 불일현폭(佛日懸瀑), 제8경 연하선경(煙霞仙境), 제9경 칠선계곡(七仙溪谷), 제10경 섬진청류(蟾津淸流)가 그것이다. 지리 10경 중 무엇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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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의 지리산 산행


지리산은 일찍부터 문인들이 즐겨 찾았고 기행문을 남기고 있다. 조선 초기 김종직(金宗直)이 『유두유산록(遊頭游山錄)』을 지은 이래, 남효온(南孝溫)이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를, 김일손(金馹孫)이 『속두류록(續頭流錄)』을,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다.


주세붕(周世鵬)은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에서 선비가 즐겨 찾는 이유로 지리산의 웅축(雄畜), 금강산의 청절(淸絶), 박연폭포와 가야산의 기승(奇勝), 청량산의 단엄상개(端嚴爽价, 단정하고 엄숙하며 시원하고 크다)를 꼽았다. 지리산은 함축미(含蓄美)로 선비들의 발길을 끌었다는 해석이다.


남명은 지리산 자락에 거처하면서 지리산을 여러 번 찾았다. 『유두류록(遊頭流錄)』은 명종 13년(1558년) 4월에 열흘 정도 지리산 유람을 마치고 쓴 기행문이다.



*설렘을 안고


새로운 산행을 하기 전에는 항상 설렌다. 생애 처음 하는 지리산종주이니 설레지 않을 수 있겠는가? 특히나 작년 7월에 무박종주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코스니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금요일 저녁 10시 20분 양재동 서초구민회관 앞에서 버스에 탑승했다. 한 명씩 두 명씩 끔직한 배낭을 멘 일행들이 속속 도착했다. 다들 나와 같이 설렘 반 걱정 반의 표정들이다. 거기서 고대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인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대학 후배를 만났다. 다른 일행과 함께 종주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뱀사골 입구인 반선에 02:00경 도착했다. 된장찌개로 식사를 했다. 산행 도중의 식사는 라면이나 햇반을 준비해서 각자 해결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삼 만원을 부담해서 네 끼 식사를 제공받는 옵션을 선택했다. 아침은 반선 식당에서 제공받고, 그 식당에서 토요일 도시락을 받으며, 세석대피소에서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 도시락을 추진받는 것이다. 도시락 자체는 훌륭하다고 할 수 없지만, 별도로 음식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리고 식당에서 세석대피소까지 가져다 줘야 하기 때문에 비용은 감당할 만하다.



*헤드랜턴을 끼고 임걸령까지


아침을 먹은 후 버스가 우리를 성삼재에 내려놓은 시간은 3시 20분쯤. 칠흑 같은 어둠이다. 성삼재는 어둠 속에서만 지나게 된다. 노고단, 돼지령도 마찬가지다. 임걸령에 가서야 날이 밝기 시작했다.


성삼재(姓三峙, 1090m)는 성이 다른 세 명의 장수가 방어했던 곳이라는 의미다. 마한의 어느 왕이 진한의 난리를 피해 지리산에 숨어 있으면서 각 능선마다 장수를 파견해 지키게 했다. 정령치(鄭嶺峙)는 정씨 성을 가진 장군이 지킨 능선이고, 황령치(黃嶺峙)는 황씨 성을 가진 장군이 지킨 능선이며, 팔랑치(八郞峙)는 여덟 명의 병사가 수비한 능선이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는 산행로가 넓고 잘 정비되어 있다. 왼 쪽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 선배는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 좌우에 함박꽃나무가 많다고 했다. 헤드랜턴에 황벽나무가 팻말이 보였다. 황벽나무를 만나면 안아보지 않을 수 없다. 나무껍질도 푹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감촉을 못 보지 않고 그냥 지날 수가 없다.


노고단(老姑壇, 1507m)은 ‘늙은 시어머니를 위한 제사 터’라는 의미며, ‘할미단’이라고도 한다. 노(老)는 존칭의 의미이고, 고(姑)는 인류 최초의 인간을 탄생시킨 여인을 의미하는 마고(麻姑)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마고할매를 위한 제사 터’로 해석하기도 한다.


노고운해는 지리10경 중 제2경이나, 깜깜한 밤에 지나니 볼 수 있기를 기대조차 할 수 없다. 정상도 오르지 못하고 어둠속에서 방향만 짐작하고 지났다.


돼지령(1380m) 또는 돼지평전(平田)은 멧돼지가 자주 출몰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어둠 속에 지나면서 어디가 돼지령인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지났다. 멧돼지를 보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임걸령((林傑嶺, 1320m)은 조선 선조 때의 의적 임걸년(林傑年)의 본거지였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작년 7월에 왔을 때도 여기에 이르러 날이 밝았었다. 당시는 둥근이질풀, 동자꽃 등이 무성하게 피었었는데, 지금은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꽃이 없다.


어둠에서 새벽으로 바뀌는 그 시점. 그 시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야간산행을 하게 된다. 아무리 집중하고 신경을 써도 그 시점을 잡아낼 수가 없다.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이르다.”고 하면서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 경계지점을 지나버린다.


날이 밝아오는 것은 새들이 먼저 알려주었다. 아직 어두운데 다양한 종류의 새들이 저마다 청아한 소리로 울었다. 새들이 자연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새들도 다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을 불러주지 못하고 그저 새가 울었다고만 표현해야 하는 것이 답답하다.


환하게 밝아오면서 모습을 드러낸 지리산. 굽이굽이 펼쳐진 산세가 입을 벌어지게 한다. 웅축(雄蓄)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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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찍지 못하고 고속도로 신탄진휴게소에서 찍었다. 한 명은 먼저 서울로 올라갔다.>


*말이 씨가 되어 내리기 시작한 비


날이 완전히 밝았다. 구름이 잔뜩 끼었다. 해를 볼 수가 없다. 산 중턱에 구름이 걸려 있기도 하고, 안개도 잔뜩 끼었다. 그래도 다행이 비는 오지 않아서 산행하기에는 비교적 좋은 날씨였다.


그런데 한 총장이 초장부터 힘든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 했다. “비가 오지 않는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말이 씨가 되었나? 우비를 꺼내 입고, 배낭커버를 씌웠다.


임걸령에서 30분 정도 가면 노루목(1500m)이다. 노루를 몰아넣는 주둥이처럼 잘록한 지형이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지형이 노루목을 닮아서, 또는 노루가 다니는 길이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노루목이라는 이름은 전국의 산 여러 곳에 붙어 있다.


노루목에서 반야봉(般若峰, 1732m)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반야봉은 지리산 3대 주봉 중 하나로 반야낙조는 지리10경 중 제3경이다. 반야는 산스크리트어 ‘프라냐(prajna)’를 음역한 것으로 ‘절대 변하지 않는 완전한 지혜’를 의미한다. 반야봉은 지혜를 얻는 봉우리란 의미다. 어느 쪽에서든 멀리서 보면 ‘아기 궁둥이’(혹자는 ‘여자 궁둥이’라고 한다)를 닮았다. 산의 곡선미가 우아하고 여성스럽다. 천왕봉의 마고할매가 반야도사와 결혼하였는데, 반야도사가 반야봉으로 가서 도를 닦고 마고할매를 찾아 되돌아오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갈 길이 바쁜 우리로서는 반야봉에 들를 여유가 없다. 다음에 오르기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삼도봉과 화개재


노루목에서 조금 가다보면 삼도봉(三道峰, 1499m)이 나온다. 경남, 전북, 전남 3도의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이기 때문에 삼도봉이다. 민주지산에도 삼도봉이 있는데, 거기는 전북․충북․경북의 삼도가 만난다. 과거에는 봉우리 정상 부분의 바위가 낫의 날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 ‘낫날봉’으로 불리다가 ‘날라리봉’으로 바뀌었다. 삼도봉에서는 불무장등 능선과 피아골이 내려다보이고 건너편에 토끼봉이 복스럽게 걸려있다. 우리가 온 길 쪽을 뒤돌아보면 저 멀리 노고단이 높게 내려다보고 있다.


삼도봉에서 15분 정도 가면 화개재(花開峙, 1320m)에 닿는다. 화개재는 옛날 하동의 화개장터와 남원의 산내장터 봇짐장수들이 물물교환을 했던 고갯마루이다. 화개재에서 북쪽으로 200여 미터 내려가면 뱀사골대피소가 있다.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나무와 꽃


화개재 이후 나무와 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철쭉이 꽃을 피웠다. 지대가 높기 때문인지 철쭉이 이제야 제 철이다. 산행로 좌우로 병꽃나무가 꽃들을 달고 있다.


사슴의 녹각처럼 줄기가 매끈하여 녹각나무라고 하다가 변한 이름의 노각나무는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나무 한 그루가 부러져 넘어지면서 살아있는 다른 나무의 줄기에 기댔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살아있는 나무줄기가 넘어진 나무로 인해 움푹 파인 채 굵어가고 있었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야생화는 풀솜대(지장나물)이다. 흰 꽃을 달고 군락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현호색 또한 이제야 꽃을 피웠다. 얼레지는 꽃잎이 지고 열매를 달고 있다. 더 높은 지대로 가니까 꽃잎을 닫고 변색된 마지막 단계의 얼레지들도 보였다.


하나의 줄기에 2층의 돌려난 잎을 가지고 있고(밑층은 7개, 위층은 4개), 7개의 노란 꽃술이 돌려있고 가운데 암술이 있는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꽃인지? 삿갓나물이다.


개별꽃으로 보이는 자잘한 흰 꽃들을 피운 풀들이 있다. 개별꽃을 닮았는데, 뭔가 약간 다른 것 같다. 개별꽃 종류에 지리산개별꽃도 있다. 지리산꽃줄기는 큰개별꽃과 비슷하나 꽃줄기에 한두 줄의 털이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고 한다. 개별꽃과 큰개별꽃은 꽃잎이 5장인가 7장인가로 구분한다고 한다. 그러면 꽃잎이 5장인 이것은 개별꽃인 모양이다.


여러 개의 타원형 모양의 큰 잎이 땅 위에 있고, 가운데로 꽃대가 하나 솟아나 그 끝에 작은 흰 꽃이 적게는 1개에서 많게는 예닐곱 개까지 뭉쳐 피어 있는 야생화를 만났다. 청초한 기품이 한 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다. 장터목에서 만난 장 변호사도 이심전심으로 오늘의 꽃으로 꼽고 있었다. 나중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나도옥잠화이다. 꽃잎과 수술이 6개씩이다.



*오로지 간족하(看足下)


연일 마신 술기운도 남아있고, 제대로 자지 못한 피로도 풀리지 않은 탓에 화개재를 지나면서부터는 졸림과 피곤이 엄습하기 시작한다. 연하천대피소에 빨리 닿아 발을 쉬게 하고 허기를 채우고 싶은 마음뿐이다. 2시간 30분에 걸쳐 토끼봉, 명선봉 등을 지나게 되는데, 표지판도 없어서 어디가 어딘지 확인도 못하고 스쳐 지나게 된다.


토끼봉(1533.7m)은 반야봉에서 볼 때 24방위 중 정동(正東)에 해당하는 묘방(卯方)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토끼가 많이 살거나 또는 봉우리가 토끼같이 생겼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 아니다.


명선봉(明善峰, 1586.3m)은 밝은 선(善)의 봉우리라는 의미다. 직전에 총각샘이 있었으나 현재는 말라붙어 찾을 수 없다.


남명 조식 선생은 지리산을 유람하면서도 간산간수(看山看水, 산을 보고 물을 본다)만 한 것이 아니라 간인간세(看人看世,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본다)했다. 지나는 산수를 통해 과거 현인의 아름다운 행적을 보고 현재와 미래의 권력을 잡은 자들의 행실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유람하면서 간인간세하려면 사전에 많은 준비를 해야만 한다. 발걸음 옮기는 것마저 힘든 상황에서는 간인간세는 고사하고 간산간수도 무리이며 간목간화(看木看花)조차도 쉽지 않다. 오로지 무념무상으로 머리 처박고 간족하(看足下, 발밑을 보다)할 따름이다.



*연하천대피소에서 식사


선발팀이 먼저 연하천으로 앞서갔다. 연하천(烟霞泉, 1440m)은 연기와 노을의 샘이란 의미다. 연하천은 오래된 이름이 아니고 구례의 연하반산악회에서 명명한 이름이란다. 연하봉은 따로 있다. 연하천대피소는 수용인원 50명 정도라고 한다. 대피소 바로 앞에 있는 샘은 물이 풍부하다. 식수를 받기 위해 멀리 가지 않아도 괜찮아서 좋다. 피곤할 때 물 뜨러 상당한 거리를 가야 한다는 것은 곤욕이다.


우리는 반선 식당에서 점심으로 받아온 도시락을 연하천대피소에서 먹기로 했다. 나와 우리 사무실의 고 변호사는 9시경에 도착했다. 종주산행의 거의 전 구간을 고 변호사와 함께 진도를 맞췄다. 앞선 팀은 거의 1시간 전에 도착해서 라면까지 끓여 먹었다. 선발팀은 세석대피소에서 보기로 하고 먼저 떠났다. 4명이 나보다 30여분 뒤에 왔다. 라면과 도시락으로 그런대로 풍족한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면서 맞은편 산자락을 보니 흰색의 나무가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자작나무과로 고산지역에 자생하는 사스레나무다. 줄기의 흰색은 자작나무보다도 더 맑다. 종주를 하면서 자주 만나기 때문에 종주를 마칠 때는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된다. 대피소 주변에는 습지식물인 노란 꽃이 핀 동의나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 옆에 큰 하트 모양의 두꺼운 잎에 흰 꽃을 피운 풀도 뭉쳐 있다.



*쉬운 구간이 하나도 없는 지리산 코스


연하천대피소에서 벽소령대피소까지 지도상에는 1시간 20분 걸리는 것으로 나와 있다. 작년 7월에 아내와 함께 가면서 2시간 30분 걸렸었다. 그래도 무난한 코스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올라갔다 내려갔다, 바닥은 돌덩어리 너덜이어서 만만치 않다. 이 구간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지리산의 전체 종주 구간 중에 마음 놓고 편안하게 갈 수 있는 구간이 하나도 없다. 아주 짧은 흙길이라도 만나면 왜 그리 반갑던지.


연하천대피소와 벽소령대피소 중간에는 삼각봉(삼각고지)과 형제봉이 있다. 명선봉, 삼각고지, 형제봉, 벽소령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피의 능선’이라 불릴 만큼 6․25동란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고 한다.


삼각봉(三角峰, 1462m)은 연하천대피소에서 700m 떨어져 있고, 음정마을 방향의 벽소령 작전도로로 떨어지는 갈림길이 있다. 산내면, 마천면, 화개면이 만나는 지점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형제봉(兄弟峰, 1452m)은 높이 10m 가량의 두 바위봉우리가 우애 깊은 형제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옛날에 불도를 닦던 두 형제가 지리산 여인의 유혹을 받고 수도의 길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가 그만 몸이 굳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유혹에 넘어가 인간답게 살면 안 되는 것인가?


고 변호사가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벽소령 쪽으로 가면서 형제봉 근처에서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에 벽소령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물었더니 다 왔다고 했단다. 그 말만 믿고 가다가 다 지쳐버렸다는 것이다. 우리도 45분이나 걸렸다.


산행을 하면서 급한 마음에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에게 얼마나 남았냐고 묻곤 한다. 그럴 경우 사실대로 정확하게 답변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힘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쪽의 태도가 옳은가 하는 문제는 산행객들 사이에 해묵은 논쟁거리다.



*벽소령에서는 명월이 뜨는 곳만 확인하고


인고와 기다림 후에 벽소령에 닿았다. 벽소령(碧宵嶺, 1340m)은 ‘푸른 밤 고개’, 즉 달빛이 너무 희고 맑아서 푸른빛으로 보인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리10경 중 제5경이 벽소명월(碧宵明月) 또는 벽소한월(碧宵寒月, 푸른 밤 찬 달빛)이다. 역시 달은 찬 겨울 흰 눈을 배경으로 해야 제 맛이다. 대낮이니 명월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명월이 떠오르는 산봉우리만 확인했다.


벽소령대피소는 1996년 12월에 새로 지었고, 지상 2층 지하 1층 건물로 수용인원은 250명이다. 2001년 7월에 빨간 우체통을 설치하였고, 실제로 편지를 전달해준다.


다리를 좀 풀고, 물을 보충했다. 식수는 대피소 밑 약 100m 지점에 있다. 물의 양이 많았고, 식용적합이라는 안내표지가 붙어 있었다.


나에게 벽소령은 뼈아픈 추억의 장소다. 작년 7월에 종주를 포기하고 삼정마을로 내려갔던 곳이기 때문이다.


화산 이현상(火山 李鉉相)이 최후를 맞은 빗점골도 벽소령 밑에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끼어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주류에 끼지 못하였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던 인물.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묵묵히 자기 길을 가다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


군사작전도로가 아직도 남아있다. 벽소령 북쪽의 음정마을 쪽으로는 작전도로의 전체 모습이 남아있지만, 삼정마을 쪽은 일부 구간만 남아있다.


*물 맛 좋은 선비샘


벽소령을 지나고부터는 처음 가는 길이다. 평탄하다는 말도 있고, 주능선코스 중에 가장 힘든 구간이 있다는 설명도 있다. 둘 다 맞는 말인 것 같다. 벽소령에서 덕평봉․선비샘까지는 길이 넓고 평탄해서 부담이 없으나 그 이후 칠선봉, 영신봉 구간은 힘들다.


일행 중 한 명이 벽소령에서 세석으로 오다가 중간에 되돌아가 벽소령대피소에서 자게 되었다는 것을 장터목대피소에서 확인했다.


벽소령에서 세석평전까지는 산행지도상으로는 2시간 40분 정도 걸리는 것으로 나와 있으나, 실제로는 4시간 가량 걸렸다. 시간에 여유가 있어 느긋하게 가기도 했지만, 산행을 시작하고 8시간에서 12시간 정도 지나 피곤이 누적된 시점이기도 하다.


덕평봉((德坪峰, 1521.9m) 바로 밑 산행로 상에 선비샘이 있다. 옛날 덕평골 아랫마을에 화전민으로 살아온 이씨 노인이 평생에 한 번이라도 선비 대접을 받아 보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형제에게 자신이 죽거든 그 시체를 상덕평 샘터위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들들이 그 아버지의 유해를 샘터위에 매장했는데, 훗날 지리산을 찾는 양반들이 샘터에서 물을 마시기 위해 노인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야했다. 결국 할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덤도 안 보이고 샘도 파이프로 연결하여 서서 받도록 조처하였기 때문에 샘물을 먹기 위해 무릎을 꿇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비가 온 후라 그런지 물이 콸콸 흘러내렸다. 물맛이 시원하고 좋았다. 물병을 채워서 다음날 오전까지 그 물을 마셨다.



저 봉우리 위로 명월이 떠오른다.


*다시 인내를 요하는 세석평전까지


선비샘에서 기운을 보충한 후 세석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어려운 코스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각오는 했지만, 참으로 인내를 요구했다.


선비샘을 지나 한참을 가다 보면 칠선봉(七仙峰, 1558m)에 닿는다. 7개의 암봉이 높은 능선위에 자리 잡고 있어 마치 일곱 선녀가 한자리에 모여 노는 것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남쪽으로 대성골과 북쪽으로 한신계곡이 내려다보인다. 칠선봉 가는 길에 단풍나무의 일종인 시닥나무가 붉은색이 도는 잎자루에 작은 노란 꽃을 피우고 있다. 힘이 들어 누워서 나무를 올려 보기도 하고, 말라 삭은 나무줄기의 사진을 찍어보기도 했다. 우리가 칠선봉에 도착했을 때 젊은 남녀 한 무리가 쉬고 있었다. 대학생으로 보였는데, 산을 찾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것이 몹시 반가웠다.


칠선봉을 지난 다음부터는 언제나 세석에 도착하나 하는 한 가지 생각만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이제나 저제나 기대하는데 앞에 정상부가 기암괴석으로 된 암봉이 나타났다. 영신봉(靈神峰, 1652m)이다. 낙남정맥(洛南正脈)이 시작되는 곳으로 물길이 낙동강, 섬진강, 금강의 세 갈래로 나뉘어 흘러드는 삼파수(三波水)다. 혹자는 칠선봉에서 영신봉 오르는 코스를 지리산 종주에서 가장 힘든 코스로 꼽는다. 급경사의 철계단 구간도 있다.


해발 1600m가 넘어서 그런지 얼레지가 아직 피어 있다. 길쭉하고 두꺼운 잎 서너 장 위로 꽃대 하나가 솟아 있고 꽃대 끝에 작고 흰색의 꽃 한 개 내지 대여섯 개가 핀 풀이 기품을 자랑한다. 오늘의 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장 변호사도 역시 이 꽃이 오늘의 꽃 아니냐고 물었다. 우리가 손쉽게 오늘의 꽃으로 의견일치를 본 이 꽃은 무엇인가? 가지 끝에 냄새 나는 노란 꽃을 피운 나무는?


힘들게 철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자잘한 연녹색 꽃을 밑으로 향해 달고 있는 나무가 자주 눈에 띄었다. 뒤에 어디선가 나래회나무라는 팻말을 달고 있었다.


긴 철계단을 천천히 오르다보니 오기가 났다. 그래서 속도를 확 내서 오르막을 올랐다. 봉우리를 돌아가니 철쭉 군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더 나아가니 세석대피소에 닿았다.



*지리10경 중 제대로 본 세석철쭉


그렇게 기다리던 세석대피소에 출발 이후 12시간이 지난 오후 3시 20분경 도착했다. 세석평전(細石平田, 1600m)은 우리말 이름이 ‘잔돌고원’으로 잔돌밖에 없는 고원지대라는 뜻이다. 세석평전은 촛대봉과 영신봉을 좌우에 거느리고 30리가 넘는 드넓은 평원으로 남녘 최대의 고원이다. 세석대피소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이 23억 원을 투입하여 1996년 1월 1일 개장한 통나무식 대피소로 수용 인원이 240명이다.


지리10경 중 제6경이 세석철쭉이다. 철쭉은 제철을 맞고 있었다. 영신봉과 촛대봉 쪽 너른 지대에 철쭉나무 뭉치들이 듬성듬성 분홍색 물감을 뿌렸다. 지리10경 중에 제대로 본 것은 이것이다. 대피소 주변에 심어놓은 야광나무도 흰 꽃을 활짝 피웠다. 꽃이 밤에 빛나서 야광나무다.


선발팀은 우리보다 1시간 이상 전에 도착했고, 뒤에 처진 팀은 4시 30분경에나 도착했다. 산악대장으로부터 저녁과 다음날 아침 도시락을 받고 장터목대피소 예약 서류를 받았다.


선발팀은 술을 몇 잔 마셨는지 취기들이 있었다.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밥과 함께 소주와 오미자주를 마셨다고 했다. 장 변호사는 오른 무릎에 이상이 있다면서 테이프를 감았고, 황 변호사는 출발할 때부터 발목에 테이프를 감고 있었다.


선발팀 일부는 먼저 출발했다. 뒤에 처진 다섯 명 중 한 명인 이 변호사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나와 고 변호사 그리고 이 변호사가 출발했다. 이 변호사는 벽소령에서부터 오른쪽 무릎에 이상이 느껴진다면서 탈출로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세석까지만 가보자고 해서 세석까지 왔던 것이다.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도시락도 먹질 못했다. 내가 둘째 날 먹으려고 가지고 있던 사과를 하나를 건네니 그것은 먹었다. 장터목까지 갈 것인지 고민하는 이 변호사에게 고 변호사가 세석에서 장터목까지는 평탄하고 경치가 좋아 힘들지 않을 것이라면서 장터목까지 갈 것을 권했다. 이 변호사는 이 말을 듣고 따라 나섰다.


이 부장이 남아서 맨 뒤에 오는 사람들을 만나 설득해서 장터목까지 오기로 했다. 항상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것은 이 부장이 맡는다. 맨 뒤에 있던 네 명 중 권 변호사는 벽소령에서 자기로 했고, 세 명이 뒤늦게 세석에 도착해서 술 한 잔 권하면서 장터목까지 같이 왔다.



*세석에서 자지 않고 장터목에서 자게 된 사연


원래 처음에는 세석대피소에서 숙박을 할 예정이었다. 처음 예약할 때도 세석대피소로 했다. 그런데 출발 며칠 전에 예약자 1명을 변경해야 사정이 생겨서 유명산우회에 연락을 했다가 장터목대피소에서 숙박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세석대피소에서 숙박을 하면 천왕봉 일출을 보기 어렵다. 일출시간이 05:20경인데, 세석에서 천왕봉까지 3시간 걸리기 때문에 밤 2시에 떠나야 시간을 맞출 수 있다. 그래서 원래는 3시쯤 출발해서 장터목 직전에 있는 소일출봉에서 일출을 맞을 계획을 세웠었다. 장터목대피소에서 자면 새벽 4시에 출발하면 천왕봉 일출에 시간을 맞출 수 있다. 세석에서 장터목까지 2시간 정도 걸리는 것으로 나와 있으므로 첫날 좀 무리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장터목대피소에서 자는 것으로 바꿨다.


처음 출발할 때부터 많은 사람들로부터 너무 무리라는 지적을 받았다. 그래서 숙박장소를 세석으로 변경할 수 없는지 산악대장에 물어봤다. 대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차피 세석까지 같으면 첫날 장터목까지 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달리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뒤에 처진 몇몇은 세석에서 잘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지만 결국 이 부장과 함께 장터목까지 왔다.



*반야낙조(般若落照)는 결국 보지 못하고


세석에서 장터목까지는 촛대봉, 삼신봉, 연하봉을 거친다. 촛대봉에서 연하봉 가는 길은 지리산 주능선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코스로 널널한 능선길과 기기묘묘한 기암괴석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는 설명도 있다. 산행지도상에는 1시간 40분 정도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우리는 2시간 넘게 걸렸다. 평탄한 것은 고사하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 변호사는 속으로 욕하면서 왔다고 했다.


세석평전 동쪽에 있는 봉우리가 촛대봉(1704m)이다. 촛대봉은 봉우리의 모양이 마치 촛농이 흘러내린 듯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음양수 전설의 주인공인 연진 처자가 낮에는 세석평전의 철쭉 밭을 가꾸고 밤에는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올리던 장소라 하여 촛대봉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설명도 있다. 연진은 후에 바위로 바뀌었다. 촛대봉은 세석평전에서 20분 정도 걸리는데 천왕봉, 반야봉, 노고단 등의 봉우리와 한신계곡과 도장골 등의 주변 계곡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장터목으로 가는 구간에서 지리10경 중 하나인 반야낙조를 제대로 구경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구름이 잔뜩 껴서 해를 구경하기도 힘들었다. 바람도 스산하게 불어 춥기까지 했다. 어쩌다 해가 구름 사이로 나왔는데 지려면 한참 남았다. 일목시간이 7시가 넘었으니 아직 이른 시간이긴 했다.


삼신봉(三神峰, 1680m)은 구분하지도 못한 채 가다보니 연하봉(烟霞峰, 1730m)이 나왔다. 연하선경(煙霞仙境)이 지리10경의 하나인데, 안개와 구름에 쌓인 이 모습을 선경이라 말하는 것인가? 시계가 좋지 않으니 경치를 제대로 구경할 수가 없다. 속세와 떠나 운무 속에 있다는 의미로 선경이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연하봉에서 본 반야낙조의 사진을 본 적이 있어서 서쪽을 바라보았으나 반야봉을 찾을 수조차 없다.


연하봉을 지나 평탄한 길을 가는데 품위 있는 고사목(枯死木) 한그루가 서 있다. 그곳에 다른 일행 대여섯이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저 고사목이 방송에도 나왔고, 저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운이 좋다고 귀뜸해 주었다. 이번 산행에서 만난 고사목 중 가장 훌륭한 것으로 기억에 남았다.


소일출봉(小日出峰)은 장터목대피소 직전에 있는 작은 평지이다. 천왕봉일출을 놓친 사람들을 배려해서 생긴 지명이다. 천왕봉과 제석봉 능선을 비롯해서 연하봉과 촛대봉 능선을 조망할 수 있다. 빨리 대피소로 가서 쉬어야겠다는 일념이었기 때문에 이를 찾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장터를 방불케 하는 장터목대피소에서의 숙박


장터목에 저녁 6시 50분경에야 도착했다. 장터목대피소(1750m)는 남쪽의 산청군 시천 사람들과 북쪽의 함양군 마천 사람들이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교환하는 장이 서던 곳이다. 마천장과 덕산장을 보려가는 길목의 의미이가도 하다.


장터목대피소는 새 산장을 건축한 후 구 산장도 통나무로 새로이 장식하고 1997년 11월 3일 준공했다. 수용인원은 170여 명 정도 된다. 숙소는 2층으로 되어 있는데 각 층마다 또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대피소는 장터처럼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우리의 선발팀은 자리를 배정받고 두 명은 잠들어 있었다. 선발팀 두 명이 모포를 받아왔다. 몸을 씻을 수는 없고, 옷만 갈아입었다. 뒤에 도착한 일행들과 함께 한 쪽 구석에서 삼겹살을 구워 소주 한 잔씩 했다.


여기서 작은 해프닝이 하나 발생했다. 일명 ‘장터목 곰취 사건’. 표 변호사가 예의 그 능력을 발휘하여 취나물를 뜯어와서 된장에 찍어 먹었다. 그런데 곰취가 딱 하나뿐인 모양이었다. 고 변호사가 처음에 잡은 것이 그 곰취였다. 표 변호사가 못내 아쉬움을 표하면서 고 변호사에게 눈썰미 좋다고 몇 차례 말을 했고, 고 변호사는 곰취인지 무엇인지 모르고 그냥 잡은 것에 불과했다고 미안한 표정으로 답했다.


대피소는 소란스러웠다. 예약을 하지 않고 올라와서 밖에서 비박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대피소에 잘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쌀쌀하고 바람이 세게 불어서 밖에서 자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노인이나 아동을 동반한 여성 등에게 우선권을 부여하여 취소된 자리나 복도 등을 배정했다. 마이크로 안내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렇게 한참을 북적대다가 저녁 9시에 불을 껐다.


세면도 못하고 이도 닦지 못하고 소주 한 잔으로 피로를 풀고 잠들었다. 무리한 무릎이 원상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우리 자리는 지하층의 윗층 한 쪽면이었는데, 장소와 모포는 충분했다. 밤에는 난방을 해서 후덥지근했다. 도시락이 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갈 때마다 천왕일출을 볼 수야 없지


둘째 날 일정은 두 팀으로 나누었다. 천왕봉일출을 보고 대원사로 가는 팀과 천왕봉에서 중산리로 빠지는 팀이다. 천왕봉일출을 보려면 새벽 4시에 장터목을 출발해야 시간을 맞출 수 있다.


3시 20분경 주위가 소란스러워 잠을 깼다. 우리 맞은 편 라인에서 잔 사람들이 천왕봉에 오르기 위해 일어나서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도 일어나 준비를 하고 4시경에 출발했다. 동작 빠른 표 변호사는 먼저 나가서 도시락을 먹었다. 중산리로 빠지는 사람도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볼 예정이었으나 날씨가 흐린 것으로 보이자 일출 보러 올라가는 것을 포기했다. 이 부장은 헤드랜턴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날이 밝아진 후 출발해서 대원사 쪽으로 가겠다면서 남았다. 그렇게 해서 4시에 천왕봉으로 출발한 사람은 박 선배, 표 변호사, 고 변호사 그리고 나 네 명이다.


제석봉(帝釋峰, 1808m)을 언제 지났는지도 알지 못하고 어둠 속을 올랐다. 제석봉은 고사목과 초원지대의 봉우리다. 제석은 불교에서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임금을 말한다. 무속에서 제석신은 집안의 무사태평을 관장하는 신으로 무당달의 신이다. 제석봉 북쪽 기슭에 있는 제석단은 조선시대부터 이름 남 무당들의 산신제 장소였다. 제석봉의 고사목지대는 6․25 이후에도 아름드리나무가 울창하였는데, 자유당 말기 제석봉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거목들을 베어내면서부터 수난을 당하기 시작했고 도벌사건이 여론화되고 말썽이 나자 증거를 없애기 위해 불을 질러 나머지 나무들마저 지금과 같이 고사목이 되었다. 고사목은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었고, 우리는 그것을 짐작만 한 채 지나갔다.


천천히 오르다보니 통천문(通天門)에 닿았다. 하늘로 통하는 문, 즉 천왕봉에 이르는 문이다. 거대한 바위덩이 사이로 홈처럼 구멍이 난 것이다. 어둠속에 사진을 찍어보았다. 바위가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데도 새가 아침노래를 활기차게 불렀다. 이 높은 곳에도 새가 있었구나? 새는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지?


천왕봉(天王峰, 1915m)에 오르니 5시 10분이 조금 지났다. 일출시간에는 맞추었는데, 운무에 휩싸인 천왕봉은 우리에게 일출을 허용하지 않았다. 지리10경 중 제1경인 천왕일출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삼대에 걸쳐 적선을 해야 된다는 속설이 있다. 올 때마다 일출을 볼 수 있으면 천왕봉 일출이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았겠지.


우리는 좀 기다렸다가 지리산 최고봉의 표지석을 끼고 증명사진을 한 장 찍었다. 높이 1.5m의 표지석 앞면에는 “知異山 天王峯 1,915m”, 뒷면에는 “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예로부터 천왕봉의 거대한 바위는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란 의미로 불렸는지 천왕봉 서쪽암벽(장터목방향)에 “천주(天柱)”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남명이 덕산 앞개울에 정자(후대에 지어진 洗心亭이 이곳일 것으로 추정된다)를 짓고 그 기둥에 시를 써 붙였다. 제목은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 덕산 계정 기둥에 쓰다)>


청간천석종(請看千石鍾)/ 비대구무성(非大扣無聲)
쟁사두루산(爭似頭流山)/ 천명유불명(天鳴猶不鳴)


천 석들이 종을 보게나,/ 큰 것으로 아니 치면 소리 나지 않는다네.
어찌 하면 저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려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천왕봉의 웅장함을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것으로 표현했다.






세석평전에서


중봉 가는 길에 잠시 얼굴을 내민 해


아쉬움을 남기고 대원사로 하산을 시작했다. 전날 대원사로 내려갈 것인가 중산리로 내려갈 것인가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대원사 하산길이 지루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래도 직접 가봐야 얼마나 지루한지를 알 수 있을 것 아니냐면서 우리는 대원사 코스를 선택했다.


그런데 중봉으로 가는 길이 참으로 좋았다. 날이 밝기 시작하면서 새소리가 청아하고, 물기를 머금은 녹색의 나뭇잎들이 반짝였다. 산행로 상에 주목도 보였다. 구상나무는 거의 모든 구간에 걸쳐 있었는데, 주목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원래의 주목줄기 가운데 사이에 새로운 줄기가 자란 모습의 주목이 눈길을 잡았다. 이미 지평선 위로 많이 올라온 해가 잠시 구름 사이에서 나와 우리에게 모습을 보여주었다.


천왕봉에서 중봉까지는 40분 정도 걸렸다. 산행지도 상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중봉(中峰, 1874m)은 지리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천왕봉 바로 옆에 있으면서 천왕봉에 감탄하고 하산하는 길에 거쳐 가는 경우가 많아 별로 주목받지 못한다. 전문사진작가인지 사진동호회원들인지 몇몇이 삼발이까지 들고 촬영위치를 물색하고 있었다.


최고의 사진, 써리봉 전망대 바위에서 잡은 천왕봉과 중봉


아침에 일어날 때 왼쪽 무릎이 뻐근했다. 가능한 한 왼발에 힘이 가지 않도록 신경을 쓰면서 내려왔다. 어제 오후부터 물파스를 발라주기 시작했는데, 그 빈도가 점점 잦아졌다. 중봉을 지나 적당한 장소에서 쉬면서 고 변호사와 나는 아침 도시락을 먹었다. 표 변호사와 박 선배는 먼저 치밭목대피소로 가서 라면을 끓이는 등 먹을 것을 준비하기로 했다.


어딘가에서 중봉과 써리봉의 구간은 전문산악인만이 탈 수 있는 힘든 코스라고 본 것 같아 다른 길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외길로 보이는 산행로로 가다 보니 전망 좋은 바위에 닿았다. 써리봉(1602m)이라는 표지목이 서 있다. 산행로 자체는 그다지 험한 편이 아니어서 여느 구간과 별 차이가 없었다.


전망바위에서 우리가 내려온 쪽을 바라보니 천왕봉과 중봉이 아주 가까이 있다. 날씨도 확 개어 시계가 깨끗했다. 하얀 구름 한 조각이 천왕봉과 중봉 정상 부근을 지나고 있었다. 통천문 쪽으로 오르면서 보는 천왕봉 모습도 좋겠지만, 써리봉에서 보는 천왕봉과 중봉의 모습은 대원사 코스로 선택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장관이다.



*민간대피소에서 공단 임대대피소로 바뀐 치밭목대피소


써리봉을 지난 다음부터는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했다. 치밭목대피소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오르락내리락 만만치가 않다. 왼쪽 무릎에서는 조금씩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8시경 치밭목대피소에 도착했다. 선발팀은 우리보다 20분 정도 먼저 도착했고, 우리가 도착한 직후에 장터목에서 5시 10분에 출발했다는 이 부장이 도착했다.


치밭목대피소는 취나물이 많이 산출되는 고개라는 의미에서 치밭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내가 본 책에는 치밭목대피소가 설악산 소청산장과 더불어 우리나라 국립공원에 남겨진 마지막 민간산장으로 나와 있었는데, 얼마 전에 공단이 인수하여 임대 형태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막걸리 한 잔 마실까 하여 달라고 하니 임대로 바뀐 후에는 막걸리를 팔지 않는다고 했다.


치밭목대피소는 샘물 뜨러 가는 길이 걷기 좋다. 경사가 심한 것도 아니고 거리도 적당하다. 울창한 숲 속에 길이 나 있어 조금 들어가면 시원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물을 떠온 후 “길이 참 좋다”고 하자 대피소지기가 한 마디 한다. “몸 상태가 좋은 모양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을 떠온 후 그게 어떻게 100m밖에 안 되냐고 항의합니다.” 진입로 입구에 ‘식수 100m’라는 표지가 있는데, 생각보다 길다고 느끼기 때문에 푸념을 하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했다.


동쪽을 향해 있는 치밭목대피소는 전망과 뒤 배경 그리고 주위의 평탄한 지형 등 눌러앉고 싶은 마음이 절로 나는 곳이었다. 우리는 이런 대피소를 임대해서 살면 어떨까 행복한 상상의 날개를 펴보았다. 산을 내려와 세상으로 돌아오기가 정말 싫었다.



*보지 않고 지나치면 후회하는 무제치기폭포


치밭목대피소에서 유평리․대원사 쪽으로 내려왔다. 유평리까지 산행지도 상에는 3시간 걸리는 것으로 나와 있고, 치밭목대피소에서 옆에 있던 어떤 사람은 빨리 내려가면 2시간만에도 내려갈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치밭목대피소를 출발했다.


그런데 치밭목대피소를 출발하여 상당한 거리까지 산행로가 바로 물길이었다. 너덜인 것은 물론이다. 비가 많이 오면 물길로 바뀌어 산행을 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다. 개울이 시작되는 상류라 산행로가 물길에 잠기는 일이 자주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비 오는 날 이곳의 산행은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1시간 정도 내려가서 급경사 나무계단을 내려가니 무제치기폭포 100m라는 팻말이 나온다. 정상적인 산행로에서 벗어나 급경사의 산행로를 따라 계곡으로 내려가야 한다. 피로감이 막바지로 몰려오는 시점이어서 일행들은 지나치고 지나가 버렸다. 지리산에 있는 몇 안 되는 폭포인데 여기까지 와서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어서 혼자 내려갔다.


그런데 거대한 3단 암벽의 폭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비가 온 후라 그런지 물의 양도 많은 편이다. 스스로 무지개를 만드는 폭포라 하여 무지개폭포의 준말로 무제치기폭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지개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냥 지나쳐 지나갔더라면 크게 후회했을 것 같다.



*층층나무 흰 꽃으로 얼룩진 웅장한 계곡


무제치기폭포에서 700m 가량 내려가면 윗새재(3.0㎞)와 유평리(4.4㎞) 갈림길이 나온다. 윗새재로 빠지면 택시를 불러 타고 나올 수 있으며, 버스정류장은 유평리 쪽에 있다. 우리는 유평리(油坪里) 마을 쪽의 길을 선택했다.


장당골 계곡을 끼고 내려오다가 치밭목능선을 넘어 한판골 계곡을 타고 내려온다. 치밭목능선 미치지 못한 지점에 전망바위가 있다. 아래로는 장당골 깊은 계곡이 눈 아래 끝없이 전개되어 있고, 위로는 저 멀리 무제치기폭포도 보인다. 산등성이 곳곳에는 층층나무가 흰 꽃을 뒤집어쓰고 있다. 전망바위에 암자를 하나 짓고 며칠 머문다면 그것이 곧 신선이지 않을까?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넓은 바위 위에 벌러덩 누워서 하늘을 보았다. 푸른 잎과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음이 한가롭기만 했다.



*하산길의 고통


왼쪽 무릎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아우성이다. 유평리 2.6㎞라는 팻말을 본 지점부터 왼 무릎을 굽히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길은 돌길이고, 또 평탄하지도 않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를 시험했다. 앞에 가던 고 변호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기다려주기까지 했다. 왼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내려왔다. 산행지도 상에 표시된 시간보다도 1시간 정도 더 걸려 4시간 만에 유평리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도 몇몇 나무와 꽃들이 눈길을 잡았다. 노란 꽃을 피운 피나물이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다. 계곡가라 연하천대피소 근처에서 본 동의나물로 착각했는데, 뿌리잎이 동의나물의 경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는 둥근 신장형이고 피나물의 경우 잎자루가 길고 5장의 작은 잎으로 된 깃꼴겹잎이다.


찔레의 순백색 꽃을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찔레꽃은 어릴 때부터 보았고, 최근에도 여러 번 보았지만 이렇게 크고 또 순결한 흰 색인 줄은 깨닫지 못했었다.


땅바닥에 많은 꽃들이 떨어져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알고 있는 나무의 꽃인데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쪽동백나무 꽃이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짓고, 내려오다 보니 때죽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꽃이 보였다. 때죽나무의 꽃이었다. 나무 밑 땅바닥을 수놓았다.


남명은 지장암을 거쳐 쌍계사로 가면서 고대 중국 전국시대의 역사서인 『국어(國語)』에 나오는 ‘종선여등 종악여붕(從善如登 從惡如崩, 선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악을 좇는 것은 산을 내려가는 것과 같다)’을 떠올렸다.


“당초 위쪽으로 오를 적에는 한 발자국을 내디디면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기가 어렵더니,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올 때는 단지 발만 들어도 몸이 저절로 흘러내려가는 형국이었다(初登上面 一步更難一步 及趨下面 徒自擧足 而身自流下).”


남명이 유람할 때의 나이가 58세였다. 그 나이에도 무릎이 아주 튼튼했던 모양이다. 나같이 무릎이 좋지 않은 사람은 급경사를 내려오는 것이 올라가는 것보다 힘들다.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오는 것은 무릎이 아주 좋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무릎 나쁜 사람이 산을 내려오기 힘들 듯이 사람에 따라서는 종악(從惡)도 힘들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나이 칠십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경지에 도달하였는데, 그 경지에 이르면 종악(從惡)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부단히 “끊고 갈고 쪼고 문지를(切磋琢磨)” 일이다.



*대장정 마무리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유평리 마을에 도착했다. 산행로에서 벗어나자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민박집도 나왔다. 민박집 앞에 붉은 열매를 빽빽하게 달고 있는 나무가 있다. 줄기를 보면 틀림없는 벚나무다. 버찌가 이렇게 붉은색의 과정을 거쳐 거멓게 변하는 것이었구나.


선발팀이 먼저 내려가서 식당을 잡았다. 유평리 마을 앞으로 꽤 넓은 시내가 흐른다. 대원사계곡이다. 커다란 바위들이 시내 가운데 자리 잡고 있기도 했다. 물도 많고 맑다.


식당에서 닭도리탕에 소맥으로 피로를 풀었다. 한 시간 정도 기분을 푸니 무릎도 굽힐 수 있고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간단하게 냉수마찰을 하고, 식당 주변을 둘러보니 크지 않은 화단에 이런저런 꽃들이 피어있다. 안주인께서 설명도 해주었다. 작약, 서양채송화(포테리카, 비름채송화), 제라늄, 두견화, 안주인도 이름을 모르는 노란 꽃을 핀 풀과 또 꽃이 진 원예화 등등. 안주인은 우리에게 하나하나 설명해주면서 뿌듯해 하는 것 같았다.


중산리로 내려간 팀과는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서 합류했다. 전체가 증명사진을 촬영하지 못해서 신탄진휴게소에서 촬영을 했다. 그리고 서울 양재동에 와서 뒤풀이를 하고, 다들 드디어 해냈다는 자신감을 가슴에 안고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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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 근처에서 해가 잠시 구름을 뚫고 나와 일출의 모습을 선사했다.



 써리봉 전망대에서 천왕봉과 중봉을 배경으로




 


 글. 김선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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