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그리고 2008년의 국가보안법

2008년 11월 17일 minbyun 196

   
송두율 교수를 변호하면서
2004년 8월 6일 독일에 있는 송두율 교수의 지인으로부터 두장의 사진이 담긴 이메일이 날아왔다. 사진은 송교수 부부가 독일에 도착하여 환하게 웃으며 친구들의 환영을 받는 모습이었다. 11개월 만에 다시 꿈에 그리던(?) 독일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참 묘한 생각이 들어 작년 9월22일 인천공항으로 귀국하던 송교수 가족의 사진을 꺼내 보았다. 역시 웃는 얼굴의 송교수와 가족들이 그 속에 들어있다. 정말 꿈에 그리던 고향 땅을 37년만에 밟는 감격의 순간이다. 똑같이 송교수와 부인이 한껏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데 두 사진을 나란히 놓고 보노라니 괜한 서글픔이 스며든다. 사진 속의 송교수는 비록 웃고 있지만 작년에 비해 훨씬 깊은 아픔의 상처를 감출 수는 없다. 지난 11개월은 부푼 가슴안고 귀국한 송교수를 정말 할퀴고 지나갔다. 마치 무시무시한 괴물이 송교수를 집어 삼켜 11개월 동안 온갖 상체기를 내며 고통을 주다가 갑자기 입 밖으로 내뱉어버린 느낌이다. 세상 밖으로 나온 그는 비록 웃지만 그 동안 받은 상처는 어쩌란 말인가.


그 상처에 대해 생각한다. 송교수가 입은 상처, 부인과 자식들의 고통, 절망감에 눈물짓던 지인들, 국가보안법의 시퍼런 서슬에 가위눌려 잔인하게 난도질 당하는 모습을 그저 두려움에 지켜보기만 했던 많은 학자들에게도 이번 사건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나 역시 시간에 쫓겨 치료를 미루다 결국 어금니를 잃었다. 그러나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 송교수 자신이다. 그리고 송교수에게 상처 입힘으로 인해 민족통일의 가능성이 훨씬 멀어졌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가 입은 상처가 가장 크다. 내가 이 사건을 가장 안타깝고 애닯게 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남북 양측 정부는 수십년 동안 자기 국민들에게 상대방에 대한 왜곡 선동을 계속해왔다. 어린 시절 북쪽에는 머리에 뿔난 붉은 돼지가 지배하는 사회로 알고 있었다. 사정은 북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부 당국자든 민간인이든 서로에 대해 신뢰는 눈꼽만큼도 없고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기에 바빴던 것이 우리의 과거다. 그런 비상식이 지배하는 시기에 송교수는 민간차원에서 남북간의 교류에 물꼬를 처음으로 튼 사람이다. 그는 1989년 독일의 통일과정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그 체험으로 통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과 북이 서로를 잘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송교수는 1990년대 중반 남북통일학술회의를 개최하면서 ‘북쪽 학자들의 10가지 요구 중 5가지는 북쪽 학자들을 설득하여 포기시키고, 나머지만을 남쪽에 요구하도록 만들었고, 남쪽 학자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고 진술한다. 학자들간에도 서로 불신이 워낙 높아 학술회의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기 보다는 헐뜯고 비난하는데 더욱 관심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교수가 양측 중간에서 조율하여 결국 한자리에 모이게 하였고, 소위 ‘지뢰밝기’과정을 통해 서로하지 말아야 할 발언을 솎아내고 이성적인 토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한 끝에 양측 학자들은 스스로의 오해를 조금씩 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학술회의가 2003년까지 계속되었고, 그 영향으로 이제 학자들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경제 등 다양한 분야까지 민간교류가 확대되었다. 민간차원의 교류는 남북을 서로 이해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정부간 교류를 촉진시켜 정상회담이라는 성과까지 가져왔다. 송교수가 그런 중간 매개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37년간의 노력 때문이다. 그는 오랫동안 남한에 들어오지 못했지만 남한출신이고, 남한에서 대학을 졸업하여 이미 남한에 많은 학문적, 혈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70년대부터 북한을 드나들며 북한 학자들과의 교류를 가지고 있었다. 유럽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성장하면서 철학과 사회학 분야에서는 누구든 그의 강의를 듣고자 했고, 그로부터 혜안을 얻고자 하였다. 세계적 지성인이 남과 북 양쪽에 관계를 맺으면서 매개자로 역할하는 것은 교류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다. 그 결과 남과 북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송교수를 신뢰하고, 의지했던 것이다.


변론을 위해 송교수의 생각과 활동을 낱낱이 연구하는 과정에서 ‘아 통일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하고 무릎을 탁치게 되었다. 동양인으로는 처음이라 할 정도로 어려운 독일교수시험을 통과하고, 세계지성이라는 하버마스의 뒤를 이을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 명성을 얻은 학자가 처벌을 감수하고 북한을 방문하고, 북쪽 학자들과 교류를 시작하는 것은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통일을 위한 헌신이고, 희생이었다.

 
이 모든 희생과 헌신을 국가보안법은 완전히 짓밟았다. 그의 진정한 의도가 어디에 있든 그 과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국가보안법은 무조건 북한으로의 방문과 북쪽 사람과의 접촉, 북쪽 단체의 가입이라는 결과에만 촉각을 곤두세운다. 진정으로 통일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북을 무너뜨리는 데에만 열중한다. 국가보안법이 북한에 대한 무력통일을 국시로 삼고있던 전시상황에서 임시법으로 만들어졌고, 그 이후에는 북한을 빌미로 권위주의 정권의 안보수단으로 악용되기만 하였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국가보안법은 현재 그 날카로운 발톱을 잔뜩 웅크리고는 있지만 사실은 북한에 대한 무력통일을 전제로 활동하는 법이다. 그래서 국가보안법과 다른 주장을 용납할 수 없어 처벌하며, 독재권력에 대한 비판도 북쪽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이유로 무조건 처벌한다. 그 결과 독재권력에 대해 한마디 비난을 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의 위협에 몸을 떨어야만 하고, 권위주의 정부를 찬송하는 것 이외 다른 주장은 일체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온 국민의 머리 속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렇게 국가보안법은 민족통일의 앞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며, 남한의 온 국민의 생각을 일률적으로 통제하는 괴물이었다.


처음에는 오랫동안 고향방문도 못하면서도 견결성을 잃지 않고, 민족의 통일을 위해 노력한 그 헌신성에 감복하여 변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재판이 깊이를 더해가고 쟁점이 명확해지면서부터는 민족통일을 위해 지금까지 송교수가 해온 역할은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를 구해내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절대절명의 과제가 되었다. 국가보안법이 전제하고 있는 북한에 대한 규정은 전혀 사실과 다르며, 송교수에게 덧씌워진 혐의는 믿을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는 거짓말이란 증거를 찾기 위해 온갖 구상을 다해야 했고, 수십명의 북한, 철학 전문가들과 토론을 하며 뜬눈으로 지샌 밤이 갈수록 늘어갔다. 변호인들은 각자 맡은 부분에 대한 변론을 위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했고, 서로 격론을 벌이며 누명을 벗기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심 법원의 결론은 예상했던 것처럼 변호인들의 완벽한 패배였다. 그것은 국가보안법과 억압질서의 완전한 승리와 민족통일의 요원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속도에 속도를 더해 달려가는 중에 갑자기 엄청난 벽에 꽝하고 부딪힌 듯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다.


1심재판의 과정과 결과는 국가보안법을 나 자신의 문제로 만들었다. 더 이상 의뢰인 송교수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과거를 부끄럽게 만든 역사의 문제이고, 온 국민의 머리 속을 통제해 온 국가보안법의 문제이기에 이제 이 싸움은 나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비록 2심에서 송교수의 주요 혐의는 모두 무죄선고를 받았으나 국가보안법이 없어지지 않는 한 이런 사건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지금 송교수가 한국에 없더라도 내가 국가보안법과 싸우며 법정안과 밖에서 더욱 치열하게 싸울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국가보안법이 생존하는 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통일은 단 한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된 이상 같은 하늘아래 국가보안법과 함께 숨쉴 수가 없다.
 

작년 9월 송교수가 귀국하여 국정원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노동당 입당 사실이 알려지자 갑자기 여론은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평소 친근감을 갖고 있던 학계, 정치계 등의 지인들과 민주인사들까지도 송교수를 외면하였다. 우리 안의 자기검열장치가 다시 작동을 시작한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우리 머리 속에 바로 이런 반응을 하도록 프로그램된 칩을 심어놓은 것이다. 소수의 변호인들과 지인만이 송교수 곁을 지키게 된 당시 나는 한장의 편지를 사람들에게 보냈다. “사실이 어떤 것이든, 송교수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든, 그는 지금 발가벗겨진 채 칼바람 속에 혼자 내버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그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있고요. 그에게 기댈 언덕이 필요합니다. 언덕이 되어주십시오.” 송교수가 석방된 지금 나는 그들에게 다시 한번 호소해야 한다. “반세기 동안 우리를 고통 속에 신음하게 한 국가보안법이 이제 벼랑 끝에 서있습니다. 그를 영원히 잠들게 하기 위해 조금만 더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이 되어주십시오.”

 

이 글은 송두율 교수의 변호를 맡았던 송호창 변호사가 2004년 8월에 작성한 글입니다. 그리고 4년이 훌쩍 지난 2008년. 오늘까지도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지 않았고, 오히려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흘렀지만 지금도 변하지 않은 ‘악법’들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이 글을 올립니다.